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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신자의 삶의 패턴인 방언



"나는 여러분 모두보다 더 영언[각주:1]을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원문 상 가능한 다른 번역: "나는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 더 영언을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코린토A=고전 14:18. 사도 파울의 고백. 이하 성구 사역)



많은 사람들이 영언과 잘 못 사귑니다. 


필요악 정도로, 또는 있으나마나 하거나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첫 인상이 워낙 안 좋은 나머지 영언자들만 봤다 하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 자신을 무엇으로든 합리화 하게 되지만, 알고 나면 꽤 불행스런 일입니다.  

제 자신의 옛 경험으로 하는 말입니다.


언젠가 한 친구 선교사, 목회자와 셋이 앉은 자리에서 장시간 토론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만..둘의 한결 같은 방향은 "영언은 오늘날의 것이 아니다", "영언은 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고집이었습니다. 전형적인 칼뱅주의적 '중단론'(cessationism)이었지요. 한 친구는 더구나 제가 무척 친근히 여기던 선교사였기에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안타깝고 서글픈 날이었습니다. 


제 자신도 과거엔 대동소이한 경우였습니다만..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영언을 시작하고 나서 생각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과연 그들에 따르면, 제 영언도 '현상'에 불과하며, 저는 현대인 아닌 원시인에 불과한 것인지..?

하지만 영언은 신약인들의 삶의 패턴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자마자 신약인들이 한 첫 행동이 영언입니다. 

예수님이 오순절 전 예언하신 그대로였지요(마르코스=마가복음서, 맑 16:17).

믿음의 사람들이었기에 표징으로서 새 영언이 따르게 된 겁니다.


성령께서 지상에 오신 이래로 오가는 세대의 모든 신자들은 영언을 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맑 16:17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게 됩니다.


오순절 날, 120명 전원의 영언 사건 이후 우리는 신약에서 분명히..몇 년 또는 몇 십 년 간격으로 다음과 같은 일정한 영언 패턴을 봅니다.


사마리아 교회의 영언 (행전 8:14-18)

샤울(파울) 영언 사건 (행 9:17, 참고: 코린토A=고전 14:18)

코르넬리우스 가정교회의 영언 (행 10:44-46, 참고: 11:15-17)

에페소 교회의 영언(행 19:1-7)  

코린토 교회의 전반적인 영언(코A 14장)


그런데 영언 무경험자 또는 영언 반대자들, '중단론'을 믿는 일부 신학자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믿고나서도 영언을 "하지 않은" 케이스를 성경에서 '수색'하고 찾아 다닙니다. 

그러는 그들의 의도는..


영언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에 따라 다른 은사이며..

영언은 계시 미완성 시대의 것이고 지금은 완전계시인 성경이 있으므로 불필요하며..

초기 교회의 영언은 외국어였으나 지금은 아니며..

과거의 영언은 진짜였으나 지금은 다 가짜 내지 마귀 영언이다


.. 등등을 '입증'하려는 시도입니다.


만약 이들의 말이 옳다면, 이런 결론이 납니다.


  영언자들은 모두 특수은사자들이다.


초기교인들은 영언이 필요했으나, 구/신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집대성돼 첫 권이 탄생된 순간으로부터(!) 지상의 모든 교인들은 영언이 불필요했다. 

지금 역시 성경을 읽거나 갖고 있기만 해도 영언은 불필요하다. 

 

지금의 영언은 모두 외국어가 아니므로 전 세계 약 6억 명의 영언자들은 다 엉터리고 가짜다. 가짜 영언을 하니 그들은 모두 마귀에게 속해 있는 반면, 현재 영언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말로 순수한 신자들이다.

주절거리는 뜻 모를 영언보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수록 순수한 참 신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참 복잡하지요..? 그런 복잡한 생각 갖고 굴렁쇠 굴리듯 이리저리 머릿속을 굴리기보다는 차라리 믿고 영언을 시작하는 게 훨씬 더 속 편할 터입니다. 


영언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모두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명백히 전제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테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새 영언을 말하고.."


여기서 '믿는 사람들'이란 그냥 일반 교회출석자들을 가리킬까요? 아니면 주님의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일까요?


분명한 것은..영언을 안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긴 믿어도 주님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옛날엔 그 쪽에 속해 있었지요. 주님을 영접하여 거듭나서 여러 신앙적 체험을 했지만, 내가 영언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한참 후까지 믿지 않았으니까요. 그밖에 4대 표징들 즉 악령들 내쫓기, 부지 중의 잠재적인 치명적 해독(害毒)으로부터의 자유, 안수를 통한 신유 등도 행할 수 있음을 믿지 못했지요.

   

영언을 부정하는 교인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안 믿기에 결과적으로 여기 '믿는 사람들'엔 포함되지 않는 것이죠. 방.언.이란 두 글자가 막연하게 들릴 뿐.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따르는 표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도 부정하고 거부하면 결국 표징으로서 따르지 않게 되고 맙니다. 악령 쫓기, 해독 벗어나기, 안수/신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언은 그러나 신자가 단순히 달고 다니기만 하는 '표지판'은 아닙니다. 

늘 활용하고 생활화 하고 실천해야 할 삶의 평생 패턴입니다. 

'혹부리영감'의 번거롭고 귀찮고 구질구질한 '혹'이기보다는 즐겁고 편리하고 긴요한 진짜 '노래주머니'에 더 가깝습니다.


가끔 '나름' 신앙인들을 보면, 영언에 대한 태도가 애매합니다. 

영언을 반대하는 것도 찬성하는 것도 아니고, 남이 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자신이 안 하고 있음이 정말 기쁜 것도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반드시 따르는 18번 번호표나 '표징' 같은 것은..영언자들의 삶의 태도에 대한 헐뜯기, 비방입니다. 

"영언을 하면서, 왜 생활 꼬락서니가 그러냐?"는 식입니다.


역지사지로, 그런 비판적인 말투는 과연 옳은 삶의 태도일까요?

미안하지만 그런 태도는 마귀의 참소와도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참 성령의 사람이라면, 그런 말투나 태도를 취하지 않지요.

더구나 자신이 정말 '완벽윤리맨'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영언자들의 삶은 보통 신자들의 삶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영언을 갓 시작한 초기엔 아직도 보통 신자들의 삶과 거의 같습니다. 

이것은 영언자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은 베이비가 갓 태어남과도 같고..

갓 영언을 시작한 사람은 옹알이 베이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베이비들에게 완숙한 인격을 요구하고 기대하나요? 

그러면 아직 그런 옹알이 베이비조차 미처 못된 사람들은 뭡니까?


영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은 뭐라고 자임하든 간에, 

그냥 거듭난 채로 있는 갓난 베이비 상태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위대해 뵈는 인격자, 설교가도 영언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영언자 만큼의 옹알이 베이비도 아니라는 게 성경적으로 반증되는 논리입니다.


그게 무슨 돼 먹지 못한 황당 논리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초기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성령님이 오시지마자 그들은 영언을 시작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침례('성령세례'보다 더 성경적인 용어)이자 성령으로 채워짐 곧 첫 성령충만입니다. 누구나 존중하는 열 두 사도들을 포함한 회중입니다. 

성령침례는 한 마디로 머리 꼭대기까지 성령에 푹 잠김을 말하며..

그 증거로 영언을 하게 된다는 것이 초기교인들이 보여 준 패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령충만을 모종의 도덕상태 또는 성경읽기/찬양 등을 통한 흥분 상태쯤으로 여깁니다. 형용사의 명사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동사의 형용사형/명사형입니다. 흙단지, 물동이에다 물을 가득 채우듯 성령으로 가득 채워짐을 뜻합니다. 그 증거가 영언입니다. 


영언의 가장 중요한 의의의 하나는 성령님께 혀를 제어 받아 말 조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혀와 입술로써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의 치명적 해독(害毒)은 야코보서(약) 3:1-12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야코보서의 이 말씀은 영언이 왜 삶 속에 필요한지를 웅변해 줍니다.  


초기 교회 사람들은 성령침례/성령충만을 받은 뒤 영언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사마리아 교회 케이스를 보죠.


행전 8:1 이하를 보면, 초기교회가 스테판의 순교 등 큰 박해를 받아 교우들이 사방에 흩어질 때, 일부는 사마리아로 내려갔습니다. 그 중 7 집사들의 한 명인 필맆은 주님 예언 그대로(맑 16:17,18) 악령 내쫓기, 신유 등 이적을 담대히 행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큰 기쁨이 있었지요. 분명히 체험들을 했습니다. 


옛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권이었던 사마리아(히브리어 '쇼므론')는..과거 왕국시대 때 아씨리아의 침공을 받은 뒤 흩어지면서 이방인들과 뒤섞인 혼혈인들이 많아 유대인들이 평소 개처럼 여기는 대상이었지요(왕들B=열왕하 17:24, 18:10-12). 


그러나 예수님이 이곳 쉬카르(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사연 많은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쉬카르 우물가 여인에게 여기서 참 예배자들의 때가 올 테니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써 예배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지요(요한복음서 4:3-42). 그후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필맆이 복음 전할 당시 쇼므론엔 '쉬몬 마구스'라는 매우 "용한" 마술사가 있었는데, '신의 권능'으로 불릴 정도로 실력 발휘를 하던 중 필맆의 이적을 보고 복음을 믿고 따릅니다.    


예루샬렘 교회는 페트로/요한을 보내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을 받아 모시게 합니다.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님을 모시는데, 쉬몬도 보고 듣더니 마술로 번 돈을 내밀면서 자기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다고 제안했다가 페트로에게 거의 저주를 받다시피 합니다(행 8:17-24).


여기서 우리는 쉬몬이, 사람들의 성령 받는 모습을 보고 들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느낍니다. 그게 뭘까요..예, 영언이지요!

성령 받게 되면,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표징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영언이라-이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침례인 동시에 첫 성령충만입니다. 

'첫'이라는 뜻은 계속 되풀이 채우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나의 잔이 가득 찹니다!"라고 고백한 시인 다빋(다윗)처럼(시편 23:5b). 그렇게 재충만을 받던 한 사람이 스테판 집사였습니다(행전 6:5,55).


성경에 따르면, 성령충만은 오직 성령님을 받아모셔 영언을 시작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체험입니다. 도덕적 정화나 행복감/기분의 고조나 거룩해 뵈는 겉모습이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물동이가 아구까지 차듯 성령님으로 가득 채워짐이 성령충만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충만인 사람은 반드시 영언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영언을 하면 할수록 삶과 언행이 성령님께 지배/제어 받음으로써 영 속의 성령님이 더욱 더 역동적으로 일하시게 되어 더욱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영언이 성령침례 및 첫 성령충만의 표징이라는 말에 대해 의구심을 갖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다음 기록을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페트로가 이런 말들을 할 때, 성령님이 말씀을 듣던 모두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할례신자들-페트로와 함께 온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역시 성령님의 선물이 부어졌으니까요. 왜냐 하면 그들이 영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행전 10:44-46)

 

      "'내가 말을 시작할 무렵, 성령님이 그들에게 내리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말씀-요한은 물로 침례(세례)를 주었지만 그대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       라 하셨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페트로의 보고 내용에서. 행전 11:15,16)



파울은 에페소서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엪 5:18).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알지 못할 소리를 주절거리듯, 성령님으로써 가득 채우심을 받으면, 더욱 힘 있게 영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시와 찬미, 영적인(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라고 합니다(5:19). 

여기서 "영적인 노래"란, 결코 어느 작가가 쓴 지상의 복음송가나 경배찬양곡이 아니지요. 영언으로 하는 찬양노래를 가리킵니다.


영언자들은 영언노래도 할 수 있습니다. 또 영언노래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 초기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코린토A=고전 14:15, 에페소=엡 5:19, 콜로세 3:16). 

이런 것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긴가민가 의혹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을 성경대로 믿지 않기에 아직 미처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영언자들을 질시하고 비방하고 비웃을 게 아니라..본인도 영언을 하면 될 거 아닌가요? 

흔히 영언하지 않는 신자들은 "영언을 안 하면 성령 못 받은 거냐?" 라고 묻습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더 쉽습니다. 성령을 받아 모셨으면 으레 영언을 하게 돼 있는 건데, 본인이 시작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요. 


믿음의 법칙은 간단합니다. 다이버가 되려면 먼저 용기 있게 물에 풍덩 뛰어 드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얕은 물가에서 찰랑거리는 작은 파도만 보고도 맘 졸이며 못 들어갑니다. 약간의 용기만 있어도 시원하게 헤엄칠 수 있는 것을.


    영언은 다 마귀 것이란다..

    딴 종교에서도 영언을 한다더라..

    혹시 마귀 영언을 하면 어떡하나?

    영언하는 사람, 왜 저렇게 추해 뵈냐..나도 하면 추해 뵈지 않을까?


긴가민가 하며 이렇게 지레 온갖 겁을 먹기 때문에 얕은 물가에서만 헤매게 됩니다. 

과연 그런 모습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일까요..아니면 마귀가 기뻐할까요?

후자입니다.


그밖에도 영언은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성령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영의 비밀을 아뢰게 되며(로마서 8:26,27, 코A 14:2, 유다서 20끝)..

따라서 영적 싸움에 승리를 가져오며(엪 6:18).. 

남을 위한 도움기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축복과 감사를 더 잘 할 수 있게 됩니다(코A 14:16 ). 


그리고 영언에 관해 멋모르고 부정적인 글을 쓰는 분들에게 부탁인데.. 

성경대로 본인이 충분히 경험하기 전, 그런 말/글을 조심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아는 체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성령님을 훼방하기 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과 그 가족은 

영언을 시작하여..

늘 성령충만하며 

하나님과 매 순간 속삭이며

영적 기쁨을 누리며..

승리 생활을 하게 되길~!

아멘

 

  1. 한글성경의 '방언'(方言)이란 번역어는, 초기 성경번역자들이 잘못 낀 첫 단추였다. 하늘에서 성령이 내린 그 언어는 주님이 맑 16'17a에서 예언하신 전혀 새로운(!) 언어였지, 바벨탑에서 흩어진 지상의 낡은 언어 곧 '외국어'나 지방언어가 아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