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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김동호 목사의 방언무용론을 개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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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usaamen.net/bbs/zboard.php?id=usa3&no=3666


한국교계의 "잘 나가는" 명사들 중 한 분의 설교 내용입니다.
연전에 이 분의 '청부론'(깨끗한 부자론)과 (교계 관상영성가로 유명한) 김영봉 목사와의 지면 토론 비슷한 것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 목사가 김 목사에게 토론을 제의한 것을 보면, 자신의 '청부론'에 꽤 자긍심을 갖는 듯(?) 합니다.  

물론 이 분의 논리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명사의 재치있는 말 장난에 불과한 부분이 더 많습니다.
특히 제 눈에 띈 부분은 방언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분의 논리를 지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아멘넷 기자가 유연하게 정리를 잘했습니다.)  논리의 진전을 잘 보십시오. 목적 있는 논리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도 '보통사람들'인가 라는 것. 하늘나라는 모두 '보통사람'들의 집단인가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물질적 차별을 없애고 산다는 것은 아마도 행전적인 말이거나 아니면 사회주의의 일부일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참 이뤄지기 힘든 작업이지요. 권능 많으신 예수님조차도 가난한 사람은 늘 함께 있다고 하셨으니까.
사실 예수님께 세 여인들이 다른 장소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스카리옽 유다 등이 한 말은 사회주의적으로는 옳은 말이었지요.  

이 분의 논리를 계속 지켜 보십시오.

돈이 많다는 것과 잘 산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소유형과 존재형 사이에서 존재형이 되고 싶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도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역시 맞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분의 다음 말을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건강한가? 아니다. 안 믿어도 건강한 사람도 있고 믿어도 건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선이 안 그어진다. 사람 나름이다. 예수 믿는 것은 돈 벌고 건강한 것보다 훨씬 높은 가치이다."

어떤가요? 이제 이 분의 문제점이 서서히 머리를 들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분의 교회에서 새찬송가 272장(이전 330장)을 부르는지 묻고 싶습니다. 
메시아/크리스토(=기름부음 받은 분)가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은 가난을 해소하고 병을 고치기 위함은 아니었던가요? 안 그렇다면 왜 유다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나요?

이 분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소유와 능력이라고 말합니다..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능력에는 관심 있지만 사람에는 관심이 없다..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상당히 조리 있는 듯 한데, 목적 있는 논리입니다.
이어진 다음 연결을 보십시오.

    "또 은사에 관심이 많다..방언, 치유등 은사는 능력이다.
나는 방언을 못하고 앞으로도 관심이 없다. 능력에는 관심이 없다.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관심이 있다. 열매는 능력과 다르다. 집회에서 자빠지고 받아 주고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열매가 중요하다."

여기서 이 분은..자기 논리에 빠져 획일적 의식을 갖고 있음이 발견됩니다.
즉 자신이 중시하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 분은 교회가 권능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자신처럼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러지요. 그런 분은 언젠가 꼭 후회하실 때가 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저는 30대에야 비로소 방언을 시작하면서 크게 아쉬웠습니다.

자.. 그 다음을 보십시오.

    "최고로 좋은 분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를 닮아 겸손하거나 정직하거나, 온유하거나, 평안하거나 하는 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젊었을 때 부터 하면 잘 될 것이다."

일부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닮을 중요한 방법 한 가지가 바로 내 영이 하나님께 날마다 매 순간 비밀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더욱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겁니다. 성령의 아홉 은사들과 성령의 아홉 열매..나란히 함께 갑니다.  

자..다음 말은 참 안쓰러운 모순을 보입니다. 왜냐고요?

    "사람은 진흙에다 하나님의 영이 더해졌다. 그래서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진흙에 불과하다. 영이라는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관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달라진다.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을 하라."

주님과 사도의 말씀을 보시렵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배자는 영과 진리로써 예배해야 한다(요복 4:23,24).
   방언자의 최고 목적의 하나는 영이신 하나님께 영인 사람이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수많은 성구가 있음. 예: 코린토A 14:15, 엪5:19)!    
   방언의 또 다른 목적은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것입니다(코A 14:2).

그러나 이 분은 전혀 그 방면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깡그리 외면합니다.    

자..그 다음을 봅시다.

    "방언 받은 목사가 방언을 못 받은 사람을 깔본다.
방언은 하나마나이다.
은사를 못 받아도 열매가 중요하다."

보십니까? 이 분의 논리의 진전을..?
그 화려한(?) 논리전개가 기껏 방언무용론에서 그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에 방언을 왜 주셨습니까?
쓸 데 없어도 주신 겁니까? 성령님께서 "방언은 하나마나"라고 하시던가요?
그렇다면(!) 왜 사도 파울은 "나는 여러분 모두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오, 할렐루야!)"고 합니까(코A 14:18)?

결국 솔직한 평가라면..이 분은 성경에 부분적으로 능하고 부분적으로 졸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봅시다.

    "하나님을 닮는 것에 목숨을 걸면 가정/교회/세상이 좋아진다. 예수 믿는 향기가 나야 한다."

흔히들 성령의 권능과 은사를 주면 좋은 것, 안 줘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는데..성령께서는 2000년전에 교회와 그 소속 요원인 모든 신자들에게 주셨고 그냥 본인이 활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사와 권능을 주신 주 목적의 하나는 바로 복음전파이지요(맑 16:17,18, 행1:8)! 은사와 권능이 빠진 복음전파는 성령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의와 사랑에 도전하라고 한다."

도전? 그런가요..? 그럼 사도 파울이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은 권능에 대한 선의의 도전이 아니던가요? 코린토A 12:31, 14:1. 참고로..코린토A 12-13-14장의 진전은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 파울의 계시의 본 의도입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는 방법이 같아야 한다.
    예수를 믿지만 삶은 세상식으로 사는 경우가 많다.

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는 방법의 하나가..우리의 영들이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것입니다!

여러 모로 이분은 퍽 이원론적입니다.
자기방식의 "하나님과 살기" 논리입니다.  

    "복을 받는 법은 진심으로 사랑하면 된다."

물론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복 받기는 또 다른 방법론이 있지요. 그것은 예수 크리스토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저주를 깨뜨리셨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복 받기의 지름길입니다.

결론: 이분은 자신의 '청부론'으로 자신의 '방언무용론'을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매우 비성경적입니다!

이 분은 성령님께서 교회에 방언을 주신 목적을 너무나 모르고 계시며, 그것을 자신의 청부론으로 자랑스럽게(?)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분은 수많은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공통점인 방언/은사 무용론을 신학선배와 신학교수들로부터 익혔을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동정이 갑니다.
제 자신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이 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의 인기 있는(?) 청부론을 갖고 이런 식으로 성경 계시를 효과 있게 손상시켜 청중에게 그대로 여과 없이 전달된다는 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런 명사들 탓에 성령님은 맘 아파 하십니다.

방언과 은사를 내신 성령님은 "있으나마나"한 것들을 우리에게 결코 주시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하나도 불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이 명사의 의식은 수많은 보통신자들보다 못합니다.
명사라는 사실이 성경적 '영성'을 만들어 주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