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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거듭난 방언기도 (뉴하우스)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뉴하우스는 요즘 방언기도 안 하지?”

어느 날 사역자의 아내인 내 친구가 전화로 대화하던 도중 느닷없이 던진 말이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적절한 대답을 찾느라 꽤 빠른 두뇌회전이 있고 나서 겨우 토해 낸 말은 "어…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잘 안 하지…” 하는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 전부였다.
"요즘 방언 기도해? 안 해?" 가 아니라 아예 “…안 하지?” 라는 단정적인 물음에 나도 모르게 방어 기어가 작동한 까닭일까? 이 말이 나오기까지 겨우 1-2초에 달하는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마치 길고 어두컴컴한 터널 속을 지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끔 사람들은 이렇게 안 물어 봤으면 하는 질문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질문에 꼭 대답할 이유는 없지만 어떤 때는 이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단도직입적이면 질문의 타당성을 떠나서 마음이 불편해진다. 흔한 말마따나 "찔리는 게 있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그럴 거 같아.” 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이럴 땐 마주 보고 앉아 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스럽긴 한데, 나의 이런 생각엔 아랑 곳 없다는 듯 친구는 어려운 시기를 방언기도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버티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어지는 방언 기도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확신에 찬 그녀의 심령을 토하는 불과 몇 마디가 내 심령 어느 한구석을 서서히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방언기도를 ‘하고 안 하고’가 내 마음의 갈등을 느끼고 고심하게 된 이유는 아니다. 나에게는 꾸준하고 열정적으로 방언기도를 할 만큼, 친구가 갖고 있는 그런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 확신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 하고 자신에게 되물으며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다.
새로운 삶의 터전에서 장래마저 불투명한 시점에 서 있는 나.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어떻게 내 앞길을 헤쳐나가야 하는지 보여 주는 이도 없는 모든 것이 불투명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낫설고 황량한 곳에서 나의 영혼마저 갈급해져 갔다. 

그러나 교회도 아직은 내겐 낯설고 생소한 것이 참 많았다. 모르는 건 왜 그리 많은지. 성경 말씀도 잘 모르고 교회에서 쓰는 용어에도 익숙하지 않은 나는 예배 중 통성기도 시간이 무척 괴로운 시간이었다. 내 성격 탓도 있지만, 단적으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랐다. 그것도 내 앞 뒤 옆, 빼곡이 앉거나 서 있는 사람들 속에서 큰 소리로 내 은밀한 기도를 쏟아 놓는다는 것이 나와는 코드가 잘 맞지 않았다.
모든 게 쑥스럽고 어색한 나는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옆에서 큰소리 내어 열광적으로 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 소리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저 요란한 소음 속에서 나도 뭔가는 흉내라도 내야 하는 강박감을 느끼긴 하나 이건 흉내도 낼 수 없는 성질이라 혼자만의 수치감과 이질감으로 그런 기도시간이 두려운 시간이 돼버렸다.

하나님도 알고 싶고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은혜'도 받고 싶은 나는 방법을 모른 채 갈급한 심령으로 어느 날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두 앞에 나와 기도하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이 또한 내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우르르 몰려나가는 사람 중 나만 앉아 있는 것이 더 어색해져 나도 모르게 군중심리에 밀려 앞으로 나갔는지 모른다. 어느 새 나는 한국서 학창시절 벌 받던 자세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앉아 있는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래저래 불편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할 줄 모르는 ‘기도’의 운을 몇 마디 띄우자 마자 입에서 나오는 기도는 나도 못 알아 들을 소리로 변하는 동시에 혀마저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리하여 너무 쉽게, 별 노력도 없이 감히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못한 방언을 하게 된 것이다.

예기치 않게, 방언을 시작하게 된 나에게 방언기도는 점차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어갔다. 서브웨이에서 내려 밤길을 걸어야 할 때도, 지루한 비행시간에도, 아파서 누워 있을 때도 깊숙이 숨겨 두었다가 가끔 끄집어 내어 긴요하게 쓰는 비상용품이었다. 시작은 이렇게 순수했다. 그냥 주신 거 받아서 사용하면 되었다. 하게 된 방언을 계속하면 되었다. 쉽게 할 수 있었다고 해서 가치가 덜 한 건 아니니까.

그러나 좀 더 자신에게 솔직하자면 나의 방언기도 생활은 내 친구가 말하듯 내 신앙생활에 필수적이거나 절대적이진 않았다.

친구와의 대화 후, 내가 방언기도에 대해 심드렁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들여다 볼 필요성을 느꼈다. 반드시 어떤 역기능적 요소가 있기에 초래된 심드렁 아니겠나?

그래서 할 수 없이 방언기도에 대한 나의 견해와 의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는지 현미경과 돋보기를 다 동원해 돌아 볼 필요성을 절감하며 지나간 세월을 뒷걸음질 해 본다.

언젠가부터 나는 ‘은사’ 라는 거창한 레이블과 함께 방언의 의도와 진정성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보는 많은 교인들은,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의 의와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겨우 깨달아 은혜의 개념을 알아가고 있는가 하면 은사만은 절대로 거저가 아니었다. 은사로 개인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특정인의 신앙의 깊이에 따라 ‘배급’되거나 하나님께 인정받은 징표로 여기다 못해, 이런 ‘은사 소유자’를 각별한 사람들로 떠 받드는 교회 내의 양상과 인식에 나는 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방언한다는 일부 교인들의 우월 의식도 나를 한숨 짓게 했다.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사람이 마땅히 상식적으로 해야 하는 일까지도 등한시하는 기현상과 억눌린 감정의 폭발인지 성령의 역사인지 구별 안 되는 이런저런 양상에 반감을 느끼고 은사에 치중하는 교회와 사람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순수하던 시절 알지 못했던 외부적인 압력에도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빈번히 접하는 방언에 대한 해석과 견해 차이는 당연히 친분이 있는 사람과는 정치 얘기만큼이나 특별히 피해야 하는 터부 시 된 대화의 소재이다.

그렇다고 교단마다 서로 전제가 다른 신학이론과 성경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다 수용할 수는 없지만, 불분명해 보이고 난해한 주제인 것만은 사실이니 될 수 있으면 논쟁이나 토론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논쟁 가운데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봐서도 지혜롭게 비켜가야 할 토픽임을 분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는 더 싫었다. 

어쩌다 오순절 계통과 보수적인 장로교에 양다리 걸치게 된 나는 내가 어느 쪽의 지인들과 있느냐에 따라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죽은 신앙"의 소유자도 되기도 하고 "말씀의 깊이가 없어 은사에만 치중하는" 부류의 한 사람으로 간접적 단죄를 받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각자가 믿는 신학적으로 다른 해석을 모두 존중해 주는 게 신앙적으로도 고상한 자세려니 하며,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충돌과 마찰 그리고 오해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 나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난 방언에 대한 속 시원한 해석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중도를 지키는 것이 너그럽고 포용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나니 방언기도의 급박함도 같이 사라졌다. 

그 외에도,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방언을 "받아 내려는" 인간적인 발악의 흉칙함 때문일까. 방언을 함과 동시에 영적 수준마저 자동으로 등급시키는 어떤 은사 만능주의자들 때문일까. 어떻게 나만도 못 한 사람에게 방언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나 하며 회의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질투심 때문일까. 

여하튼, 나는 방언으로 인한 ‘대 논란’의 대열에 나까지 합세할 이유는 더욱이 없었고, 대신 내가 이미 가진 반발심과 중도를 지키려는 인간적인 사고는 나날이 확고해져 갔다.
처음 방언을 할 때 순수하던 심령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워 들은 신학적 ‘고찰’ 내지는 나 스스로 만들어 낸 편견으로 점점 방언에 대해 ‘유식’해져 간 나는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는 구절을 문맥보다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 어쩌다 방언하게 된 ‘행운아’ 정도로 자신을 낙찰 시킨 것 같다.

자연히 방언의 절대적 필요성은 약화되거나 그냥 옵션이 된 마당에, 난들 기를 쓰고 스스로에게 방언의 필요성을 강조할 이유도 없게 되자 활용마저도 점점 시들어져 갈 수밖에. 이렇게 해서 나의 방언은 어쩌다 특별한 날 꺼내 쓰는 ‘차이나’가 되었고 사용하는 빈번도는 점점 줄어 갔다. 
믿음과 확신이 없는 나의 방언 기도에 나는 이렇게 심드렁해져 간 거다. 

그렇담, 이 시점에서 나의 방언 불활용의 이유를 정당화하려면 나 자신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다른 기도 생활’은 어떠했나?”라는 것이다. 

방언은 어쩌다 아쉬울 때 쓰는 비상용 기도라면, 정상적인 나의 언어로 하는 기도는 수시로 쉬지 않고
하는 기도인가. 방언기도를 꼭 할 필요가 없는 만큼 나의 ‘다른 기도’ 생활은 얼마나 활발하고 영적인 기도였나. 또, 나는 수시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얼마큼 기뻐했던가? 기도를 부탁하든 안 하든 내일 같이 중보기도 하는 열정과 믿음과 기쁨이 있었나. 매사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나?

이제는 예전 같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일관성 있게 꾸준히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의 할애라는 실질적인 이유가 나의 발목을 항상 잡는 듯 했다. 시간의 여유를 찾기 전에 마음의 여유는 더 찾기 어려웠다. 자연히, 불규칙하고 일관성 없는 기도는 나의 신앙생활의 취약점이 되고 수시로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기도 부탁을 받는 것처럼 짐스런 일이 없었다. 여러 기도 제목을 듣고 나면
"기도 해야지" 라고 말은 쉽게 하고 맘도 먹지만 판판이 자신에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한 기도의 열정과 믿음이 없는데 남을 위해 없는 열정과 믿음을 만들어 낼 수는 더욱 없기 때문이었다. 자책과 부끄러움, 무기력을 넘나들다가 반짝 하고 해 뜨는 날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관성
없는 기도 생활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기도에 전념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피곤한 몸, 지친 심령, 놀랜 가슴일 땐 더 기도가 막혀 나오질 않는다. 주위 사람들을 보면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에서는 진정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인지 아니면 신세 한탄인지 구분도 안 된다.
그만큼 감정이라는 마수에 휘둘리는 연약한 심령으로 무슨 수로 쉬지 않고 영으로 기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의문의 의문을 거듭한다. 내게 기도는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훈련이다.

누구나 성도면 기도하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기도도 기도 나름이다. 가끔, "우연인가?" "우연이겠지.'라는 불신과 영적 둔감성이 헤집고 들어와 자리잡을 만치 믿음과 확신 없는 기도생활의 무기력함이 싫었다. 

나는 언제나 기도가 생활화 될까?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는 기쁨과 설렘이 있는 기도. 그 어느 기도 제목도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요동하지 않는 믿음과 확신이 있는 기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기도. 십자가 앞에 다 내려 놓아도 두렵지 않은 기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를 위하여서도 뜨겁게 마음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기도. 적어도 기도하는 순간만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내 속에 부어지는 기도. 나는 이런 기도가 항상 아쉬웠다. 꼭 수련회를 간다든가 기도원을 간다든가 할 때만 체험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 생활 속에서 매일 체험하는 기도의 능력이 왜 없는지.

기도 행위 자체에 능력이 있지 않음을 깨달은 지는 오래다. 그저 입술에 머무는 "믿습니다"는 이제 더는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줄을 하나님께서 모르신다던 설도, 여러 다른 기도의 방법론도 별 도움이 안 되었다.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상호관계임을 잘 안다. 그래서 기도만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장하고 싶은 거다. 나의 "다른 기도 생활" 도 방언기도를 온전히 대신할 만큼 완전한 기도는 역시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래, 이젠 변화가 올 때도 되었다...라는 막연하나마 다급한 생각이 날 자극한다. 나를 방언기도에 대해 심드렁하게 만든 여러 요소는 어쩜 존재하지 않는 거짓 상호성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뉴하우스는 요즘 방언기도 안 하지?" 하는 친구의 진심 어린 질문이 다시 한 번 나의 마음에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불을 지른 것 같다. 그래서 맘 먹고 의도적으로 방언기도에 집중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방언기도와 나는 힘들게나마 점차 친밀해져 갔다. 

그러나 점차 익숙해져 가는 방언 기도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항상 의문점 투성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도 못 알아 듣는 기도를 들으시나? 입술은 기도하는데 내 머릿속은 기도 대신 세계 일주나 다니고...이래도 되나? 내가 하고 싶은 기도와 내 영이 친히 하나님께 하는 기도는 얼마나 다를까? 갑자기 다른 방언으로 변하면 무슨 나라 말일까, 나는 무엇을 기도하고 있을까 하며 궁금해 지곤 했다. 

한동안 이렇게 갈팡질팡하며 산만한 기도를 하던 중 어느 날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라는 말씀이 총알이 되어 가슴을 뚫고 들어오는 듯 했다. 아차 싶어지며 안개 걷히듯 내 영의 눈이 맑아졌다. 난 왜 지금까지 그리도 못 알아 듣는 데만 집중했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알아 들을 수 없고 마음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방언기도를 하면서 내 마음은 온통 알아 듣고 싶어하고 궁금해 하며 마음의 열매를 맺으려 애쓴 것이다. 이런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겠나? 이렇게 분명한 말씀을 왜 내 눈이 피해 갔나 싶었다. "....방언으로 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은 영의 기도라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영의 기도’라는 말씀이 벨을 울린다. 나의 방언기도에 빠진 중요한 요소가 있었음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상 주시는 자임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은 마음으로 기도할 때는 당연히 믿고 의지해야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믿음의 요소를 방언기도할 때는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못 알아듣는 다는 사실이 믿음마저도 앗아갔단 말인가? 무엇인가 혼자 착각하고 있다 깨달았을 때 느끼는 황당함과 부끄럼이 꽤 오래 머물렀다. 아마도 내가 가진 방언기도에 대한 불신의 심각성이 주는 충격이었나 보다. 이런 깨달음 후에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의 방언기도는 더는 그저 주절거리는 방언기도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기도임을 믿는 기도로 다시 거듭나게 됐다.

이제 방언기도는 못 알아 듣는다고 하여 내 마음과도 먼 기도가 아니었다. 나의 제한된 언어로 내가 알아 듣는 말의 기도보다도 더 확신하는 성령께서 친히 연약함을 도와 내 영이 구할 바를 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임을 나는 믿게 되었다. 나의 영과 마음이 못 알아 들어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로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는 방언기도는 계속되었고 점차 또 다른 의문점마저도 슬슬 풀려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생긴 또 다른 변화는 ‘영의 기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방언기도를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곳저곳을 헤매던 나는 언제나 영, 혼, 육이 하나로 일치되어 경건한 기도를 하나 싶어 이런 나의 산만하고 집중력 없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곤 했었다. 아니면 나만 그런가 하는 자격지심도 슬그머니 들었다. 그리고는, 아마 이런 불경건한 기도를 하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긴 적도 수차례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잘못된 인식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말 그대로 방언기도는 영의 기도이다. 나의 마음과 생각이 육신의 일을 도모할지라도, 마음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상황과 형편이 아닐지라도, 내 영혼은 주님께 영의 기도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내 언어의 한계, 내 표현 한계의 제한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구할 수 있다는 사실. 영의 기도에 대한 깨달음이 나의 제한된 생각과 시각으로부터 날 자유롭게 하고 ‘영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영으로 기도할 수 있어서, 더는 감정의 사수에 나의 기도가 매일 필요가 없어서, 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자유로워진 내 영혼을 나의 감정과 이성으로부터 분리해 볼 수 있었다. 내 영혼은 수시로 주님께 나아가 비밀을 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지금까지 어렵고 힘든 기도의 중압감에서 조금씩 헤어나고 기도에 대한 마음과 생각도 점차 가벼워져 갔다.

적당히 통제하고 조절해야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우리를 사람 되게 하는 우리의 감정. 가끔 우리를 대신 장악해서 뇌의 기능을, 그리고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하는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수시로 변하는 게 우리의 감정이다. 걱정, 두려움, 슬픔, 미움, 원한의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지나간 허무한 세월 앞에 넋을 놓기도 한다. 나는 이런 나약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데 얼마큼 큰 거침돌이 되는 줄을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길 들여지지 않은 감정은 믿음 대신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게 하기도 하고 종종 우리의 기도를 아예 막기도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감정의 호소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성품에 근거한 믿음의 기도 대신 그저 좋아 보이는 것, 갖고 싶은 것을 억지로 구하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고 그것이 전부인 양 구하고 또 구한다.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말씀만 붙들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생략하거나 음미하지 않는다. 주님과의 관계는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지 원하는 것에만 급급해 한다. 이렇게 마땅히 빌 바를 모르는 우리에게 수많은 기도의 장애물은 시시각각 다가 온다. 

그러나 분명히 알게 됐다. 나의 마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주신 방언, 영으로 하는 기도, 내 안에 내주하는 성령께서 친히 나의 영을 통해 간구하는 기도,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젠 나의 어떤 마음의 감정 상태도, 환경도 나의 기도를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젠 방언기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영원한 소망에 대한 기쁨, 말할 것 없는 큰 기쁨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삶이 곤고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아뢰는 기도의 특권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의 여유, 적절한 시간과 장소, 기도할 수 있는 기력, 기도하고자 하는 의욕이 모두 갖추어진 최상 기도의 여건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더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부족하여"라는 말을 입에 담을 필요도 없어졌다. 우리 육신의 부족함을 친히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으로 하는 기도를 선물로 주셨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늦게나마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인간중심적이고 모순된 이론과 논리의 허우대를 수시로 끌어 안는 습관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은 나는 깊이 깨닫게 되었다.

방언기도로 받은 은혜로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는 친구의 말이 나는 무슨 말인지 이제는 너무도 잘 안다. 이제 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애매모호한 기도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이자 최고의 기도임을 나 스스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을 초월해 관여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손길, 남을 바꾸려는 설득과 강요를 필요 없게 하는 방언기도의 위력, 아무 때고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가슴이 먼저 뛴다. 그리고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삽시간에 몰려온다. 그리고 종국엔 믿음이 자라고 나의 삶이 풍성해진 수많은 증거가 또 나의 간증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