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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패망의 앞잡이



얼마 전, 교회의 한 공식 모임에서 좀 특이해 뵈는 사람을 만났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주위 사람들과는 뚜렷이 구분됐다. 혹 그것을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모 교단 '지도자'라는데, 누가 봐도 목이 빳빳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접근하여 말을 건네 봤지만, 사람의 눈을 정답게 바로 바라보거나 머리를 굽히는 법이 없고, 곁에서 묻는 물음엔 건성으로 답하거나 절반도 답하지 않았다. 묻고 나서 답변을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무안할 정도였다. 
실로 초가집들 위의 전봇대 같고, 레바논 산의 백향목 같은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절대 표준일 성 싶다. 대화가 영 되지 않는 사람이라, 그에게 접근했던 누구나 금방 곁을 떠나곤 했다.
그렇다고 평소 말이 적은 사람은 아닌 거 같았다. 말을 들어 보면, 윗 사람에게 아부도 곧 잘 하는 듯 했다. [아부는 겸손이 아니다.] 그리고 그 날, 그는 교단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 하는 듯 했다.

그 모임이 끝나 만나게 된 일부 교계 인사들은 비교적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평가는 한결 같고 다들 나의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뻣뻣"하고 "거만"하다는 촌평들이다.


이 글은 웹과 블로그를 이용해서 그를 은근히 욕하고 비난하려는 뜻에서 쓰는 게 아니다. 나는 그를 잘 모르며, 현재로서는 거의 전혀 무관하고, 앞으로도 전혀 한데 "엮이고" 싶지 않는 대상이다! 다만 성경이 가리키는 교만/오만/거만의 표본인 거 같아서 거드는 것이다.

솔직히, 그 날 나는 퍽 놀랍고 당황스러웠고, 황당했다. 
요즘처럼 다원화 돼 가고 sophisticated 된 교계 사회에서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고 속으로만 오만한 게 아니라, 겉 보기조차 정말 거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을 모처럼 발견했기에 그렇다. 겉이 그렇다면 속도 뻔할 것이다. 비유컨대, 안팎이 다 누런 '황금색'인 거 같았다. 겉은 오만한데 속은 겸손한 사람은 없을 터이다.

이런 사람이 교단 지도자라니, 교단은 정말 거룩하기보다 세속적이기가 더 쉬운 인스티튜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가장 기초적인 성도의 품성도 안 갖춘 사람이 무슨 "말라 죽고" "얼어 죽은"(?) 교단 지도자란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소문 좋고 인기 좋은 교단이라도 그런 지도자가 교단을 쥐락펴락하기라도 한달시면, 정말 하나님의 저주 대상으로 걸맞으리라.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반(反)덕목의 하나이기에.


그건 그렇고..남 얘기만 할 게 아니라, 나 자신도 교만하기 쉬움을 시인한다. 
나는 겉 보기로는 남 앞에서 오만/거만/교만을 적극 피하려 하지만, 하나님만이 주로 아시는 속의 자만/교만/오만/거만은 피하고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의식적으로는 물론, 무의식적/잠재적으로도 그렇다.

설교 부탁을 받아 놓고 바탕본문으로 골라 놓은 성구가 이미 잘 아는 구절이어서 "대강" 준비하려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다. "이 정도야 뭐, 식은 죽 먹기지..대강 해서 한 수 보여 줘야지~" 따위의 생각은 일차적으로 자만이요,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도도함이다. 그런 맘엔, 그 날 꼭 필요한 성령님의 신선한 영감이 올 자리가 없어진다.
그런 태도는 함선 접근 불가의 도크(dock)와도 같다.


교만은 흔히 남에게 상처를 준다. 곧, 자타에 마이너스다.
어느 특정 분야에 전문가인 사람이 상대방에게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요~" 하면 설령 아무리 웃음 섞인 농담이라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성경의 어느 부분 또는 어떤 해석 방식, 연구방법 등에 관하여 오래고 전문적인 탐구로써 깊은 지식을 갖춘 사람도 그러기 쉽다.

또, 그런 교만의 거대 바퀴에 자주 치여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자칫 상대방의 모든 게 교만으로 보이기도 하여, 모조리 판단하려 들기 쉽다. 그것도 일종의 역설적 교만이다. "저 교만 좀 보게나~", "내가 네 교만을 잘 알지. 벌써 감이 잡혔어." 등의 생각이 굳어지고 확대된 탓이다. 이래서 상처가 상처를 낳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남들의 모든 것을 교만으로 보면 그건 희대의 교만이다. 자신도 교만할 수 있음을, 바로 지금 그것이 교만일 수 있음을 먼저 시인해야 안전하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것이 교만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사람에겐 스승도, 배울 것도 없다.  


교만은 흔히 자기 속의 착각과 과대망상 비슷한 과장에서 오기 쉽다. 얕고 작은 착각도 금새 교만을 부른다. 자만은 자기확신을 부르고, 자기확신은 자기확대해석을 낳고, 이윽고는 자기극대화를 몰고 온다.
나중엔 급기야 "너나 잘 하세여~", "니 꼬라지를 알아라"는 기초적이고 풍자적인 경구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적당히 교만해도 된다는 생각이 자기를 두껍게 포장하게 만들고, 안하무인 격으로 자신을 다듬어 가게 된다. 스스로 다잡기, 남들이 다잡아 주기가 쉽지 않은 단계다. 그러다 보면 교만의 수위와 한계를 모르게 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된다.

하물며 자만과 도도함도 일종의 '미'로 여기는 현대사회랴.


내 아이라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주님이 주신 두드러진 품성 하나가 겸허다. 늘 자신은 뒷전이고, 남을 먼저 배려하곤 한다. 누군가가 더 정당한 친구를 탓하려고 하면, 반드시 나서서 감싸 주곤 한다. 좋은 일이 있으면, 일단은 친구를 앞세운다.

언젠가의 교사-학부모 인터뷰에서, 한 미국인 교사가 인상 깊은 얘기를 들려줬다. 아이가 뛰어난 만큼 자신을 낮추고 감추려고 해서 맘에 든다는 것이었다.

좀 의외였다.
미국은 개인의 자부심과 자긍, 대담성과 특유의 개성 따위를 최대한 권장하고 찬하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I am so proud of you", "I feel so great about .." 같은 말이 대수롭지 않게 상용되다 보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다.
 
어느 아이의 거만도 남이 받아 주고 수긍해 주고 관용해 줘야 하는 일종의 '개성'이다. 부모가 그런 '개성'을 대물림해 주고 증진시켜 주기도 한다.
그래서 동양적인 양보나 겸양의 미덕은 미국 교실에서 좀체 통하지 않는다. 처음엔 그럴수록 손해 보는 거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특히 그들보다 뛰어난 점이 발견될 때 언젠가 그들도 알아 주고 인정해 주는 게 겸손이라는 미덕이다. 그 교사를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주님은 온유와 겸손을 강조하셨지만,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기쁨/평화/인내/온정/양선/충성/온유/절제)에 '겸손'이 빠진 것에 가끔 고개가 가우뚱해진다. 그러나 먼저 겸손하지 않고는 이 9 열매가 모두 나타나지도 않을 뿐더러 나타나도 아무 소용 없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온유에 이미 겸손이 포함된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누구나 그 분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신다. 그러면 참 샬롬을 누리게 된다고 하신다. 샬롬이 뭐든가? 평화와 모든 좋은 것들을 가리킨다.

실로, 모든 좋은 것들이 온유와 겸손을 통해 온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다. 망하고 싶으면, 마냥 교만하면 된다.
세상이 통째로 망해 가는 이유도 그것이다. 하나님 앞에 도무지 겸허하지 않기에.


나여, 자아여, 교만하지 말자.
쉽게 자만하지 말자.
스스로 멸망의 선봉장이 되지 말자.
 
낮추련다, 나 자신을.
주님 앞에 굽히련다.
남 앞에도 숙이련다.
남의 치솟는 교만 앞에서도 참을 만큼은 참으련다.

그러나..의를 위해선 담대하련다.
진리만큼은 교만 앞에 꺾이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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