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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구원론

거듭남은 단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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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멘넷에서 있었던 작은 구원론 논쟁을 보면서..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거듭남과 구원 단계에 안주하려는 성향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시작과 출발에 불과하다고 말해 주면 버럭 역정을 내곤 합니다. 그런 경향을 지닌 사람들은 신자로서의 다음 단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거듭남/구원을 강조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와 행동으로 성숙/성장의 단계로 접어 들어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방금 태어난 베이비처럼 잠자코 코코 잠만 잘 게 아니라..
 
배 고프면 앙앙 울어대고 젖도 열심히 빨아야 하고
몸도 상하좌우로 움직여 운동을 하고
때가 되면 어서 걸음마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신령한 젖을 먹다가 이유식도 먹고 (히브리 5:12~14, 코린토A 3:2)
바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면서 (코A 14:1)
험한 세상을 이겨 나갈 훈련에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태어난 자녀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성숙함을 주위에 보여야 합니다. (코A 13:11) 그렇지 않으면 부모와 주위에서 염려를 끼치게 됩니다. 자라지 않으면 병든 줄로 여깁니다.

신앙 성장을 위해 주어진 중요한 발판 하나가 방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성령침례를 받게 돼 있습니다(요복 1:33, 행전 11:15,16).
이것은 신자의 영이 성령으로 온전히 채워짐을 가리킵니다. 개인을 위한 첫번째 성령채우심(=성령충만)이기도 합니다(행 2:4, 9:17). 
성령침례는 반드시 표징을 나타냅니다(행 2:33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 8:16~19, 마술사 시몬도 성령 임하심을 눈으로 보았음. 특히 18절 유의).
그 이유는 성령님은 겉으로 드러내시고 증거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행 2:2,3). 반드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표징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지요!

그러나 교리와 신학, 전통 등에 갇혀 있게 되면 성령침례의 표징이 좀처럼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답답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낮아져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성장을 위한 도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물에 들어가려면 일단 다이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침례의 이 표징 이후 비로소 각 개인 몫의 영적 은사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신자는 꼭 방언을 하게 돼 있습니다(마르쿠스 16:17).
까닭은 방언은 나의 영이 하나님과 극비리에 친교하는 필수 '통신수단'이기 때문입니다(코린토A 14:2,15). 그런데도 하나님과의 [영적] 친교를 못마땅해 하거나 기분 나빠(?) 하는 신자들이 있지요. 역설적으로 방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셈입니다. 

방언은 본인이 "못" 하는 것이 아니고 몰라서 안 하는 것입니다.
이천년전 성령님께서 오신 이래 (ever since) 하늘에도 계시고 동시에 지상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초기교회에 주신 언변(utterance)이 교회에 머물고 있어서, 신자가 그냥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저더러 방언만 강조한다고들 하는데..
'방언만'이 아니라 방언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표징이며 성령의 9 은사의 관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코린토A 12:4~11). 다음 단계인 예언/통역 등의 은사로 나아가려면 방언은 필수적인 문턱이요 방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을 하면 하나님과의 친교가 깊어지므로 자연히 영적인 빌드엎을 통해 '근육'이 생깁니다. 성경 읽는 맛도 달라져 꿀덩이보다 더 단 맛을 느끼는 경지로 접어들게 되며 진리의 깨달음도 깊어지며 무엇보다 영적인 환희가 찾아 듭니다. 내 혼과 몸은 잘 못 느껴도 영은 느끼지요.

방언은 통역되지 않는 이상, 자신과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천사나 악령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비밀코드, 영적인 모르스 부호입니다.  

방언은 하면 할수록 영으로부터 혼으로 담대함이 흘러 들어 용감한 신자가 됩니다.
입을 열어 전도도 하게 되고 수줍던 사람이 담대하게 간증도 합니다.
복음도, 예수님의 이름도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됩니다.

방언은 자기 몫의 은사를 찾아가는 지름길입니다.
방언 생활이 길어지고 깊어지면 자신에게 주신 성령님의 은사를 찾아 알게 됩니다.

방언은 영적인 권능을 활용하는 가이드이기도 합니다.
방언은 서로 다른 영과 혼 두 차원의 차이를 인식하게 하여 영적 분별을 추구하게 만들어 줍니다. 방언기도가 오래고 깊어질수록 영적 분별력이 예리해져 갑니다.
[여기서 영적 분별력이란 영 분별 은사와는 다릅니다.]

또 방언이 위험을 예감하게 해 주거나 위기 속에서 목숨을 구해 줄 때도 있습니다.
다양한 체험간증들이 있지요. 

어떤 목회자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중 갑자기 방언이 걷잡을 수 없이 나와 도로변(shoulder)에 차를 세워 넣고 방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동안에 큰 사고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대형 연쇄추돌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는 사고였습니다.

한 여성도는 모임이 끝나 어둠 속에서 전철 역으로 향하던 길에 갑자기 나타난 술취한 두 남정네들에게 양쪽 팔이 잡혔습니다. 무섭고 당황하여 방언기도를 했답니다. 그러자 이 남정네들이 당장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져 서 있었고 그 성도는 무사히 빠져 나와 전철에 올랐답니다.

한 젊은 사역자는 차를 운전하던 중 붉은 신호등에 섰는데 갑자기 차 옆문이 열리더니 총구가 들어 왔습니다. 노상 강도였던 것이지요. 다급하여 순간적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언을 하면서 용감하게 손을 내밀어 강도의 머리에다 안수를 해 버렸는데 그 강도가 그 자리에서 자빠지더니..잠시 후 방언이 터지더랍니다! 그 강도는 그후 크리스천이 됐습니다. [위험하니 함부로 흉내 내진 마십시오.] 

방언은 (좀 드물긴 하지만) 믿음으로 하는 경우, 외국인에게 자기네 모국어로 들리는 수가 있습니다.

역사 속 실화인데..오지 선교를 나갔던 선교사가 식인종에게 잡혀 기둥에 꽁꽁 묶여 죽기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토족들이 빙빙 돌며 먹거리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선교사가 믿음으로,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토족들이 땅에 무릎 꿇고 울면서 빌더랍니다. 알고 보니 방언이 그들에게 토속언어로 들려 복음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그 추장은 선교사를 풀어줬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러시아의 한 군 부대 연병장에서 전도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여성장교가 지휘대 위에서 호령을 하며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다가 가 서투른 러시아어로 앞에 나가 한 마디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 여장교는 처음에 어이없어 했지만 그 용기를 좋게 보고 허락을 했습니다.
이 선교사는 지휘대에서 서투른 러시아어로 전도하는 말을 꺼내다가 도무지 말이 잘 되지를 않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눈치를 챈 여성장교가 달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이 선교사는 큰 소리로 방언기도를 시작했고 잠시 후 여기저기서 부대원들이 무릎을 꿇거나 흐느끼며 그의 기도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의 방언이 그들의 귀에는 러시아어로 복음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기에 이 정도 해 둡니다. 

방언과 은사는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영적 무기입니다.

방언은 말과 가락으로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방언 찬양을 하다보면, 본인으로서 낼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와 가장 낮은 소리를 맘대로 내면서 천상의 음악 같은 가락이 흘러나오며,,완벽한 발성을 하게 됩니다. 좋은 발성의 지름길은 방언! 또 방언 찬양으로 교회에서 화답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완벽한 감사의 도구이며, 식사 때도 완벽한 축복기도가 됩니다.
방언은 말로는-자국어로는 안 되는 깊은 신음으로 자신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완벽한 중보기도입니다.

물론 성도는 영적인 열매도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아홉 열매가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윤리가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맺어지는 초자연적인 '신의 성품'-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령의 아홉 열매 중 첫 열매인 사랑, 그것은 슈바이처/테레사 수녀/헨리 나웬 등의 그런 '인류애'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 내려 받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원수도 사랑할 줄 아는 두려움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이 제 힘으로 맺는 윤리적/자선적 노력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지요.
이 점을 우리가 혼동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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