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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40:1-3] 기다림의 가치


김삼

   시편 40'1-3 (사역)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네 예호바(여호와)님을;
     그러자 그 분, 날 굽어 보사 내 울부짖음을 들으셨다네!
   나를 끔찍한 구덩이에서, 진흙수렁에서 건져 내시고
     내 발을 바위 위에 놓아 내 걸음 탄탄케 하셨네
   그리고 그 분, 새 노래를 내 입에, 하나님꼐 드릴 찬양을 두셨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 예호바님을 의지하리!





현대인들의 중요한 특징 한 가지가 조급증이다.
평소 삶이 바쁘다 보니 모든 것을 빨리 빨리 처리하려 든다. 한국의 셀폰(핸드폰)이나 컴퓨터 등 첨단기기들이 세계적으로 앞서 가게 된 비결 한 가지도 이 "빨리 빨리" 정신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오늘날 한국의 세계적인 자살 빈도와도 통하지 않나 싶다. "괴론 세상, 일찌감치 하직하고 싶다"는 식의 그릇된 고백으로써 최종사인 죽음까지도 남보다 빨리 앞당겨 보겠다는 흐름이랄까.

물론 현대사회에 적응하려면, 우리는 서두를 때 서둘러야 한다. 자주 늑장을 부리다 보면 늦는 대가를 얻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진화'한다 한들, 인간의 기본적인 신체적/정신적 '리듬'은 무시할 수 없다. 성급함, 성마름이 만능-만사의 해결책-은 아니다. 사람은, 쉴 때 쉬어야 하고, 잘 때는 자야 한다.
한 주 하루 쯤은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과도 더 친근해져야 바람직하다. 

그리고..기다릴 때는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세상 말도 있지 않은가.
 
오늘 바탕본문 말씀에서, 시인 다빋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고 고백한다. 사실 다빋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또 기다렸더니.."라고 되풀이해서라도, 얼마나 오래고 긴 기다림이었는지 토로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나긴 기다림을 두 번만으로 축약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뤄, 감지케 한다.

다빋은
누구를, 무엇을 그토록 기다렸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 곧 위기로부터의 건짐/구출이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기다림으로 헤아릴 수 있다.
기다려야 할 때 얼마나 기다릴 수 있나가 그 사람의 심지의 깊이를 보여 줄 때가 많다.  기다릴 수 있는 사람, 기다려 줄 줄 아는 사람이 사람답다. 이것은 만사에 "느려 터진" 사람을 뜻함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신을 의존한다고 하지만, 흔히 얼마나 기다리냐가 그 의존도, 곧 믿음의 잣대가 되곤 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조급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일을 놓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는가? 기다리고, 기다리고..또 기다리는가?


정말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은 지
칠 줄 모르고 꿋꿋이 참아 내며,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좌절할 줄 모른다.

기다림은 으레, 참음/인내/끈기를 동반한다. 인내 없이는 기다릴 수가 없다. 기다리다 보면 지루할 수 있고, 따라서 곧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인내를 통해서만 지루함과 지침을 극복할 수 있다.

기다림은 깊은 기대감, 신뢰, 사랑이 결부되는가 하면, 때로는 정반대로 깊은 원한과 적의, 복수심이 개재되는 수도 있다. 또 대상에 따라 두 가지가 동반되기도 한다. 원수를 갚기 위해 하나님을 의존하는 경우다.

신자가 상대방을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기다리는 경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다림에서 비롯되고 또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기대감에 대한 실망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순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니, 우리의 기다림과 기대감을 배신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은 기다리는 우리의 인내를 보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릴 근거 한 가지는 그 분께 대한 사랑이다.

파울은 저 유명한 '사랑의 노래'-코린토A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한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통찰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내려지는 아가페이며, 성령의 아홉 열매 중 첫 열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성질의 사랑이다.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 속에 살아계신 성령을 통해서 그 분의 열매가 맺혀진다.

하나님의 영, 크리스토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아가페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 옛 언약인(구약인)들에겐 아직 성령님이 내주(=속에 머무름)하시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통해 그 분을 계시 받아, 그 분을 의존하고 앙망하고(=바라고) 기다렸다. 다빋은 표면상 사역적으로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존할 뿐이었다.  

아무튼, 구약인들에게나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나 기다림은 필요하다.


참을성 없이 성급한 사람들은 기다리지를 못한다. 기다릴 줄 모른다. 흔히, "못 기다려!" 하고 기다림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미안하지만,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 기다리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기다려야 할 목표가 뚜렷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사람에겐 누구나 기다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밖에 신속히 응답하시기도 한다. 특히 갓 믿는 신자들에게서 그런 경우를 흔히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기르시고 연단하시려고 점차 응답과 기다림의 시간을 연장하시기도 한다. 갓 믿는 신자들은 흔히 그런 경우, 쉽게 지치고 낙담하고 좌절할 수 있다. 그러나 낙심과 좌절은 신자에게 금물이다. 그건 마귀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기다림엔 실상 포기라는 게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어진 제 수한(壽限)조차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을 발휘하다 못해 삶을 미리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기다림의 '미학' 같은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과부의 원한의 기다림


지칠 줄 모르는 과부의 기다림을 기억하는가?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단, 주님의 이 비유(루카복음서=눅 18'1-8)에서 이 여인이 지칠 줄 모르고 참고 기다려야만 했던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우선 자신의 피 맺힌 원한 때문이었고, 또 그 도시의 판관(判官)이 끝내 해결해 줄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실로 '와신상담'은 지칠 줄 모르고 물러설 줄 모른다. 이 여인은 판관을 자주 찾아가 하소연했다. 

   "판관 나리, 제 적에 대한 피맺힌 원한을 풀어 주소서!"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판관은 선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사람을 무시하는, "막 가는" 스타일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세상 판사들이 역시 그렇다. 떡~ 하니 드높은 재판석만 차지하고 앉아, 하나님의 실존을 무시한 채 정의와 민심을 몰각하고 그냥 제 잘 난 맛으로, 제 멋대로 '판가름'하기 일쑤다. 미국의 동성(同性) '결혼' 허용 판례는 그 대표적인 예다. 언젠가 하나님이 그들을 제대로 심판하실 날이 온다.

그러니, 이 콧대 높은 판관에게 한낱 초라한 과부의 청쯤이야 들은 둥 만 둥 아니겠나. 하지만 이 여인은 초지일관 꿋꿋한 참음과 기다림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계속 판관을 찾아가 괴롭혔다.

판관은 번거롭고 견디다 못해 독백한다. "나야 하나님도 두렵지 않고 사람도 무시해 버리지만, 이 과부는 도대체 귀찮아 못 견디겠다! 그녀의 원한을 풀어 줘야겠어. 안 그러면 계속 이렇게 찾아와 날 괴롭힐 거 아냐."


뭘 말해 주는가?
과부의 한결 같고 뚜렷한 목표와 줄기찬 끈기, 지칠 줄 모르는 기다림 앞에서는..콧대 높은 판관의 불의한 에고(ego)와 오만불손, 게으른 근성 등도 맥을 못 추고 와르르 무너지고 깨져 버렸다는 얘기다!

이처럼 참 기다림은 지치거나 포기할 줄 모른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다림이 그래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 불의한 판관의 말을 (귀담아) 들으오. 하물며 하나님이 밤낮 울부짖는 선민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소? 그냥 오래 묵혀 두시겠소?..이내 그 원한을 풀어 주실 거요. 하지만 인자(人子/Son of Man)가 올 때 세상에서 어디 믿음을 보겠소?"

주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마냥 기다릴 뿐 아니라 밤낮 부르짖어야 옳다. 물론 때로는 잠잠히 평온 가운데 하나님을 바랄 수도 있지만, 울부짖음은 곧 안타까움과 한맺힘의 깊이를 시사한다. 주님 자신이 땅에 계실 때 자주 울부짖어 아버지께 소원을 아뢰셨다(히브리서 5'7). 그래서 잠잠한 내적 기도만 강조하는 소위 '관상기도'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

그런데 주님은 이 비유 끝에서 "..세상에서 어디 믿음을 보겠냐?"고 물으신다.
즉, 주님은 믿음의 한 기준을 기다림과 끈기, 부르짖음에 두고 계신다. 아울러 이 시대에 주님이 요구하시고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그런 유의 믿음이 드물다는 암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그런 믿음을 보는가? 실로 흔치가 않다. 내 믿음엔, 주님이 바라시는 기다림과 줄기찬 끈기가 있는가? 아니면, 쉽게 포기하고 마는, 에푸수수한 무너짐인가.


초점-대상과 목표

기다림은 대개, 대상과 목표가 분명해야 옳다.
진한 기다림일수록 초점이 한결 같고 또렷하기 마련이다. 반면, 막연한 기다림은 마냥 오래 기다려야 할 의미성이 모호해진다. 불확실한 것을 불투명 속에 바라보게 된다.
많은 청소년들이 성적 순결을 지킬 수 있음은..참 배우자를 만나 서로의 몸을 열기까지 참고 기다려야 할 확연하고 분명한 목적 때문이다.

바탕본문에서, 다빋의 기다림의 대상과 목표는 극명하다!
예호바 하나님이 그를 굽어 살피시고 그의 울부짖음을 들으시어, 구덩이와 흙수렁에서 건져 주시길 갈망했다. 메시아적 시편인 이 시는 장차 오실 참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기도 하다.

아까 그 과부 역시 초점이 분명했다.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어릴 적 자주 즐기던, 햇볕 아래 먹지 태우기 놀이가 생각난다. 한낮의 양달에 아이들이 동그랗게 쪼그리고 둘러 앉아, 돋보기나 깨진 유리병 밑바닥으로 먹지 위에다 햇볕을 모아 동그란 초점 안에다 맞추고 기다리노라면, 잠시 후 마침내 가느다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면서 작은 불길이 타 들어가는 순간, 아이들이 "와~" 하고 탄성을 지르곤 했다.

그러나 초점이 맞지 않으면, 햇볕이 제 아무리 따갑고 먹지가 아무리 까매도 무용지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려면 초점을 그 분께 맞추고 '주바라기'를 해야 한다. 대상과 목표가 분명해야 옳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람은, 설령 그 분이 마냥 좋고 사랑해서 기리고 송축하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막연한 기다림은 아니다. 그 분의 영광을 위함이다. 잠잠한 바람(願望)도 대상이 분명하다.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시 121'1,2)

   내가 눈을 들어 산들을 바라보리-나의 도움은 어디로부터인가?
  나의 도움이 오는 곳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예호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림은 도움이 그 분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분이 만 복의 근원 아니시던가.

그러기에 우리의 기다림은 포기하지 않을 가치가 있다.
믿음은 끝까지 기다린다.
바라고 기다리는 이 믿음 없이는 그 분을 기쁘시게 못 한다(참고: 히브리 11'6).


상황도 이겨 내

참 기다림의 믿음은 또 주변 환경과 상황을 개의치 않는다.

   "다빋의 자손,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경 바디매오는 예리코 대로변에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뉴스에, 오직 눈을 뜨기 위한 믿음으로 소리를 냅다 고래고래 질러댔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이, 시끄러워! 닥치지 못해?"라고 꾸짖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는 끄떡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치더니, 결국 주님의 응답을 얻어냈다.

아마도 웬만한 소경 같으면, 사람들의 꾸지람에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진정 한이 맺힌 사람, 위기에 빠진 사람은 목적 달성을 위해 상황을 의식하지 않는다. 환경에 지배 받기를 거부한다. 믿음이 꼭 필요한 절대 상황에서, 주위를 의식하는 점잔이 사람을 고쳐 주지 못하고 살려 주지 못한다.


모독도 견딘다

참 기다림의 사람은 수모나 모욕감도 견뎌낸다. 
쉬로페니케(수로보니게) 여인은 악령이 지핀 딸을 구출하려고 예수님께 나아와 호소했으나, 고대에 대대로 우상을 섬기던 지역 출신의 '이방 여인'인 탓에 주님께 일종의 수모를 당했다. 주님은, 가여운 딸을 둔 이 이방 여인을 모독하여 그 자리에서 내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믿음을 한 단계 끌어올리길 기대하시면서 짐짓 떠 보셨다.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 개들에게 던져줌이 걸맞지 않소."

한 마디로, "그대는 이방 사람이니 개나 다름 없소"라는 모독을 담은 말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딸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물불을 가릴 줄 몰랐다. 아마도 여인은 그 이상의, 최악의 도전도 감내할 각오였을 것이다.

   "주님, 맞습니다. (저는 개 같은 이방 년입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나요?"

포기불가의 이 믿음의 말은 주님을 감동시켰다.

    "오, 여인! 그대 믿음이 참 크오!"

이처럼, 포기를 모르는 끈기의 믿음 고백이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은 우리의 그 기다림과 믿음, 끈기를 존중하며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의 믿음 고백으로써 그 분을 감동시켜 드리길 기대하신다는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강청

목적 달성을 위한 기다림은 또 강청(强請)을 요한다.
 
   한 사람은 한밤에 찾아온 나그네를 대접할 빵이 없어, 이웃집 친구를 찾아가 한밤에 문을 쾅쾅쾅 노크 하며 도움을 구했다. 친구의 가족은 다들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강청을 하며 한사코 문을 두드려 대니, 더는 그냥 잘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부엌의 빵덩이를 내 주고야 말았다.

기다리는 사람은 강청을 하게 된다는 주님의 비유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가장 필수적/치명적이고 중대한 사실은..기다림은 기다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진리다. 기다림이 기다림만으로 끝나는, 기다림 자체에 의미를 두는, '기다림의 미학'은 세상의 차원에 불과하다.


결과를 가져온다

신자가 하나님을 기다림은 반드시 결과를 동반한다.

돌보심, 들으심과 응답과 도움을 얻게 된다!

다빋은 이 시에서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하나님이 마침내 그를 굽어 보시어 귀담아 들으셨다고 했다.

구약인들은 예호바 하나님의 얼굴(프니엘) 돌리심과 돌아보심에 큰 의미를 두곤 했다. 그 분의 얼굴 방향이 곧 외면 또는 돌보심/긍휼(온정), 때로는 심판/죽음을 뜻했다.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복을 주시려면, 먼저 거기 계시는(예호바 샴마) 하나님의 얼굴이 사람 쪽으로 돌려져야 했다(민수기 6'24).

오늘날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계셔 우리에게서 낯을 돌리지 않으시고 늘 우리를 향하신다.


하나님은 결국 다빋의 한을 풀어 주심으로써 그의 오랜 기다림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됐다. 그를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바위처럼 탄탄한 말씀 위에 새 확신을 주셨다.
우리도 믿음의 기다림 끝에 응답을 얻어 그 분의 말씀-신실한 약속을 재 확인하면서 새 확신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분, 새 노래를 내 입에, 하나님께 드릴 찬양을 두셨네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 예호바님을 의지하리!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목적에 대한 응답 말고도 달리 보태어지는 결과는 곧, 기쁨의 새 노래이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노래다.
그뿐 아니다. 우리가 기다림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응답을 받고 새 노래를 부를 때, 주위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그 분을 의지하게 된다.


기다림의 가치는 실로 놀랍고 크다! 
기다림의 사람에겐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응답이 보장되고 기쁨의 노래와 더불어 복음 전파까지 되니, 정말 복스럽다! 너와 나-우리는..믿음으로 그 분을 기다릴, 충분하고 넘치는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