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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구원론

구원의 완전성 (샬롬)

 

 

 

구원의 완전성

 

 

샬롬

 

 

최근 TLT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원은 취소될 수 있는 것인가’ 하며 구원의 유효성에 관하여 많은 궁금증들이 올라오고 있다. 물론 해묵은 논쟁일수도 있으나 신학의 양날과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겉으로 교회에 다니는 ‘외형적 교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성령 받아 거듭난 ‘참된 성도’가 그 대상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구원론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칼빈과 알미니안의 구원론을 비교해 본 후, 과연 성경에서는 구원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 : 성도의 견인

 

칼빈주의는 ‘성도의 견인’을 믿는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 받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 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 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얻게 되고,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한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모든 과정(선택, 구속,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으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를 결정하신다는 관점이다.

 

 

알미니안 : 은혜로부터의 타락

 

알미니안주의는 ‘은혜로부터의 타락’을 믿는다. 이는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은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으로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알미니안주의에 의하면, 구원은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 요소가 되는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만 효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 된다는 관점이다.

  이상에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주장하고 있는 구원관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이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비교

 

 

 칼빈

알미니안

 특징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구원 받은 자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구원의 주도

하나님

인간의 협력

장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함으로 인간의 나약함에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신앙 안에 거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려 하는 행함 있는 믿음을 지향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살핀다.

단점

1. 성령의 견인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는 경건한 믿음의 행위조차 경홀히 여겨 방종한 생활을 하게 된다.

2. 믿음의 본질이 훼손된 행함 없는 (맹목적) 신앙에 빠질 수 있다.

1. 인간의 협력이 강조되다 보니, 하나님의 거룩함에 항시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에 부딪쳐 '구원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지닌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2. 율법의 본질이 훼손된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

오용 이단들

구원파

큰믿음교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알아보기 쉽게 표로 정리해 보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준거의 틀이 되는 성경은 성도의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알아보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은 양 쪽의 주장들을 모두 말하고 있다. 즉,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구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실될 수도 있는 구원’에 대하여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내용을 함께 살펴볼 수 밖에 없겠다.

 

 

1. 취소될 수 없는 구원

 

  성경은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데,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첫 번째 근거로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협력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하심에서 비롯되었음을 끊임없이 나타내고 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며 그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전 13:48)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3)

 

 

간혹, 칼빈의 예정론을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운명적 확정’ 마냥 이해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간의 소중한 자유의지를 포기한 채 수동적 신앙상태를 믿음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기에 칼빈의 예정론을 잠깐 소개해 본다.

 

칼빈은 예정론을 바울의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정리하였다. 바울은 열정적인 마음으로, 또 소명에 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기의 친족인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으나, 기대에 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다. 반면, 믿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오히려 주께로 돌아오는 기현상을 경험하면서 왜 누구는 믿고 누구는 기대에 반하여 믿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칼빈도 동일한 이해의 구조를 따라 하나님의 예정을 이해했고 그렇기 때문에 칼빈의 교리를 보면 신론이 아닌 구원을 다 설명한 후에 하나님의 예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 구원에 참여한 것이 곧 하나님의 예정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시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겠지만 우리의 인식면에서는 구원 경험이 앞서게 되는데, 이것은 구원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구원에 참여한 (거듭난) 우리들은 이 구원이 단순히 인간의 자기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십분 활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두 번째 근거는 구원의 근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중 제 2위격을 가지신 성자님으로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완전한 대제사장(히 7:25)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주신 자는 결단코 하나도 잃지 않으신 분이시며(요18:9),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도록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신 분(요 14:16)이시다. 실제로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요 16:7).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다른 넓은 길은 없다. 결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 5:8-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세 번째 근거는 우리의 구원을 보혜사 성령님께서 친히 보증하고 계시며(엡 1:13, 4:30), 성령님께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끝까지 도우시기 때문이다.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립보서 1:19)

 

 

마지막으로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근거는 구원이 바로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5)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속성과 선포된 말씀에 의지하여 ‘취소될 수 없는 구원’, ‘결코 실패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바로, ‘상실 될 수도 있는 구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성경이 어느 때 상실 될 수 있는 구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2. 상실 될 수도 있는 구원

 

  한편, 성경은 또한 상실 될 수도 있는 구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의 적용은 ‘취소될 수 없는 구원’에 비하여 보편적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케이스에 대하여 작용되고 있는 듯 하며, 그 특별한 케이스의 가장 강력한 경우가 바로 ‘성령모독/성령훼방죄’이다. 성령모독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마 12:31-32, 막3:28-29).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한 죄가 있다는데......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지 모르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막3:28-29)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죄가 무엇이기에 성경은 이를 구원의 상실과 연관시킬 정도로 엄중히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엄중한 경고를 주의하기 위해서는 성령모독죄/성령훼방죄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래를 참조해 보길 권하며 (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성령-훼방에-관하여-샬롬 ) 쉽게 정의해 보고자 한다.

 

쉽게 말하면 성령을 모독하는/ 성령을 훼방하는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다.
언제 넌크리스천들이 성령님 욕 하는 것을 보거나 들어 본 적 있는가?
오히려, 나름의 가치관으로 기독교, 예수님, 하나님을 욕 하거나 판단을 하기는 하나, 성령님은 “성(聖)”자도 언급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이들은 성령님을 언급할 수도 없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결코 성령님을 알 수도, 인정할 수도, 영적인 일을 인지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어야 비로소 성령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고전 12:3).

이런 전제하에서 살펴보면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란...

 

    1) 서기관들처럼 말씀을 잘 알고 그 능력의 근원을 알면서도 자신들/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집요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함부로 폄하하는 자들(막3:22)

 

    2)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맛보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자들(히6:6).

 

    3) (거듭났으나)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어찌됐든 자유의지를 가지고)그리스도를 떠난 자들(딤후 4:10)을 말한다고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 6장 6절을 보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은 이같은 사람들은 회개에 이르도록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결국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를 의미한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절대적, 의도적, 지속적인 배교를 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이처럼 사함이 불가능한 죄에 대한 언급은 앞에서 말한 성령 모독죄(마21:3)와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 5:16)가 있다.

6절 하반절을 보면, 이들의 행위가 불사(不赦)의 죄에 해당되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현저히’ 욕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배교가 그리스도께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의적인 배교에는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윤리적, 도적적 죄는 성경의 말씀대로 회개하면 용서를 받는다(마12:31). 그러나, 고의적인 배교 행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일이므로 용서 받을 길이 없다. 배교 행위는 예수님의 완전하신 십자가 사역을 폄하하는 행위이며, 이제는 부활승천하사 하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다시 땅으로 끌어내려 십자가상에 못 박힌 욕된 모습 그대로를 지속적으로 드러내 놓아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는 상태로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우리는 마태복음과 히브리서를 통하여 ‘상실 될 수도 있는 구원’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여기서의 공통점은 바로 ‘고의성과 성령’이 아닌가 싶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을지라도 구약을 통한 증거와, 친히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지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하였다. 그 시대에 있어서야 이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겠지만 지금의 이들은 최소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명백히 이미 거듭난 자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미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이미)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까지 맛본자들이다. 

따라서 성령 모독 죄 또는 불사(不赦)의 죄는 우리들이 연약하여 짓는, 짓고 있는, 지을 수 밖에 없는 윤리적, 도덕적 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심각한 ‘영적인 죄’를 말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의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택하신 자녀를 끝까지 지키시고 구원해내시는 ‘성도의 견인’을 말씀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는) 상실될 수도 있는 구원’을 말하고 있는 셈인데...나는 진실로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명제가 어떻게 화합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가가 본 내용의 관건이라 할 수 있으며, 이제부터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3.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

 

   우리는 앞에서 ‘취소 될 수 없는 구원’과 ‘상실 될 수도 있는 구원’을 동시에 살펴보았다. 성경은 이 두 가지 구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궁극적으로 이미 이루어졌으나, 개개인의 인생과정에서는 (운명론적인)확정이 아니라 지금도 이루어져가고 있는(성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2)

 

따라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듯이,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것이 바로 성도들의 구원이 아닌가 싶다.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 더욱 그러함을 본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가 ‘두렵고 떨림’인데 이 두렵고 떨림에 대한 나의 작은 경험을 나눠보고자 한다. 십 수년전 운전면허증을 딸 때의 일이다. 나는 이미 시험에 한번 떨어진 경험이 있었고, 두 번째 도전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는 ‘붙을 수 있다’라는 (주님이 주신) 확신을 갖고 시험을 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시험에 임하니 떨려도 너~~무 떨렸다.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몸은 긴장으로 경직되고, 뒷 자리에 앉은 심사관(?)에게는 자꾸 신경이 쓰이고... 합격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문자 그대로 (신앙가운데 거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결과는 결코 아니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빌립보서 2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두려움은 위험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나, 경외나 존경이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떨림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 앞에서 전율하는 두려움이나 떨리는 경외심을 갖고 서 있는 것을 나타내는데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며 외적으로는 자기의 무능력을 인식할 때 오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나의 모습을 바로 인식할 때 나타나는 것이 이 ‘두렵고 떨림’이지 행여 나를 ‘구원에서 탈락’시킬까봐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왜곡된 (아버지)하나님 상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조건 ‘(어떤 상황에서든) 건져 주시겠지’하는 안이한 생각 또한 왜곡된 하나님 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책임지고 보호해 주시고 건져 주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을 때조차 (일반적인 은총은 당연히 있을 것이로되) 특별한 보호를 해 주시지는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소위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떼논 당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한 면만을 적용하여 오용한 경우에 해당한다. 구원파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을 다 거론하기는 어려우니 가볍게 언급하고자 한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이 정죄함이 없다 했으니 그리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정죄함이 없는 것에 대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 성령의 법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태도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정죄함이 없다 했으니 내 맘대로 죄에 대한 경계심도 없이, 성경이 어찌 요구하는지 분별하지도 않은채, 그저 ‘예수 믿네’하며 나 살고 싶은대로 살면 되는 것일까? 성경은 로마서 6장 15절을 통하여 그럴 수 없다고 이미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라 인간의 중심을 보시니 우리는 온 맘과 뜻과 힘을 다해 그분을 경외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따라서, 우리는 나 스스로가 진실로 ‘예수 안에’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간검해야 한다. 그 확인의 기본은 말씀이다. 성령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 스스로가 점검할 수 있도록 하신다. 칼빈에 의하면 이것은 자녀처럼 가지는 두려움이지 종처럼 가지는 두려움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성도들이 가지는 두려움은 불신앙과 ‘구원으로부터의 탈락’에서 비롯되는 그러한 두려움이 아닌, 주님에 대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경외감이다. 실제로 거듭난 성도들은 실수를 하고, 죄를 범할지라도 절대로 방만한 삶을 사는데 자신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에, 또한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답게’ 살려하는 성도들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결론

 

우리는 앞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과 견인, 그리고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에 결코 취소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모독하거나, 거듭났으나 (어떠한 이유든지간에)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는 특수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결코 사하시지 않으시라는 것 또한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 안에서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거듭난 자가 그 신앙에서 실패한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정확한 메커니즘을 성경에서 알려주고 있지 않기에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일부는 구원에서 탈락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실패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구원 사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가운데서 결코 실패하지 않고 진행될 것임을 믿는다.

 

그러기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11)는 바울 사도의 고백또한, 자신의 모든 의지를 사용하여 전심으로 수고하였으나(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울사도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던가!) 그 모든 사역의 도우심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최종적이며 ‘궁극적 고백’으로 읽혀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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