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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평생의 필수도구, 방언

초기교회 근거지 (마르쿠스 요한의) 다락방으로 추정되는

"나는 여러분들 모두보다 더 방언을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코린토A서 14:18, 사역)

주변에서 방언을 중시하거나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별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학자들이 옮겨 놓은 성경 번역들을 보면 더욱 느끼는 것이지만요. 코린토알파(A)서 14장을 읽고는 파울이 방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인상을 받는 사람들은 더구나 그렇습니다. 번역자 개인의 신학사상이 배여든 잘못된 성경 역본들과 오착된 해석 등의 미디어를 통해 그런 첫 인상 내지 뉘앙스를 받은 사람들은 "사랑만이면 된다, 까짓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는 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방언을 기껏 오순절교 신앙의 키워드 정도로 생각하거나 코린토A 13:8을 잘못 해석해 "방언은 사라졌다", "사랑만 있으면 끝이다" 또는 현재의 방언은 모두 가짜이고 무가치하다고 보는 무용론자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모든 방언을 싸잡아 죄다 이교에서 왔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방언하는 사람들을 마치 추잡한 물건 또는 외계인이나 다루듯 멸시 천대 하다 못해 박해를 합니다. 대 사도 파울은 분명히 교회에서 질서있게만 하면 된다고 "방언을 금지하지 마라"(코린토A 14:39b)고 했거늘 방언자들을 향해 "Oh, shut up!"이라고 외치는 게 대다수 교회에서 발견되는 경향이죠. 
그런가 하면 방언을 사모하여 시작해 놓고도 별 가치를 못 느껴 그냥 '일회용 체험'으로 치부하고 방치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서들이 과연 바람직하고 옳은 것이라면, after all, 하나님은 왜, 무엇 때문에, 별 쓸모 없어 보이는 방언을 주셨는지 의아스러워집니다. 아니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사랑만 주시고 말지, 뭣 때문에 '판도라 상자'(?)만큼이나 골치 아픈 선물을 주셨겠습니까?

도대체 교회 안에 방언이란 게 왜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방언을 전적으로 오해한 많은 사람들이 행전의 방언은 버젓한 외국어였고 코린토 교회의 방언은 일시적 현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한 분이신 성령님도 헷갈리실(?) 만한 이원론적 발언이 아닐 수 없지요.  
안식교에서 갈라져 나온 일파인, (조지아 주의) K 목사가 보유하는 '생애의 빛'의 이른 바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잡이' 시리즈엔 '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제18호)라는 게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는 달리 이 시리즈는 성경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길라잡이이기 보다 성경진리와 기존 교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항로이탈 신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월간지 '살아남는 이들'과, 텔레비전 화면을 그럴 듯한 달변과 자신만만한 미소로 주름잡곤(?) 하는 K 목사의 많은 사상들은 자신의 주장과는 달리 비성경적, 반기독교적입니다. 그의 교설들을 읽어 보면, 결국 자기네 밖에는 참 교회가 없고 자기네만 살아남는다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즉 광신적인 시한부종말론자 해럴드 캠핑처럼 기존 교회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어젠다를 갖고 있습니다.
 
눈에 띄기 위함인지 미인의 얼굴과 입술을 표지에 담은 '방언에 대한 진실과 오해'란 책자는 제목과는 달리 방언에 대한 오해와 왜곡으로 일관됩니다. 이 책은 방언의 개념부터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방언은 그냥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어 놓고 있습니다.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적인 은사와 세속적인 지상언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우둔함을 범하고 있지요.

아울러 '기독교회가 말하는 방언과 성경이 말하는 방언의 차이'라는 부제부터가 마치 교회가 처음부터 성경과는 전혀 무관한 양 냄새를 풍기지요. 그는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왜 주셨겠냐는 식으로 현대 방언을 백안시하는데..아니 방언이 모두 알아 들어야 할 언어라면, 성령께서 왜 방언통역의 은사도 동시에 주셨겠습니까..그렇지 않나요!?

이 사람은 성경이 명백히 밝혀 주는 방언의 깊은 의미를 영적 감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몸 감각과 정신 감각으로만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위 기도언어"라고 말함으로써 방언이 기도언어가 아닌 양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 교회의 방언을 모두 감정에 치우쳐 나타나는 현상으로 치부하면서 "사단(사탄)의 공격 목표는 감정"이라고 함으로써 은근히 교계의 모든 현대 방언을 '싸탄의 것'으로 몰아가지요.

방언의 개념과 본질에 관해서는 이미 (본 필자의) 티엘티와 아멘넷의 칼럼과 댓글에서 무수히 논해 왔고 이 글 아래에도 참조 링크를 걸어 두었기에 긴 말을 않겠습니다만, 여기선 방언의 용도에 관해 집중적으로 언급하렵니다.
다만 이 섹션에다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성경에서 방언이 있다고 하면, 정말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 회의론자들은 이 점을 명심하시길.


방언은 일회용 체험이 아닌, 요즘의 필수품인 휴대폰처럼 평생동반적 체험이어야 합니다. 
까닭이 뭐냐고요? 방언은 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아뢰는 유일한 도구로 성령께서 지정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몇몇 분들은, 구약인들은 그럼 어떻게 영적 비밀을 아뢨고 방언을 전혀 하시지 않은 예수님은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께 비밀을 고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인들과 달리 신약인들 즉 우리들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고하시고 보혜사님을 보내 주신 대로 신약시대/교회시대/성령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를 살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페트로가 오순절날 요엘의 예언을 인용한 대로, 요엘 자신은 구약인이었기에 방언을 하려야 할 수도 없어 오는 시대를 예언하는 데 그쳤습니다. 방언을 비롯한 모든 초자연현상이 "그쳤다"는 잔 매카터(한국식 발음: 존 맥아더) 등 '중단론자'들(cessationists)의 학설과는 달리, 요엘이 예언한 '말세 현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 한국교계 일각에서도 열렬히 존중받는 매카터를 비롯한 중단론자들은 알고 보면, 요엘이 말한 '말세'의 개념조차 파악이 안돼 있습니다.

통탄스럽게도 이것은 칼뱅을 비롯한 중단론적 입장의 대 학자들이 요엘 예언의 문맥을 제대로 알아 잡지 못한 탓입니다. 요엘 예언은 분명히 "주님의 크고 영광스런 날"이 이르기 전, 지구 종말현상을 곁들임으로써 방언을 비롯한 말세현상은 최소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행 2:16-21). 
이것은 중단론자들이 최대 근거의 하나로 삼는 코린토A 13:8-12과 '모순'된 게 아니라 오히려 일치하지요! 파울이 이 '사랑의 시'에서 암유적으로 말한 '온전한 것'이란 곧 주님의 재림이니까. 적어도 재림 때까지, 휴거 때까지는 방언을 비롯한 모든 초자연적 선물과 은사들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요엘 예언의 기초한 페트로의 해석에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방언은 꿈과 환상, 예언과 병행되는 교회 계시의 일부라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현대교회의 방언과 방언자들을 천시하고 설교나 사랑을 "최고의 은사"라고 믿는 지도자나 신자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과연 요엘의 예언과 페트로의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입니다.

개혁가를 비롯한 대 학자들..그리고 현대의 중/소 학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방언은 중단된 것이 아니지요.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맨날 열심히 써 먹어야 할, 최대의 무기요 영적인 도구요 그 무엇보다 아버지 하나님과 영적으로 친교할 '무선통신', '모르스 부호' 격인 방편입니다. 그러기에 파울은 "난, 여러분 모두들보다 방언을 더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자랑이 아닌 고백을 합니다.

많은 성도들처럼, 그토록 열렬히 간구하고 매달려 시작하게 된 방언이 생각 밖에 시시하게 여겨져 금방 중단하거나, 장롱 속에 깊숙이 숨겨둔 곶감처럼 이따금 생각날 때나 중얼거려 보는 그런 방치 상태에 있다면, 지금 당장 (꺼내어) 재개하시고 활용하십시오!

오늘날 불행히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구구한 신학 제설을 읽고 듣다 보니 선입견과 편견, 자기 나름의 '일가견'이라는 것을 가진 탓에 성경이 말하는 방언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도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하시는 것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곤 합니다.

고대의 베레아 교우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런가?"하고 신사적으로 코린토 12-14장 문맥을 깊이 상고해 보면, 파울은 결코 방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파울이 코린토 교우들을 사랑으로 타이른 내용은, 그들이 교회에 모여서 저마다 방언으로 떠들면서 서로 가르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현대 주석가들과 설교가들은 코린토 교우들을 아무 것도 모르고 까불던, 영적으로 어리기 짝이 없고 철딱서니 없는 교인들쯤으로 여깁니다만, 이 역시 파울의 속 마음을 전혀 갈파하고 있지 못한 탓입니다.

솔직히 제가 묻겠습니다만..코린토 교우들은 그래도 이교적 배경에서 처음 갓 개종한 뒤라 잘 몰라서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방언의 존재와 유용성을 믿고 활용하긴 커녕 배격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수준이 높습니까, 아니면 코린토 교우들처럼 방언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수준이 높습니까?
대답 좀 해 보시렵니까................................................................?
무엇이 '영적'인 것입니까? 신학적/이성적인 풀이? 아니면 성령님께의 순종?

방언그룹과 비방언그룹 - 양쪽의 수준 비교를 해 보겠다는 게 아니라..하도 "꼴찌은사", "치기 어린 교인들", "중단됐다"고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방언과 방언자들을 백안시하고, 도외시하고, 좌시하고, 외면하고, 조소하고, 비소하고, 손가락질 하고 심지어 박해하기에 묻는 것입니다. 

필자가 맹세는 할 수 없지만, 장담은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결코 하늘나라에서 절절이 후회하게 됩니다.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으면 되지만, '중단론' 어쩌고 아는 체 하고 떠들면서 방언과 방언자들을 반대한 사람들은 스스로 후회거리를 사서 후회하게 된다는, 그 말입니다.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을 걸" 하는 '껄' 타령을 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필자 자신도 30대 이후 많은 후회를 했습니다만.)

아울러 애써 방언을 시작해 놓고도 의심과 회의와 천시의 그늘 아래 묵혀 놓고 영 써 먹지를 않던 성도들도 주님 앞에서 비로소 "아고~!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좀 많이 해 둘 걸"이라고 후회할 것 역시 (시쳇말로) '당근'입니다. 이 역시 필자의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왜, 그럴까요...........................................................................................?

주님은 사마리아 쉬카르에 있는 야콥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 앞에서 (예루샬렘은 물론 사마리아에도 반드시) 장차 다가 올 신약시대의 중요한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곧, 예배자들이 직접(!) 하나님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곧 신약시대/교회시대/성령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이지요. 신령과 진리를 바꿔 말하면, 성령과 말씀, 또는 영과 참으로 라는 뜻입니다 .

주님이 예언하신 대로 성령님은 지상에 강림하셨고, 특히 마르쿠스복음 16:17,18에 예언하신 대로 그 첫날부터 방언은 새 언약의 사람들 곧 신약인들의 중요한 예배도구로 활용돼 왔습니다. 더구나 쉬카르 여인에게 하신 주님의 예언 그대로 사마리아 사람들도 참 예배자의 행렬에 참여하게 됩니다(행 8:4-25). 이 기막힌 성취를 눈여겨 보지 못한다면 실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즉..기도언어로서 하나님과 비밀리에 친교하게 됐고(코A 14:2,14, 에페소서 6:18b, 유다서  20절 끝),
방언노래의 형태로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게 됐고(코A 14:15b, 엪 5:19, 콜로새서 3:16 중간), 
(첫날처럼 성령께서 상대방이 알아 듣게 하실 때는) 가끔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그런 간증이 매우 많음).

그밖에도 방언은 (특히 통역이 곁들여질 때) 완벽한 축복/감사의 도구이며(코린토A 14:16), 마귀 군대와의 싸움에서 극히 요긴한 영적인 전략무기이기도 합니다(엪 6:18b).
뿐만 아니라 방언은, 각양 은사를 끌어 당기는 자석 또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행전을 읽어 보시고 오순절 이후 그렇게 돼 왔음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방언을 우습게, 하찮게 여기거나, 있으나 마나 한 불요선(不要善) 또는 필요악 정도로 보는 분들은 과연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과 은총, 선물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들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에서-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야코보 1:17)란 말씀을 새겨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여기서 방언은 제외된다"는 말씀이 없지 않나요?)
아마도 우리 모두는 주님이 오신 그날,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방언의 중요성과 가치를 비로소 인식하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기도언어는 심리적/카톨맄적/이교적인 관상기도가 아니라 바로 영적인 방언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비밀을 아뢰는 방언기도에 비하면 관상기도는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 자아신을 추구하는 형편 없는 자기만족/심리학적 수준의 기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찬양 방편은 방언노래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영적인 체험자들은 다들 시인하는 사실입니다. 
 
방언은 주님 오실 때까지 열심히, 즐겁게 활용해야 할 삶의 반려/동반 도구요, 영적인 무기입니다. 아울러 깊은 차원의 방언기도를 통해 내 몫의 다른 은사들도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신약인들에게 방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