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녀.가정.결혼

결혼은 환상이 아니다(뉴하우스)



핑크와 빨간색 하트가 여기저기 넘실거리는 상점의 화사한 분위기를 보고 그제야 밸런타인스  데이가 오고 있음을 나는 알아차린다. 

나의 이런 무심함과는 아랑곳없이, 이 무렵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을 고백하는 이벤트와 선물, 그리고 로맨틱한 저녁을 위한 온갖 상품과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물론 당일 저녁에는 막판에 부리나케 꽃다발과 캔디를 사는 남자들의 긴 행렬을 보는 것은 예사다.

자잘한 것을 챙기는 것을 잘 하는 여자와는 달리, 이 날을 무심하게 그냥 지나치는 것을 못 견디는 아내와 애인을 둔 남자들은 모종의 압박감에 시달리는 피곤한 날이기도 하며, 간혹 연인이나 부부가 다투는 빌미를 제공하는 날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를 불문하여, 남녀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이 사랑의 마력에 영향을 안 받는 남녀는 없어 보인다. 설사 사랑의 정체가 결국엔 꺼지고 마는 거품에 불과하더라도, 사랑에 속고 또 속을지라도, 그리고 사랑에 매번 실망하면서도, 남녀는 계속 사랑하기를 원하고 수시로 사랑에 빠진다. 

인간의 모든 예술 분야와 창작물의 가장 인기있고 흔한 주제도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던가. 불 같은 사랑, 위험한 사랑, 금지된 사랑, 가슴 아픈 사랑,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로맨스 소설은 불티나게 팔린다. 이런 로맨스 소설은 많은 여성들이 유일하게 읽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구에 불과한 이 허다한 사랑 이야기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할지언정 행복한 결혼 생활과는 같이 가지도 않으며, 비교할 성질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남녀는 이런 사랑 이야기의 허구성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현대인의 결혼은 반 이상이 이혼으로 치닫는다.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도 결혼에 실망한 아내와 화내고 노여워하는 남편으로 가득하다. 소위 남녀 간의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이 놀라운 사랑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영적 삶에는 의욕과 열정이 대단해도, 이들마저도 남녀 간의 사랑에는 한없이 미숙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도 아니요,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는 의무를 몰라서도 아닐 것이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거듭난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모르는 바는 더욱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씀에 대한 무지로 이들의 깨어지는 가정의 원인과 남녀가 사랑과 관계에 미숙함을 추정함은 빗나간 추측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남녀가 관계와 결혼 생활에서 갈팡질팡하며 속수무책인 이유를 이번에는 실질적인 자가대처(self-help)적 측면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어느 정신과 의사는 결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녀의 관계는 때때로 죽습니다. 왜냐면 갑자기 생명이 끊어지기 때문이지요. 이 관계가 얼마큼 정성과 시간, 노력 그리고 돌봄이 필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방관하기 때문에 관계가 서서히 말라가는 겁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게을러서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이렇게 되지요.”

사도 바울마저도 성경에서 남녀가 결혼을 하는 것을 육신의 고난으로 말하고 있다. 

어느 주례자가 결혼식날 바울의 이런 말씀을 인용하겠나 만은, 갓 결혼하는 남녀 앞에 놓인 험하고 어려운 삶이 기다리고 있음을 예시함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래 전, 어느 결혼식에서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보며, “앞으로 고생문이 훤하네.”라며 측은하게 바라보던 지금의 내 나이 또래의 여 집사님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 귓전을 사정 없이 내리치던 이 말을 나 역시 가슴에까지 들여 놓지 못했다. 그러나 대신 가슴 속에 남은 이 말의 진가에 대한 의혹은 많은 세월과 인생의 경험이 저절로 해결해 주었다. 마냥 기뻐만 하고 축하만 하기에는 결혼의 현실을 아주 잘 아는 이 분들의 서슴없이 내치던 그 멘트는, 분위기는 깰지언정, 뼈대 있는 멘트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들 모두의 말처럼 결혼 생활은 문제와 고난이 있게 마련이고, 고생이 따르게 마련인 것은 누구의 삶이든 간에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 결혼을 하기를 원한다. 간혹 독신을 주장하는 이도 없진 않지만, 결혼이 주는 많은 기쁨과 행복이 있고, 그리고 많은 혜택이 서로에게 있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고 보면, 결혼은 나름의 고난이 따른다고 하지만 할 만한 것이며, 또 좋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결혼이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인간이 수고하지 않고 얻으며 누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듯이, 결혼 생활도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결혼 생활은 우리의 많은 노력의 결정체이기에 다른 비결이 있을 수 없다.

말 할 것도 없이 남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관계의 기술도 배워야 한다.

열심히 노력하여 건강하고 만족한 결혼 생활을 이루어 가려는 의지가 있다고 하여 우리 모두에게 이런 결혼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기술과 요령, 그리고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기술은 시간과 지식을 요구하듯, 결혼 생활에 필요한 기술도 시간과 지식이 필요하다.

남녀가 결혼의 다이내믹스와 남녀가 서로 알고 이해하려고 배우는 노력과 배운 기술의 지혜로운 사용은 모든 결혼 생활의 기본이자 혼수보다도 더 중요하게 지참해야 할 요소라고 하면 과언일까.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어떤 관계의 기술을 배우고 적용하는 노력을 의미하냐고 물을 수 있다. 아니면 다 해 봤지만 별 효능이 없다고 말하는 남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잘못된 근거나 추정부터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을 버리자! 

결혼 생활도 ‘일’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갖고 나의 삶의 현장인 나의 결혼과 나의 사랑을 직시하려면, 이미 가진 모든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임무 수행적인 사고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사랑은 본능적이고 사랑은 저절로 피어나고 빠지는 것이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맞는 말이다. 사랑은 누구나 쉽게 시작하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은 시간, 노력, 정성으로 돌봄이 필요하다는 차이가 분명히 있다. 

많은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하면, 주로 로멘스, 운명적인 만남, 아니면 영혼의 반려자를 떠올린다. 

남녀는 초컬릿과 같은 그 달콤한 맛으로, 핑크빛 무드와 진한 빨간색과 같은 정열을, 아름다운 장미 몇 송이의 향기 같은 로맨스를 추구한다. 소금을 치면 맛이 한결 나은 것처럼, 그저 양념에 불과한 로맨스는 로맨스에 불과하지,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로맨스에 목을 매도 행복한 결혼은 가능하지 않다.

황홀한 꿈만 꾸던 ‘프린세스’는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다 지친 후질구레한 아내임을, 그리고 ‘프린스 차밍’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내의 손이 필요하고 돌봐주어야 하는 남편이고,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닌 ‘왕자’는 커녕 ‘거지’가 차라리 그에게 걸맞은 신분임을 못 견뎌 하며, 완벽한 로맨스를 꿈꾸는 사람의 비현실적인 이상은 결혼 생활을 스스로 망치고 파괴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나.

그런가 하면, 운명론적인 이상의 내면에서는 '공꺼'를 바라는 심리를 본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노력할 이유조차 없고, 그저 쉽고 편한 사랑, 곁에 있는 것만으로 기쁨이 되는 사람과의 사랑이 참 사랑인 양 착각하는 운명론적인 생각 역시 불행한 결혼을 자초하는 환상에 불과하다.

결혼은 당연히 고난을 가져온다. 갈등도 어려운 문제도 생기고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짊어지고 사는 것이 남녀의 결혼 생활이다. 그러나 무조건 순조롭고 쉬우며 편하고, 돌짝밭에도 피어나는 들풀과 같이 저절로 생기는 사랑을 꿈꾸는 운명론자는 언제고 쉬운 사랑을 찾아서 떠나게 마련이다.

가끔 이혼경력이 화려한 사람을 본다. 결혼에 실패한 이전 배우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연거푸 선택하는 실수도 이유가 되겠지만, 잘못 선택한 배우자를 불행한 결혼의 원인으로 보고, 소위 '소울 메이트'를 찾을 때까지 파트너를 바꾸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 역시 이런 경우도 행복한 결혼은 상대에게 전적으로 달렸다고 믿는 경우다. 그러나 “과연, 이 사람일까?”하는 기대로 배우자를 수도 없이 바꿔도 이들의 결혼 생활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어느 결혼이든지 있게 마련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척 중요하다. 남편과 아내의 다툼과 실랑이는 서로 윈-윈하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결과를 위해선 애정이 어린 양보도 융통성과 유연성도 필요하거늘, 무조건 싸우기도 양보하기도 싫어 하는 남녀가 있다.

자신의 기대가 어긋나면 가슴은 멍이 들고 이런 결혼에서 무조건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런 남녀는 건강한 결혼에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갈등을 배우자를 잘못 선택한 증거로만 보고, 이 갈등이 오히려 친밀감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는 가능성은 상상을 못한다.

이런 환상에 집착하는 동안은 남녀가 만족해 하는 결혼 생활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빨리 환상에서 벗어나 남녀가 같이 결혼을 귀하게 여기는 결혼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필요하다. 같은 목표가 있어야 이에 따른 전략도 생기는 법이 아닌가.

남녀의 다른 속성과 역할을 알고 수용하며 남녀의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수고와 노력 그리고 지혜는 반드시 결혼 생활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은 꿈과 환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남녀 역시 피상적인 믿음의 관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배우자를 위해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미혼 남녀가 기도한다는 이유만으로,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그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이 보장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다못해 장래 배우자를 위한 기도마저 소위 ‘올바른 기도’가 따로 있다고 믿거나 가르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키는 얼마나 되며, 성격은 어떠하며 등등 제대로 구체적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모르시기 때문에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는 논리다.

나도 이런 황당한 이론에 속아 한때 흉내를 낸 적은 있지만, 다행히도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으로 온전히 신뢰할 것을 내게 요구하셨지, 이런 황당한 리스트에 관심이 없으셨음을 깨닫게 해주셨다. 하마터면 이 인위적인 리스트에 집착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사람을 못 알아 보고 밀어내는 과오를 저지를 뻔 했다.

그렇다고 아무 만남이나 무모한 선택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성경은 믿는 남녀가 믿음 안에 있는 자와 결혼할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이런 결혼도 여지없이 파탄이 나고 그리스도 안에서도 불행한 남녀로 살아가는 것은 어제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하게 주신다고 하신 말씀이 무색할 정도로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는커녕, 삭막한 불모지와 같은 고통의 삶을 사는 것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과연 우리의 믿음도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상이 아닌 환상에 믿음을 갖는 것은 아닌지. 아직 미혼인 남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의 믿음과 진정한 ‘신자’의 의미에 대해 신중한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이 은혜에 감격하여 믿음을 행하는 삶을 사는 자가 은혜를 아는 자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사랑, 용납, 인내, 용서의 원리를 행하는 믿음이 있는 남녀가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수고하고 노력하며 일구어 나가는 결혼 생활은 현실에 기반을 둔다. 아무리 서로 선택하고 선택된 두 사람이지만, 아직도 흠 많고 불완전하며 부족한 남녀 두 사람이 이 결혼 현장의 유일한 주인공들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하는 도전과 행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긴 여정 속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루어 가는 수고는 우리의 몫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 당연할지라도, 이 사실 자체가 무사 무탈한 우리의 결혼 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기에 그렇다.

믿음의 사람이자, 영적인 사람일지라도, 또 경건의 모양이 있을지라도, 무례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상대에게 요구만 하는 이기적인 남편이나 아내라면, 그 결혼은 고통의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 남녀 관계와 결혼의 법칙이자 삶의 일반적인 이치다. 

세상이 돌아가는 물리 법칙이 있듯이 결혼의 법칙도 있지 않겠나. 그리스도인도 이 법칙을 거스르면서는 원만한 결혼 생활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의 남녀는 행복한 결혼을 위해 사랑, 용납, 인내, 배려, 그리고 희생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수고와 노력을 매일 한다.

이런 수고의 대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우리가 받을 만한 것 이상으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으로 돌아온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은혜로 사는 삶은 환상이 아니듯, 우리의 결혼 생활도 환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