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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50] 감사하는 소수가 됩시다


감사의 가치를 아십니까? 엄청납니다!


   "감사제를 하나님께 바치고
    엘리온 님(가장 높으신 분)께 너희가 서원한 것을 갚아라
    환난 날에 나를 불러라 내가 너를 건질 테니,
    네가 나를 영광스럽게 하리!..
    감사제를 바치는 그가 곧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이란다.."  (시 50'14,15,23a 사역)


추수감사주일도, 추수감사절도 지난 이 때 아마도 독자는 이 메시지가 뒤늦게 '뒷북' 치는 묵은 설교쯤 되는 줄 알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뒷북도 앞북도 아닌 바로 지금(!), 필수적인 말을 하고 싶어 자판을 열고 두들깁니다.


저는 미국서 유래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을 "그닥" 중시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수확 때와 잘 맞지도 않는 시기의 명절일 뿐더러, 가족/교우들과 애꿎은(?) 칠면조 구이랑 전통 음식을 해 먹으며 하루를 끼리끼리 즐기는 파티가 참 감사와 무슨 상관인지 어이 없어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감사만 하고 감사절로서의 축제가 없어야 한다는 그런 율법적 사고방식 때문은 아닙니다.

하지만..'감사절'에 참 감사가 사라져 간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만들어 낸 미국인들은 요즘, 하나님께의 감사보다는 사람끼리 감사를 주고 받기(thanks-giving), 소위 '감사의 정(情)' 나누기에 집중합니다.
뉴스를 봐도 그렇습니다. 온통 사람끼리의 감사 얘기들 뿐입니다. 결국 추수감사절에, 추수를 하게 해 주신 "추수의 주님"이신 창조주께 대한 감사가 희박해져 간다는 얘기입니다.
솔직히, 그런 추수감사절은 있으나 마나 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빠져 버린 추수감사절은 세속 명절에 불과합니다.

파울이 로마 교우들에게 보낸 서신서 그대로, 사람들은 분명히 온갖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도, 그 분을 영광스럽게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로마서 1'21,22).
감사 없음은 주요 말세 현상들의 하나이기도 합니다(티모테A서=딤후 3'2 이하 참조).   


세상은 그렇더라도,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의 감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사람에 대한 감사도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로지 사람에게만 감사할 수 있는 기능을 주셨습니다. 동물들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냥 본능대로 움직일 뿐. 동물이 "감사합니다" 하고 조아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인간 창조의 모델인 성자(聖子)님-곧 예수 크리스토님-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며, 성자님은 아버지께 감사를 넘치게 해 오신 분이기 떄문이죠!
천군/천사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는 부분도 성경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한 부분은 아주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능력과 기능을 주셨고, 감사를 받기 원하실까요?
여기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glorify 합니다. 사람의 감사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더 드러나게 한다는 뜻이지요.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니..놀랍지 않습니까? 그만큼 감사의 가치는 드높습니다! 인간 행위들 중 최상의 가치가 있는 한 행동입니다. 그만큼 감사는 큰 특권입니다.

우리는 새나 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기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처럼 스스로 우러나는 맘과 입술로 감사를 드릴 때 진정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바탕본문인 시편 50편 기자의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감사와 하나님 영광을 자주 직결시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신자들마저도 감사에 인색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놀랍고 굉장한 활동/일의 가치를 모릅니다. 또 잊어 갑니다.
사실, 감사가 희박해지고 사라져 가는, 그런 시대가 오리라고 성경은 오래 전 예견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감사 대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감사하라고 지어 주신 입술을 저주와 욕설로 채웁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긴커녕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하고, 모독하고, 급기야 저주까지 합니다.  

신자들도 감사의 가치, 감사의 '미학'을 잊어 갑니다. 잃어 갑니다. 우리는 새벽기도를 비롯해 밤낮 수시로 기도하지만, 맨날 주님께 "..해 주소서"란 기도가 주를 이루지 감사가 적습니다. 감사 고백이 희박합니다. 이런 유의 기도는 하나님을 그다지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막중한 영적 '테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는 삶은 마치 불구/장애 상태와도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신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세상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없고, 따라서 진심으로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들만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마땅하지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며, 이는 곧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성도다운 성도입니다!
우리는 잊혀져 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기술'을 되찾아야 합니다.


감사가 얼마나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인지, 우리는 주님이 나환자 10명을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다시 통찰할 수 있습니다(루카복음서=눅 17'11-19 참고).

   "랍비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렇게 큰 소리로 예수님께 간구하여, 한센 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그 열 환자들 중 주님께 되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딱 한 명, 유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던 사마리아 출신 뿐이었습니다.

나병을 치유받았다는 것은 특히 당대로서는 실로 획기적이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저주 받았다고 사회로부터 늘 천대와 손가락질, 외면을 당하며 가족으로부터도 격리된 채, 길을 가도 멀리서 "(저는) 부정합니다!"라고 소리쳐 미리 알리며 살던, 어둡고 그늘진 구석과 과거로부터 영원히 해방됐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나병은 환처로 인하여 온 몸이 얼룩지고 살과 몸의 부분이 뭉텅 뭉텅 떨어져 나가는, 당시로서는 무서운 저주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아기 살처럼 깨끗하고 보드라운 몸으로 되돌아오다니..! 실로 엄청난 전환이 아닐 수 없죠.

그런데 이 무서운 질병으로부터 열 명이 다 같이 깨끗함을 받고도 그중 유대인인 아홉 명은 "이젠 나았으니 뒤는 나 몰라라" 하고 무심히 그냥 제 갈 길로 가버렸고, 오직 이방인인 이 사마리아 사람만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와서 엎드려 감사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9명은, 나병이 나은 엄청난 감격은 잠시 뿐 과거와 함께 은총도 묻어 버리고, 저버리기로 한 셈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주님께 감사하려고 되돌아가는 사마리아 사람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은총을 받고도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배은망덕한 '얌체족'이라고 흔히 불립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과거에) 큰 저주였던 나병 치유를 받는 큰 은혜를 입고도 주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겠습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길이 없습니다.

이 사마리아 출신 나환자는 사회에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였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오만한 9명의 유대인이 아니라, 감사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한 명의 사마리아인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환자 10명중 9명이라는 압도적인 숫자처럼 오늘날도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감사로써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다수이기보다 이 극소수 쪽이어야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원망과 불평을 일삼기가 일쑤이지요. 과거 미쯔라임 출국(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광야 1세대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이적 사역에 감사하기보다는 늘 불거진 입술로 원망과 불평의 말을 똥겨 내곤 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추격해 오는 미쯔라임(에짚트) 대군에게 조금도 해를 입지 않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갈 수 있었고, 40년 광야 생활 동안 병 들지 않고, 옷과 신발이 계속 닳지 않는 초자연적인 특혜를 누렸고,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는가 하면 때로는 메추라기 고기로 배불리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라(쓴물 샘)가 단물로 바뀌거나 바위샘이 터져 생수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권능의 이적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에 대한 감사 찬양보다는 늘 새로운 불평과 원망거리를 찾아내기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지요. 오죽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몽땅 휩쓸어 버리고 새 민족을 창조해 내시려다가 모쉐의 중재적 만류로 참으셨겠습니까!
대신..이 광야 1세대 중 믿음의 사람 예슈아(여호수아)와 칼렙(갈렙) -단 2명만 빼 놓고는 모조리 광야에서 사멸했습니다. 카나안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 나머지는 모두 그들의 후손인 2세대 뿐이었죠.

하나님이 택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 모양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선민(選民) 곧 가려 뽑은 민족이었지만, 믿음 없고 감사가 없는 세대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더 놀라운 혜택을 누리고 삽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아브라함의 복엔 영적/혼적/육적/물적인 4차원의 복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복과 은총을 누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면, 더 큰 과오와 죄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의 감사 없음을 뉘우치고 돌이켜야 합니다.


감사는 또, 기도 응답을 앞당길 수 있습니다.

사도는 성도에게, 모든 것을 감사로써 아뢰라고 권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확보하는 한 길은 곧 그 성취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아뢰는 것들을 미리 받은 줄로 여기고 거기 감사한다면, 기도 응답이 빨라질 것입니다. 
감사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로써 기도와 소원이 앞당겨진 한 예로, 구약시대 유다 왕 예호샤팥(여호사밧)의 승전 사건을 들어 보죠.

   착하고 경건한 예호샤팥의 통치 당시, 모압/암몬/세이르 3족의 연합대군이 유다에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왕이 하나님께 돌보심을 간구하자, 하나님은 대언자(=선지자/예언자)를 통하여 이번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며, 몸소 싸우실 테니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그러자 왕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당대 성전음악인들인 레빝(레위족)들을 군대 앞에 내세워, 앞장서서 찬양하며 전진하게 했습니다. 이 레빝들은 목청껏 큰 소리로 노래하며 외쳤습니다.  

    "예호바님께 감사하여라! 그 분의 사랑, 영원함이어라!"

이 감사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하나님은 즉시 천군/천사 복병을 시켜 적을 치게 하셨는데, 적군은 연합군과 아군끼리 서로가 서로를 치는 자중지란으로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했습니다! 그래서 예호샤팥과 온 국민들이 전장에 널린 온갖 전리품을 수거하는 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습니다. 나흘 쨰 되는 날, 그들은 베라카(송축(頌祝)/축복이라는 뜻) 골짜기에서 함께 모여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감사는 이런 결과를 가져 옵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늘, 시시때때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해야 좋습니다.
기쁜 일에도, 궂은 일에도 감사하라는 것이지요.
감사를 하되, 넘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독자에게, 오늘 하루라도 좋으니 오로지 감사로써 시종일관된 기도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너무나 모든 기도를 "주세요, 주세요" 식으로만 하는 데 익숙한 우리의 기도 언어를 하루만이라도 바꿔 감사로 가득 채우자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우리의 기도를 감사로 '도배'하자는 거죠. 

분명히 그런 기도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흐뭇~하게 해 드리는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