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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구원론

오직 영혼 구원?

영혼 구원만인가, 전인적 구원인가?

구원은 오로지 영혼만을 위한 것인가? 크리스토께서 받으신 수난과 십자가 형을 통해 이루신 구속 사역은 죄 용서를 통한 영혼 구원이 전부였는가? 구원은 육체나 현세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가? 독자도 그렇게 믿고 있는가?

대체로 보수계열이든 진보계열이든, 전통적인 교회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주장해 온 것이 사실이다. 얼마 전 모 교회 설교자에게서도 그런 언질을 들었다. 이것은 신학교 스승의 신학적인 가르침이 가장 정통적인 해석이라고 믿고 따르는 견해임이 거의 틀림없다. 필자도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과연 성경적인지를 성경을 통해 밝혀 보련다. 먼저 예수 크리스토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크리스토님 자신을 통해 헤아려 보자.

"주님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나를 기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분은 나를 보내시어 포로들에겐 해방을, 눈먼 이들에겐 눈 뜸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언하게 하려 하심이다." 루카(눅) 4:18,19(사역).

주님은 위 이사야서 부분을 인용하시고 "이 말씀이 오늘 그대들이 듣는 가운데 이뤄졌소!"라고 선언하셨다. 위 구절이 모두 '오직 영혼 구원' 하나로 압축되는가? 그 이상을 포함하는가? 만일 구원이 영혼만을 위한 것이라면 이사야가 위와 같이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훨씬 더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나는 그(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넘치게 얻게 해 주러 왔다(요한복음 10:10b 사역)."

만일 구원이 영혼만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게 해 주러 왔다"로 충분할 것이다. "더 넘치게(풍성히) 얻게"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구원은 영의 구원만을 뜻하지 않고 영/혼/육 삼차원의, 전인적 구원을 뜻한다. 주님은 공사역을 하실 때 환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거의 그때마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소"고 말씀하심으로써 신유도 구원에 포함됐음을 확실히 밝히셨다. 만약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신유가 구원의 일부가 아니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그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정면 배역하는 이단자나 다름없다.

다음 말씀을 보자.

    "이리하여 대언자 이사야를 시켜 '그 분은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 맡으시고 우리의 병[들]을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8:17)

그런데 위 구절이 정작 이사야서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참으로 그는 우리의 고통을 (대신) 져 주고 우리 슬픔을 걸머졌는데도.."(이53:4).

그렇다면 왜 마태가 그렇게 자구 해석을 했는가? 고대 유대인들의 고난과 슬픔의 개념 속에 약함과 질병도 포함됐던 것이다[마태복음은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이사야 53:5이 추가로 설명해준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써 우리는 (병) 고침 받았다."

주님이 프레토리움에서 로마병사들에게 맞으신 잔혹한 채찍형은 우리의 신유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위 예언은 분명히 우리 몸의 약함을 손수 맡으시고 우리들의 질병도 주님이 짊어지셨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구원의 효력이 우리의 영/혼/육 모두를 커버하고 있음을 극명히 진술해준다.

그런데도 일부 전통주의 신학자들은 신유는 구약인들만을 위한 것이며 신약시대 성도들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황당한 소리를 해댄다. 그렇다면 야코보서 5:13-17은 뭔가? 야코보서는 구약 사람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야코보가 이단자란 말인가? 야코보는 구원에 신유도 포함돼있음을 더 극명히 밝혀준다.

    "믿음으로 드린 기도는 환자를 [구원(회복)]시킬 터이니 주님이 그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혹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도록 서로 기도하시오. 의인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는 바 큽니다."([ ]표는 필자의 것).

예수님은 악령 지핀 딸의 구원을 호소하는 여인에게 이렇게 대꾸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 개들에게 던져줌이 마땅치 않소." 여기 '자녀들의 빵'이란 신유를 상징한다. 이 자녀들의 빵이 신학자들 말대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면 주님은 왜 당대의 '개'에 불과한 이방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오, 여인. 그대의 믿음이 크오!"라고 칭찬하시며 고쳐주셨는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 그런 믿음만 가지면 빵을 얻어 먹을 수 있단 뜻이 아닌가.

더욱이 수난/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 주신 이후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히려 이방인들이 더 많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이 '빵'이 '개들'(이방인)에게 적용되지 않았단 말인가? 신학자들의 학설이 얼마나 맹랑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그런 신학자들과 그 학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 '빵'을 챙겨 먹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직 '영혼 구원'이라고 밖에 믿지를 않으니 말이다.

더나아가 구원엔 단지 죄 사함과 신유만 포함된 것은 아니다. 다음 구절을 보자.

    "크리스토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 자 되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기록되기를 '나무에 매달린 사람마다 저주받았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아브라함의 복이 크리스토 예수 안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뻗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갈 3:13).

위 구절은 크리스토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율법의 모든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우리가 저주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됐다고 말씀한다. 율법의 저주는 어떤 것들인가? 신28:15-68에 나열돼있듯 주림과 목마름, 가난과 약함, 모든 질병과 재앙, 평화 없는 공포와 포로됨 등 죄의 결과가 모두 율법의 저주다. 포로됨엔 마귀에게 큰 영향을 받거나 사로잡히는 '악령에 지핌'도 포함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이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친교함으로써 누린 의와 평화와 자유, 건강과 풍요 등이 모두 포함된다. 따라서 크리스토께서 우리 대신 받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은 죄의 용서와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아브라함이 누렸던 모든 복이 곁들여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처럼 다들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풍요란 뜻은 넉넉함이지, 과다한 축재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과 분복이라면 내 몫에 태인 '탈란트'의 하나로서 거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섬김과 나눔을 위한 부이지 혼자만 누리는 부가 아니다. 그리고 감당할 사람에게 주신 선물의 하나이지 "내겐 왜 안 주셔?"라고 항의할 불공정의 대상이 아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잘 되듯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강건하길 간구합니다"고 복을 빈 요한의 말은 전인적 구원의 개념을 포함한다.
 
이런 전인적 구원을 교회가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도 "구원은 영혼만을 위한 것"이라고 근거 없이 고집하며 사자후 하는 설교자와 그 말을 믿는 교인들이 측은해 뵌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오직 영혼 구원'보다는 전인적 구원이 더 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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