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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19:7-11] 성경 말씀, 어떻게 먹고 소화하나?




참고 성구: 시편 19'7-11


많은 신자들이 세밑 또는 새해 초 여러 가지 '레절루션'-결심과 각오, 희망사항-들을 내어 걸곤 합니다. 성경 읽기는 대표적인 예이겠죠. 올 한 해 구/신약 성경전서를 최소 1회는 통독(通讀: 내리읽기)해야겠다는 등의 굳은 결심을 하거나 희망사항으로 내세울 터입니다. 성도로서 좋은 생각, 선한 생각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또 마땅하기도 합니다. 꼭 새해초, 1년이란 시각/시간이 중요하기보다 성경읽기를 중시하는 그런 자세가 더 중요하지요.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영과 혼의 양식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밥과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공기와 물, 음식으로만 우리의 삶을 이어간다면, 동식물과 별반 다를 바 없을 터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동식물과 구분해 주는 중요한 생명 요소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없는 삶은 생명 없음, 영적 죽음을 뜻합니다.

창조주님은 흙으로 빚어 만드신 태초인에게 숨을 불어 넣어 생령(a living spirit)이 되게 하셨는데, 이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살 길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을 비롯한 온 우주를 만드시고 붙들어 지탱해 오신 창조주의 방편과 권능이 곧 그 분의 말씀입니다(창세기 1'3, 요한복음서 1'1-3, 요한서신A=요일 1'1)! 그 말씀 곧 로고스는 그 분의 아드님이신 성자님이셨고요. 이 성자님이 훗날 신/인 예수 크리스토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곧 진리이죠.

그래서 우리가 맨날 대하고 읽는 이 성경 말씀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라는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내팽개쳐 두거나 "처박아 두기" 일쑤라면, 곧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일상 생활 속의 모든 대상물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는지요?
사실, 이런 말을 하는 제 자신부터 부끄럽게도 컴퓨터를 대하는 시간이 성경 말씀을 대하는 시간보다 자주 더 많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컴퓨터/웹 속에도 있는 성경 말씀을 더 자주 대하고 의식하길 원합니다.
꼭 새해여서라기보다 나를 지으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셔서 살리신 주님의 은총을 날마다 되새기려면, 마땅히 그 분의 말씀에 늘/자주 경청하고 묵상하기 위해 더욱 성경을 가까이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바쁘고 각박한 현대 일상 속에서 성경 읽을 시간이 "빠듯하다"고 여겨진다면, '하룻시간의 십일조'라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가 평소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재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루 길이의 10분의1인 2.4 시간-약 두 시간 반은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와 말씀으로 정성껏 바칠 수 있다면, 하루 3시간을 기쁘게 훌쩍 넘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읽기 말고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하고 있는 다른 일들도 있습니다. 가령, 교회 주방 일 돕기, 교회 주차장의 눈 치우기 등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성도나 이웃, 가족을 말과 몸으로 섬기며 그들의 믿음을 북돋는 일 등이 그렇습니다. 주일이나 주중의 경배(예배)와 기도회 등의 준비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대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계속 그런 딴 일에 주로 바쁘다면, 말씀을 먹고 자라야 할 우리의 영혼이 자랄 수 없게 됩니다! 영양실조에 걸립니다.
주님이 베타니 라자로(나사로)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부엌에서 일하느라 바쁜 마르타 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마리아가 더 나은 쪽을 택한 것이라고 하셨던 말씀을 우린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주변이 웬지 약화되고 피폐하고 기진맥진하여 심지어 "소진"된 기분이 든다면, 성경 말씀을 자주 대하지 않음이 거의 틀림 없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소성(蘇省)케 하고 새 힘을 주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요르단 강가에서 침례(세례)를 받으시자 공(公)생애와 사역을 앞두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신 뒤, 극도로 허기 지고 온 몸의 힘이 빠진 가운데 불쑥 나타난 싸탄 마귀에게 세 가지 유혹을 받습니다만 모두 말씀으로 통쾌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그 말씀의 권능으로 무장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귀가 떠나가자, 천사들이 그 분을 수종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살아갈 영적/정신적 힘과 슬기, 권능을 줄 뿐더러 실제로 우리의 몸에 활력을 주고 건강의 혜택도 줍니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요. 아니, 인간 존재의 3차원 가운데서 가장 높은 차원인 영을 살리고 그 다음 차원의 혼도 새롭게 하는 그 말씀이 왜 가장 낮은 차원인 몸을 다루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온 우주와 우리를 창조하신 힘이 바로 그 분의 말씀 아니었나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출하십니다. 좋은 것들로 우리의 소원을 충족시키시며,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십니다(시 103'3-5)! 그러니 그 분의 말씀도 응당 그래야지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 소리를 듣고 권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그 분을 섬겨 그 분의 뜻을 실행하는 천군/천사들이 우리를 돕고 섬깁니다(참고: 시 103'20,21; 히브리서 1;14).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 존재의 3차원-영/혼/육-모두를 돕는, 우리 삶의 무한한 자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실로, 전(全) 존재가 하나님 말씀 위에서 살아 가야 하는 게 우리 신자들입니다.


다빋(다윗)은 참고 성구 말고도 그의 또 다른 명시인 시편 제 23편에서..

    님께서는 내 적들이 보는 데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십니다.
    님은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바르십니다.
    나의 잔이 가득합니다! (5절/사역)

..라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도를 영적인 식객으로 초청하셔서 말씀 양식의 테이블로 이끄시고, (고대 유대 가정 식습이 그랬듯) 성령의 기름으로 손님을 우대하시며, 우리의 잔을 생명수와 보혈의 포도주로 채우셔서, 우리를 배불리시고 삶을 풍요롭게 하신다는 그림 같은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床)은 여기서 일차적이고, 위주가 되어 있음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자,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도 소중하고 중차대함을 아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삶 속에 실천하냐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눈 앞 식탁 위 그릇에 놓인 생명의 빵임을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갖다 먹고 어떻게 소화시키냐는 문제이겠죠.

잠언은, 게으른 사람은 (음식) 그릇에 손을 파묻다시피 하고도 입으로 도로 가져 가길 귀찮아 한다(19'24, 26'15 사역)고 두 번 지적합니다. 성경 말씀을 늘 바로 곁에 두고도 게을러서 읽지를 않는 우리의 모습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 게으름에서 탈출하는 길은 지금 바로 성경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 먹거리를 제가 찾아 먹는 길입니다.

다빋은 하나님의 말씀이 벌집에서 뚝뚝 듣는 '송이꿀'처럼 달다고 말합니다(시 19'10b).
선한 말씀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답니다(잠언 16'24).
이런 말은 주로 구약 율법의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겐 자칫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그 율법들이 다빋 등 구약인들에게 어쩌면 그리도 달디달게 느껴졌을까요?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을 얼마만큼 사랑해도 되는 걸까요?
다빋은 황금 곧 다량의 순금보다 더 흠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정말, 우리는 많은 양의 순금보다 성경 말씀을 더 사랑하는지요? 이것은 "아니..? 나한테 순금이 조금만 있어도 성경책을 수 백 권 살 수 있는데요!"라는 생각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위의 말씀을 좀 실감나게 풀이한다면, 여러 덩이의 반짝이는 24K 금괴를 내려다 보며 즐기는 시간보다 하나님 말씀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웬만한 사람은 그런 금덩이를 얻는다면, 아마도 몇 날을 밤낮 그것만 들여다 보면서도 성경 말씀은 나 몰라라 할 거 같군요. 실제로 그와 비슷한 어느 부부의 얘기를 들었거든요.

사실 내 모든 재산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하고 더 귀하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성경을 대하고 읽는 우리의 자세가 달라질 터입니다.
또 순금은 잃을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삶 속에서 "실종"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경제난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금보다 돈보다 더 앞세우고 사랑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보상을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그만큼 보상이 따른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빋도 "더욱이 주님의 종이 그것(말씀)들로 경고를 받고, 그것들을 지킴으로써 큰 상급이 있습니다"(11절)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대로 갚아 주시는 '미스타포도테스'(보상자)이시기 때문이죠! 할렐루야.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 없이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바른 자세로..
읽고, 듣고 
음미하고 묵상하고 
받아 들여서 믿고(!)
내 것으로 고백하면서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은 읽고 묵상할 뿐더러, 내 것으로 삼아 믿음으로 실천해야 함도 뜻합니다.
아무리 장시간 자주 읽고 정성 들여 깊이 묵상한다고 해도, 그렇게 한 말씀을 내 것으로 믿고 지켜 행하지 않는다면, 한낱 지식이나 무용지물에 불과하죠. 내 것이 아닌 객관적 진리는 대체로 '그림 속 떡'일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성경 진리를 내 것 아닌 객체로만 머물려 두는 데 신앙생활의 참 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언행을 하지요. 그런 사람에겐 구원은 왜 받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내가 아니라 남만 이롭게 해 주고 남만 득을 보는 복음은 내게 복된 소리는 아니지요. 나도 득을 볼 수 있고 남에게 나눠 줄 수 있어야 복된 소리,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믿음을 발동하여, 하나님 말씀의 약속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여 삶 속에 그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야죠. 믿음의 열매-그것이 곧 믿음에 따르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이 경제대란 시대에 시간을 아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면, 동시에 말라키서 3:10, 히브리서 7:8 등에 근거하여 십일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는 한 길이며, 하나님께 보상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신자가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면, 말 3'10을 하나님의 말씀, 복의 말씀으로 믿고 지키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믿고 확신한다면, 내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는 역사, 내 잔이 넘치는 역사 곧 성령의 권능과 충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영언(방언)의 표징과 개인 몫의 은사가 따르게 됩니다. '따른다'는 말은 사람마다 가만히 있는데도 다 저절로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본인이 믿고 의지로써 실천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절대주권'론을 믿는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든 뭐든 필요한 것을 위해 부르짖지 않고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 택한 사람들은 저절로 다 구원되고 혜택을 받는 줄 생각하기도 하지만,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게으름과 소극적/피동적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지요!
우리는 환난 날에 그 분께 부르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말씀을 신뢰하여 실천하는 한 방법입니다.

솔직히, 성경은 성령과 말씀을 거듭난 사람들이 제대로 깨달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권능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더 잘 깨닫는다는 것-당연한 것입니다. 거듭나야 성경이 비로소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가득채워짐)해야 더 잘 깨달아지는 것-물론입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열심히 영언을 하는 사람들이 더 영감을 받을 수 있음도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그의 영의 비밀을 아뢰기 때문입니다. 혹 그러고도 잘못되는 사람들은 그 권능과 은사와 영감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 교만해서이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깨닫되 바로 깨달아야 하며, 실천하되 바로 실천해야 합니다.
명작소설 '벤 허'("후르의 아들"이란 뜻)의 작가 루 월레스 장군이 본래 기독교를 반대하여 말살할 자료를 찾으며 도서관을 뒤지다가 오히려 성경 앞에 굴복했다는 유명한 얘기는 전설처럼 들립니다. 월레스는 불행히도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성경의 감화를 받고도, 잘못 실행한 사례로 꼽힐 만 합니다. 그런 사람에겐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역사를 "뒤집어" 살펴 보면,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위인들도 성경을 잘못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워싱턴은 거의 반평생 성경을 오해했고 말년까지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독자가 믿든 안 믿든, 링컨 역시 철저히 무신론적 자연신론자로서 교회를 멀리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정치 목적을 위해 적당히 기독교를 이용하거나 신자인 척 했지만, 참 신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되뇌지만, 성경은 읽고 묵상하되,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서로 저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다가 엉뚱하게도 이단 교리를 만들어 졸지에 교주가 되곤 합니다.
예컨대, 해럴드 캠핑(패밀리레이디오 대표) 같은 사람은 나이 90이 다 되도록 성경을 오래 '연구'해 왔고, 약 150개나 되는 미국 내 기독교 라디오 방송망을 통해 매일 국내외 각처에 여러 차례 방송되는 자신의 성경 공개 질의응답 프로그램인 '오픈 포럼'과 바이블스터디 등을 통해, 마치 자신이 성경 지식에 가장 밝은 양 행세합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1994년 9월 중순을 지상종말처럼 예언했다가 불발하자, 올해 5월 21일 휴거와 심판날이, 10월에 종말이 온다고 다시 떠벌이고 있습니다. 

캠핑은 오리게네스나 스베덴보리처럼 성경을 온통 상징과 은유로, 풍유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숫자에다 상징을 부여하여 '숫자놀이'를 해 왔습니다.
그가 이토록 성경을 아무리 오래 읽고 연구한들 단 한 두 성구(마르코스복음서=마가 13'32,33; 테살로니카A서=살전 5'1-3)조차도 믿으려 하질 않는데, 어떻게 제대로 연구했다고나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연구했다면서 오히려 성경을 뒤틀고 진리를 뒤집어, 딴 복음을 전하는 이런 사람에겐 상과 복이 아니라 저주가 있을 터입니다.


성경을 바로 잘 깨닫는 최선의 방법은 성구를 본문 자체는 물론, 문맥과 관련 성구로써 풀어 해석하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법정 소송을 위해선 반드시 두 세 증인이 필요했듯, 한 성구를 뒷받침하는 여러 성구들이 으레 있기 마련이죠.
그래서 내용이 요란하고 값비싼 주해성경보다는 질 좋은 관주 성경이 더 필요합니다. 성구 본문 자체와 주변 문맥, 그리고 관련 구절 등으로 시야를 넓혀 나가다가도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야 좋습니다. 너무 직설적으로 풀어도 안 될 때가 있고, 너무 은유적으로 해석해도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구 해석은 참 조심할 일입니다(페트로B=벧후 1'20,21).

성경 묵상 특히 정독을 할 때는, 한 성구를 갖고 깨닫기 위해 밤새 몸부림치며 마음의 샛별이 뜨기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앞 성구 19절). 그러나, 자기 딴엔 '샛별'이 떴다고 설레발을 치고 법석을 떨며 나다니다 자칫 문제 인사가 되는 예도 흔합니다. 이것은 관련 성구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서, 또는 되레 관련 성구를 잘못 적용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예가 강단에서 아주 흔합니다.


깨달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고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티엘티에 다양한 관련 글이 있지만, 우리에겐 구구한 별도의 '신앙고백서'보다 더, 성경 말씀 전체를 있는 그대로 믿고 시인/고백/선언할 필요가 더 있습니다.
그러려면, 중요한 말씀은 늘 입(입술과 혀!)으로 선포할 필요가 있지요. 사람이란 입술의 열매로 살기 때문이지요. 신자의 입엔 복과 저주를 가름할 큰 권능이 있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할 때는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큰 권능이 있는 혀와 입술에다 하나님의 말씀까지 담으면, 제대로 큰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정적인 말을 고백하면, 부정적 결과가 나타날 뿐입니다.
(이것은 결코 뉴에이지적인 무조건 긍정철학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은 성경 말씀 실천이라면 으레 도덕/윤리 실천 정도를 말하는 차원으로 받아 들이기가 쉽지요.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대로, 성경의 말씀에다 믿음을 발동하고, 믿음을 화합하기도 해야 하고, 성령님의 권능으로 파울이 말한 바 아홉 가지 영적인 열매, 또는 페트로가 말한 신적인 성품을 이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두가 성령님의 권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종교 생활이나 인격 도야가 아닙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실천하는 생활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은 세상 차원의 도덕이 아니라..성령의 권능을 통한 성령의 열매 맺기도 가르치시지만, 그보다도 더 수많은 믿음의 도전을 주십니다. 특히 권능/신유/부활 등의 이적을 갖고 "그대의 믿음이 크다", "그대 믿음이 그대를 구했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그대들의 믿음이 어디 있는가?"라고 계속 선언하시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무수한 이적과 기사(奇事)들을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격도야 교과서 정도로 이해하고 그런 차원에서 날마다 그럭저럭 지난다면, "그대의 믿음이 어디 있나?"라는 똑 같은 물음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터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왜 합니까?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삶 속에서의 응답을 갈망하는 것이지, 기도는 결코 명상이 아닙니다! 말씀 묵상도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 들이는 차원이지, 결코 명상이 아니지요!

말씀을 '명상'이나 하고, 고차원적인(?) '윤리' 실천이나 하고 따지는 것을 참 기독교로 이해한다면, 대단히 잘못된 시각이고 오해이자 착각이지 올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성령의 권능으로 행하는 도리입니다! 도덕 윤리 실천도 성령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세상적 차원에 그칠 뿐입니다. 사람이 제 힘으로 하나님 차원의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일부 기독교인들이 존중해 온 알버트 슈바이처, 헬렌 켈러, 마틴 루터 킹 2세, 테레사 수녀, 헨리 나웬..등 '명사'들은 모두 세속적 휴머니즘을 아가페 사랑으로 착각한 사람들이며, 그들에게 분별 없이 찬사를 던지는 사람들도 대동소이한 무리이기가 쉽습니다. 이 명사들이 진정 거듭난 흔적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서는 갓 거듭난 초신자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 거듭나고, 성령의 권능과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참 아가페를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 "그대 믿음이 어디 있나?"라는 물음을 되도록 덜 들을 수 있어야 좋습니다. 그만큼, 믿음 발동을 통한 말씀 실천이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은 또 검증과 분별의 '필터링'에 요긴하게 활용됩니다. 또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비진리를 진리인 성경 말씀이 아닌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겠나요?! 그래서 우리는 항시 성경 진리에 밝아야 하고 그 말씀이 내 맘 속에 머물 수 있게, 늘 자주 묵상하고 나의 것으로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야 꼭 필요할 때 적절히 분별과 검증에도 내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대의 베레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런가?" 하는 자세로 성경을 부단히 상고(詳考)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뭐든, 교계에서 잘 돌아간다고 해서, "다 그런 거야,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자세를 가진다면, 교계는 삽시간에 비진리의 암흑천지로 화하고 말 터입니다! 그 결과의 하나가 오늘날 비진리로 검붉게 물들어 가는 맄 워런(릭 워렌)의 목적영성권 아닐까요?

우리는 진리로 비진리를 분별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이것이 과연 그런가?" 하고 성경 말씀으로 따져 봐야 합니다. 이건 불신이 아니라 신자로서 당연한 태도입니다! 성경 말씀이 오직 참된 진리인 줄 믿기에 그 말씀으로 비진리 여부를 따져 확인하는 겁니다. "무조건 긍정!", "무조건 환영!", "무조건 수용!", "무조건 사랑으로 다 덮어 가려 주자!" 따위가 참 기독교 정신 내지 참 크리스천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와 사랑의 합일체인 성경은 그런 생각을 지지해 주지 않습니다.


티엘티 식구/독자들은..

날마다 성경을 듣고 읽고 묵상하되,
그 말씀을 믿고, 고백하고 선포하여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기를~

주 예수 크리스토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