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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됨의 복음

구약의 샬롬, 곧 평화라는 히브리어 낱말은 평화 뿐 아니라 평안/평온/평탄 그리고 "잘 됨"과 복의 개념을 아우릅니다. 웰빙과 풍요, 형통과 번영이 내포된다는 말이죠.

이스라엘의 선조인 고대 히브리 족장 아브람(후의 아브라함)이 조카 롵과 그 가솔, 재산을 앗아간 5개 동맹국 군대를 전력을 다해 물리쳐 친척과 재산을 되찾고 전리품까지 챙겨 돌아올 때, 멜키제뎈(한글 역 표기: 멜기세덱) 왕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아브람을 다음과 같이 축복합니다.

    "복을 받아요, 아브람! 하늘 땅의 창조주이신 엘리온님(가장 높은 하나님)께.
    송축(頌祝)을, 그대 손에 그대의 원수들을 넘기신 엘리온님께!" (창세기 14'19)

이 축복에 감격한 아브람은 모든 전리품의 10분의1을 멜키제뎈 왕에게 바쳤습니다. 멜키제뎈은 하늘땅의 창조주, 엘리온님의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예표(預表)적 사건이었습니다.  
 
멜키제뎈은 예루샬렘(예루샬라임)의 전신으로 추정되는 도시국가 '샬렘'의 왕이었던 전무후무한 불가사이의 인물로, 훗날 신약 성경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에 관한 상세한 해설을 하면서 바로 하늘 대사제 예수 크리스토님이 그를 승계한 분이시라고 말합니다(히브리서 5-7장 참조).

멜키제뎈이란 이름 자체가 '의(義)의 왕'이며, 샬렘은 샬롬과 어원이 같아 평화/잘됨을 가리킵니다.

평화/잘됨/복의 도시 샬렘의 왕이 아브람을 축복했다는 데서 우리는 큰 의미를 찾게 됩니다. 창조주, 엘리온님이신 예호바(여호와/야웨) 하나님이 아브람에 대한 복의 선언을 하늘 땅에 공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대대로 평화와 복, 잘됨을 누립니다. 큰 죄를 짓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평화와 복, 잘됨을 누린 극치의 본보기가 슐로모(솔로몬) 왕이죠.  슐로모라는 이름 자체가 샬롬이 어원이며 따라서 평화/잘됨을 뜻합니다. 슐로모 왕이 다스린 반 백 년 동안 이스라엘은 사상 최고의 평화와 번영의 태평성대를 누립니다. 바로 창조주 엘리온님이 베푸신 은덕이었죠!
그러나 최고의 슬기를 지녔던 슐로모는 훗날 사치와 탐색(耽色), 우상숭배 등 가장 미련한 짓들을 하여, 그 아들 대에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불행을 겪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와 번영을 선용하지 못하고 과용/남용/오용/악용했기 때문이지요.

평화가 선하고 좋은 것이라면, 잘됨과 번영, 복과 풍요도 좋은 것입니다. 샬롬은 자체 모순일 수가 없지요! 평화는 좋은데, 풍요와 잘됨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모든 나라나 가정, 개인은 잘됨과 웰빙을 누려야 평화롭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것들을 잘못 사용할 때 타락과 함께 불행이 찾아들 수 있습니다. 탐심과 탐욕에 빠져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려 들거나 바벨탑처럼 쌓아 두고 혼자 배불리려는 것, 남에게 올바른 웰빙을 전해 주지 않고 자신만 챙기는 것-이 모두가 '어리석은 거부'의 소치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예외 없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려운 좁디좁은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와 개인의 타락이 그래서 오는 겁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평화와 웰빙, 번영, 형통과 복 자체가 잘못이고 악이라곤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신 그것은 분명히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돈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죠! 창조주님은 태초에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물들이 잘 되라고 복 주셨고, 사람들에겐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습니다.

멜키제뎈의 후임 사제와 슐로모의 후손으로 오신 참 메시아-예수님은 '싸르 샬롬' 곧 평화의 군주이시니, 그 분 역시 엘리온님의 평화와 웰빙, 번영, 잘됨과 형통과 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더욱이 그 분의 모든 것은 완전합니다! 완전한 평화, 완전한 웰빙, 완전한 잘됨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빌어 주시는 창조주 엘리온님의 모든 좋은 것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예가 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아브라함의 영/혼/육/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바로 그 분의 이름-예수 이름-으로 우리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갈라티아 3'6-14 참조).
 
관건은, 이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믿음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길이 도무지 없는 탓이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엘리온님이 살아계심과 그 분을 찾고 갈망하는 사람들의 '미스타포도테스'(Misthapodotes/보상자) 곧 믿음의 대가를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만 하거든요(히브리서 11'6).  
독자는 그렇게 믿습니까? 그렇다면 복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좋은 것들을 받을 채비가 된 사람입니다!

바로 그래서, 사도/장로 요한은 가이우스에게 이런 축복을 건넵니다.

    "사랑하는 님. 그대의 영이 잘 되듯, 그대의 모든 것이 잘 되고 강건하기를!" (요한C서=요삼 4절)

크리스천으로서 바람직한 축복이지요. 이것을 믿음으로 받을 줄 알아야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성경적인 이런 말씀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유야 어떻든 좀 불행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잔 파이퍼라는 교계 명사의 동영상 메시지를 봤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av9B54F74tI

소위 '복음주의자'요 '개혁주의' 신학자의 한 명인 그는 형통과 풍요, 잘됨의 복음을 목청 높여 혐오하고 단죄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보다 우선, 관상영성/떠오름영성 등 온갖 이상영성과도 연계된 그의 수상쩍은 주변을 보면, 그는 위선자에 불과하지요.

'번영신앙', '번영신학', '번영복음'이란 말은 어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퍼뜨리고 그런 용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 대한 반대자들도 있습니다. 대단히 잘못된 개념도 있고요.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 퍼진 복음엔 물론 잘못된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잡아야죠.

그러나 번영복음을 단죄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샬롬의 복음에 분명히 내포된 평화와 번영과 형통과 풍요와 잘됨과 복을 전면 부정해 버림으로써, 잘못된 사람들의 형식을 빌미 삼아 옳은 내용까지 부인해 버립니다. 그래서 청중과 독자가 성경적인 잘 됨과 형통과 풍요의 개념도 채 알기 전, 문을 가로막아 버립니다. 자기네가 뭐라고?
엘리온이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좋은 것을 내셨고, 아브라함을 통해 평화/번영/형통/잘됨/복/풍요를 안겨 주셨건만 성도들이 그것을 채 믿고 받아들이기도 전, 사전 차단해 버리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파이퍼는 사람들의 잘됨을 막는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가장 의로운 양 행세하니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소위 신학자(神學者)라는 사람들 일부가 이렇습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그들은 신학을 논하기 전, 신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번영은 풍요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마음의 평화도 뜻하며, 일이 선한 뜻대로 잘 됨도 포함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번영은 결코 일부 텔리밴젤리스트들이 강조하는 따위의 '부자 되기'가 아닙니다. 과다/과잉/사치/낭비가 아닌 풍요입니다.주님은 이적으로 수 만 군중을 먹이신 후, 빵 조각 하나도 버리지 않게 광주리에 챙기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존 파이퍼는 고난의 복음만을 강조하면서 가난과 죽음과 질병, 마귀에 의한 억눌림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러 오신 예수님의 모든 복음을 균형있게 가르치지 않고, 편향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요즘 '대언자'로 활개치는 D. E. 오워, 과거의 워치먼 니 등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이 번영/형통/풍요/잘됨을 저주하고 혐오합니까?
오, 천만예요!!!!!!!!!!!!!!!!!!!!!!!!!!!!!!!!
성경은 자체모순 경전이 아닙니다.

번영과 형통 이슈의 문제는, 성경대로 바로 메시지를 전하지 않거나 주어진 풍요와 좋은 것들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세상에서 늘 박해를 받습니다. 잘되고 풍요롭다고 해서 늘 편안하고 곧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 않다는 생각 탓에 타락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번영이 복음의 전부인 양 주일 강단에서마다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원천적으로 대단한 잘못이지요.

이 두 가지-양 극단은 모두 성경과 복음을 크게 오해하고 곡해한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크리스토의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수난할 것과 크리스토님의 수난에 동참할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크리스토의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를 깨뜨렸습니다.
율법의 저주의 파쇄로 온 것 하나가 가난의 극복입니다.
죄의 대속이 십자가의 모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속의 진리를 가장 극명히 밝힌 사도 파울의 서신서 자체에서도 극명해지는 진리입니다.

메시아는 왜 오신 것입니까?
죄의 저주, 율법의 저주에서 죄인들, 노예들을 해방하러 오신 것입니다!
노예들에겐 풀려남과 동시에 잘됨이 기다립니다. 그렇지 않나요?
풀려났는데도 잘 되지 않는다면, 아직 일종의 노예입니다.


"잘 되는 꼴을 못 본다"는 말이 있듯, 풍요와 번영을 단지 질시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잘 되고 풍요로운데도, 자기 배만 채울 뿐, 그것을 제대로, 옳게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번영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1. 자기가 아는 진리를 바로 나눠야 한다
    2. 자기가 받고 가진 것을 바로 나눠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바로 깨달아 실천해야 옳은 것입니다.

시편 35'27는 메시아적 예언이면서 잘됨을 말하는 대표적인 성구입니다. 
신약도 공히 그것을 말합니다.
메시아는 잘됨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루카복음서=눅 4'18,19). 잘됨의 예언을 성취하시러 오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겐 풍요로워지는 길을 열어 주고 나눠 주고 복음으로 득 볼 수 있는 길을 말해 줘야 합니다. 남만 풍요롭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복음이 아니지요.
복음을 지키고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파이퍼처럼 계속 수난만 말하는 것도 더 가난해져서 빨리 죽으라는 소리 밖에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에겐 풍요의 길을 알려줘야 합니다 .

오늘날, 관상영성/떠오름영성 같은 해괴한 이상영성들이 나돕니다. 근본적으로 카톨맄교 수도원에서 유입된 이들의 주된 주장 하나가 "모든 것을 비우라", 몸도 맘도 가난해져라는 그릇된 복음입니다. 중세의 수사들처럼 가난뱅이가 되라는 겁니다.
풍요로워지길 포기하라는 겁니다! 그들은 가난을 '미덕'이라며 가르칩니다. 그들은 별반 하는 것 없이 주로 가위다리를 한 채 명상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쓴 책을 팔아 먹거나 비싼 강의료를 받으며 그런 '썰'을 전파하고 다닙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신교 교회와 신자들의 돈과 재원의 씨를 말리고 물을 말리려는 마귀의 심산이죠.

몸도 맘도 가난해져라.
텅텅 비워라..!

어디 성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던가요?
우리는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들의 말과는 정반대로, 교회와 신자는 풍요로워야 합니다. 교회가 풍요롭지 않고 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사명을 다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부자가 되라는 게 아니라, 모자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시23편 첫 머리처럼, 신자는 부족함이 없는 게 이상적입니다. 신자는 잘 돼야 합니다.

그 다음은, 풍요를 잘 써야 합니다.
축재나 사치를 하지 말고 절제해야 합니다.
잘됨을 나누고 남에게도 전달해야 합니다.
쌓아 두기만 해서는, 불과 얼마만에 썩어 버립니다.

그리고, 잘 된다고 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기만 하느냐?
아니죠!
참 신자는 세상에서 박해도 받습니다. 수난(受難)도 합니다.
누구나..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나그네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써 균형을 갖추고, 문제를 극복해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