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며칠째 날씨가 찌부둥 하고 밤새 요란한 바람소리가 그치질 않더니 이윽고 폭우가 퍼붓는다. 딱총 소리 나듯 길바닥과 차를 내리치는 소리에 밖을 보니 꽤 큰 싸이즈의 우박도 덩달아 쏟아져 내린다.
서 있는 나무마다 다 뽑힐 듯 거센 바람에 지탱을 못하는 자세다.
다행히 얼마 후 광풍의 횡포가 줄고 빗줄기도 약해져 식구들이 무사히 귀가를 했다.
그날 있었던 일에 관한 한동안의 수다가 그치고 저녁 먹을 무렵, 남편이 갑자기 뭔가가 생각이 났는지 후다닥 움직인다.
"다 죽었어!" 하는 그의 외침이 들린다.
가드닝의 대가인 윗집의 팀(Tim)에게 전수 받아 난생 처음 우리 집 포치(porch)에 여러 종류의 모종이 자리를 잡고, 팀이 준 희귀종 토마토도 잘 자라고 있어 아주 뿌듯해 하던 남편이다.
나보고 물 좀 주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무심하게 "they're your babies." 하며 당연히 나도 물 주는 것을 잊어 버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대던 나도 “다 죽었다” 라는 그의 탄식에 “설마…!” 하며 순간 어쩔 수 없는 허무감에 휩싸인다.
씨를 뿌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싹이 나오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하며 정성껏 물을 주며 언젠가 우리의 먹거리로 상에 오를 날을 기대하며 돌보던 그의 ‘베이비'들이 거센 비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말았다.
안으로 들여다 놨어야 하는데 전혀 생각 못 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비바람이 몰려 와 위태위태한 지경에 이를 때가 적지 않다. 사람이기에 인생 다반사가 사람으로 인한 문제, 어려움, 그리고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가슴 아픈 수 많은 사연들 중 유독 내가 힘들어하는 사연은 깨어지는 가정과 여기에 연루된 남녀의 이야기다.
드물게 날씨 좋은 독일에서의 어느 날.
수지는 야외 카페에 앉아, 얼마 있으면 떠나는 나와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항상 밝고 예의 바르며 똑똑해 보이는 그녀와 나는 오가며 지나치다 잠시 앉아 담소하기도 하고 인사만 하고 지날 적도 있었다. 친근감은 있으나 서로에 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는 사이다.
이렇게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다. 한국의 부모님, 독일에서의 삶, 아이들 이야기가 자신의 깨진 가정 이야기로 흘러갔다. 철저하게 남편을 신뢰하며 살던 그녀에게 남편의 외도는 그녀가 설 자리를 없게 만들었다.
그것도 타국에서 취업할 기술도 없는 그녀가 두 어린 자녀를 혼자 키우며 살아야 했던 시절을 이미 다 지난 일이라 그런지, 편안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오히려 웃는 표정으로 들려 준다.
오히려 그녀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나는, 아무리 지나간 옛 일일지라도 그녀가 겪었을 아픔이 어쩌면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을 고통의 흔적이 짐작되어설까.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른다. 아마도 지금 생각해 보면 예상치 않은 내 눈물 바람에 수지는 더 웃으면서 얘기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남녀를 평등하지만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그 누구에게도 자명한 사실이다. 창조하신 방법조차도 다르게 남녀는 다르다. 너무 판이하게 다르므로 서로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야 같이 온전해지는 관계다. 자녀가 엄마와 아빠의 사랑과 관심이 모두 필요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좋은 결혼생활을 위해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알아야 한다" 라는 전제 아래 수도 없는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고 또 읽힌다. 그럼에도 남녀의 관계와 가정은 항상 위태롭다. 그리고 쉽게도 깨진다. 아니면 지옥이 따로 없는 듯이 느껴질 만큼 남녀 관계는 사랑과 전쟁의 관계가 되기도 한다.
현대인에게 바람직한 여성의 이미지란 무척 다양하지만 그 중 수퍼맨 같이 하늘을 날며 시시곳곳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는 수퍼우먼이 먼저 떠오른다.
여성 자신도 남녀 동등을 주장하며 남자들과 같이 전투병이 될 수 있다고 기회를 요구하기도 하고 남성 전용이던 기업의 유능한 CEO 도 되며 각처 요소에서 커리어 우먼의 활약이 크다. 많은 여성이 자녀양육도 아내의 역할도 사회생활도 그 어느 하나 기울지 않고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퍼우먼이 따로 없다.
가정에서도 아내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남녀가 함께 한 가정을 이루는 팀의 개념보다는 나의 권한과 권리 주장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 한다. “오늘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나?”라고 반문하는 행위 중심의 사고도 만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눈부신 활약상이나 개인 플레이 마저도 여성의 근본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성경은 말한다.
상대적으로 연약하다.
여성이 남성보다 연약함 이란 어떤 의미일까?
육체적인 연약함은 굳이 일러 주지 않아도 두 말 할 나위 없이 만인 주지의 사실이지만 단지 체격의 왜소함과 힘이 부족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성은 공간 감각(spatial concept)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보고가 있다. 거리나 공간의 인식이 본능적으로 약하다. 단적인 예로 차를 타고 다니거나 운전을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는 이유도 그 하나이다. 파킹이 어려운 이유도 설명이 된다.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입체감각이 요구되는 엔지니어나 건축설계자로 여성 진출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된다.
그래서인지 많은 여성들은 어떤 상황이나 문제점을 볼 때 거시적이기 보다는 미시적이어서 세미한 부분에 주로 집중한다. 자연히, 해결책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단면은 리더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계, 기업체나 군조직 기타 어느 조직체의 리더는 어느 일부분에 집착하는 세밀함 보다는 조직의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흐름을 판단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문제 발단 시 정확한 문제 파악 후에는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리더쉽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큰 그림을 보는 능력의 리더가 없는 회의나 조직에서는 문제의 해결책보다는 문제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의 거론이 다시 되풀이되거나 문제가 핵심 이상으로 부풀어져 결국은 문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해결책에 이르는 진전이 없다.
이런 소질과 능력이 요구되는 분야의 리더로 여성이 소수인 이유가 설명이 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훨씬 감성적인 것도 여성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이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느낌에 좌우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뒷받침 할 만한 사실에 근거한 판단보다는 무조건 신뢰하거나 믿는 경향이 많다.
인류의 첫 여인 이브가 먼저 유혹에 넘어간 이유 또한 이게 아닐까?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보다 4배나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한다. 수다는 여성의 전용물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여자가 교회에서 본능의 결 대로 하지 말고 잠잠할 것을 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베드로 또한 여자의 아름다움이 온유하고 평온한 (조용한) 심령에 있다고 말한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듣기도 잘 한다고 보면 된다. 들으면서 말하고 싶은 충동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부분적으로 듣고 부분적인 것을 전부인 양 믿고 추측성의 말을 사실인 양 말 할 때 생기는 문제는 걷잡을 수 없다.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불 번져 나가듯 핵심과는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오해와 이슈를 만들어 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곳으로 문제가 확산되어 많은 상처를 남긴다.
혹시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교회 안에서 여성이 잠잠할 것을 요구하지 않나 잠시 생각해 본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 (베드로 전서 3:3)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 외모의 치장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만큼 가꾸고 치장하여 겉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또한 여자의 본능이요 관심사다.
하지만 외모에 지나치게 치중하다 보면, 자연히 내적인 성숙함과 아름다움에는 소홀하거나 가치를 두지 않는다.
결국은 물질 만능주의로, 또는 보이는 것만 보려 하고 가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보이려 하는 형식주의로 허래 허식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정착하기도 한다.
결국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는 것은 말씀이 안 가르쳐 주어도 알아지는 진리다.
그러나 빨리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에 전혀 영향력 없는 무미 건조한 삶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거짓되고 헛된 것에 쉽게 동화될 수 있어 더 연약한 가 보다.
맞는 말이다. 여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이미 연약하게 지음 받았다. 당연히 돕는 배필인 아내의 자리도 연약한 자리다. 그래서 연약함을 부인하고 남자와 경쟁하는 에너지의 소모보다는 겸허하게 시인할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모델로 보여 주시는 이상적인 가정과 남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타고난 연약함이 한계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대신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하여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섬기며 내 인생 여정 어느 시점마다 나와 맞닿아 나의 이웃이 되는 그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필요한 용기와 지혜와 사랑의 향기가 될 수 있겠나?
“너는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 (베드로전서 3:4)
먼저 무엇이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인지 알아야 한다.
하기야 분명히 '정크'인데도 끌어 안고 사는 너도 나도의 모습이 특히 물질 문명시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사람이 값지다 하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우리 아이의 어릴 적부터 홈스쿨링을 한 나는 아이들 책을 유난히 좋아한다. 어쩌다 보니 어떤 책이 가치가 있는 책인지도 저절로 알아졌다. 절판된 책들이지만 헌 책방이나 중고품 가게 또는 도서관 책 세일에 나타나는 책을 나는 금방 알아 본다.
처음에는 책에 치여 눈을 어디가 두어야 할지 몰라 빨리 분별을 못했으나 계속된 반복으로 눈이 훈련되다 보니 어느 덧 한번 훑어 보기만 해도 냉큼 알아 챈다. 이렇게 내 눈에 딱 걸려 든 책들은 나에게 많은 기쁨을 안겨다 준다.
어쩜 하나님 앞에 값진 것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분별하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속단하기 전에 수 없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중 하나님께서 값지다고 값을 매기신 것을 분별하여 아닌 것은 과감히 버리는 결단도 있어야겠다.
분명 보이려고 치장하는 외모의 아름다운 단장이 아니라 마음에 숨은 사람으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할 것을 성경은 말한다.
썩지 않을 것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아름다워지려는 노력과 경건의 훈련으로 우리 속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값진 것을 만들어 간다면...
연약하나 또한 분별하는 지혜로 우리 안팎에 항상 있는, 물질에 대한 집착과 가진 것을 자랑하고 싶은 어리석음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는 값진 여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가 있는 귀한 것을 하나씩 알아 가고 이것이 내 것이 되어 갈 때 느끼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가치 있다는 그 무엇이 주는 일시적인 기쁨과는 견줄 수 없다.
그리고 어디다 우리의 소망을 둘 것인지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베드로전서 3:5)
나 중심..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다.
남편과 자식, 내가 이루어 놓은 이 땅의 삶에다 둔, 일변하는 소망은 우리를 더 연약하게 만들어 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미 거룩해진 여성에게는 가정에서 남녀 사이에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쉽에 순종하는 행위 있는 믿음의 표현이 아름다운 단장이다.
순종, 복종…그리 달갑지 않은 용어들이다.
언뜻 이 언어들과 연상되는 인간관계란 평등하지 않고 자유마저도 빼앗긴 주종 관계이다. 특히 남편에게 순종하라…복종하라…는 많은 현대여성에게 저항감을 주고도 남는다.
언급만 돼도 반항하게 하고 숨 막히게 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니…?
과연 하나님은 남성 위주의 권위와 아내를 향하여 마구 휘두를 수 있는 남성 우월주의를 허락 하셨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을 말씀을 오픈 된 마음으로 잘 살피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남편에게 허락하고 맡기신 리더쉽은 조건이 있는 리더쉽이다.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과 같이…그리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전제가 있는 리더쉽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하나님께서 더 연약한 그릇을 위해 예비하신 것은 아내가 사랑받는 것이요 귀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를 억 만 가지 굴레와 눌림에서 자유롭게 하셨다. 이 사랑을 맛보고 아는 우리는 그의 말씀 중 깨달아진 것은 순종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대신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다. 생명을 내 놓으시기까지 사랑한 사랑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신 긍휼의 사랑이다.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끊임 없이 돌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불변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 안에는 참된 쉼이 있다.
예수님이 친히 보여 주신 사랑을 본으로 아내를 사랑하며 가정을 리드할 것을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명하셨다. 이런 사랑의 리더쉽에 저항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요구하는 아내가 있을 수 있겠나?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에 세우신 리더쉽은 무조건 권위와 권력 그리고 특정인의 권한 남용이 아니다. 가정의 구성인인 아내와 자녀가 두려워 굴복하는 리더쉽은 더욱이 아니다.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WWJD: What would Jesus do?)라는 말이 나돌 듯, 길이요 진리이신 주님은, 그분에게 접목돼 있는 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을 닮은 이기적이지 않는 사랑이 표현되는 리더쉽이기에 아내의 순종을 또한 명하셨다.
본래 연약하게 지음을 받았을지라도, 목자처럼 사랑으로 이끄는 리더쉽에 따르고 존중하는 성숙한 믿음의 아내가 세상의 반짝거리는 보석보다 더 귀하게 여김 받을 때 진정한 돕는 배필의 역할 또한 가능해진다. 아낌 없이 주는 헌신으로 아내의 삶은 더 풍성해진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 (잠언 31:25)
연약하나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강해져서 쉽게 놀라고 두려워하기보다는 후일을 향하여 웃을 수 있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입는 지혜로운 아내요 엄마로 내게 맡기신 가장 작은 일인 나의 가정을 잘 돌보는 책임을 다할 때 더 많은 것을 맡기신다.
연약한 그릇이지만, 칭찬 받는 지혜롭고 명철한 여인이 되게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연약하나 남편을 적절하게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이렇게 남편의 부족함이 채워질 때 가정의 머리가 되는 리더쉽을 감당하고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남편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듯 사람의 마음은 말로만 얻지 못한다.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남편일지라도 말이 아닌 행실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일씀이 우리 앞에 있듯이,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여 말로 인한 실수와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마음을 두다 보니 불필요한 것을 듣고 이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연약함을 알기에 절제하는 것을 배우는 지혜로운 아내로 우리를 단련하신다.
그리고 설사 누군가가 우리 집의 비바람에 꺾인 모종과 토마토 같이 보호되지 못하고 깨어진 가정 가운데 있을지라도, 수지의 스토리가 또 다른 누군가의 스토리 일지라도, 여자는 연약해 보이고 연약한 그릇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연약하지 않다.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같이 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팔이 ‘더 연약한 그릇’을 붙잡으시고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수지도 이런 주님의 강한 팔에 의지할 수 있어서 그녀의 모습이 편안한가 보다.
악한 자의 불화살을 소멸하는 담대한 믿음의 여인으로 능력과 존귀로 옷을 입고 훗날을 향하여 웃을 수 있다. 영원한 곳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거센 비바람 가운데도 버틸 수 있다.
하나님 앞에 값진 것들로 자신의 속사람을 단장하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여 남편을 적절히 돕는 배필로 그의 리더쉽을 신뢰하고 따를 때, 연약하나 귀하게 여김을 받고 사랑 받는 아내의 풍성한 삶이 충분히 상상된다.
그리고 연약한 모습보다는 믿음과 강인함 그리고 존귀함으로 옷을 입고 단장하는 아름다운 여인과 그녀의 가정을 상상해 본다.
설사 죽는 날까지 이런 모습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흔히 말하듯 작심삼일이 고작일지라도…, 수백 번, 수천 번 아니 그 이상의 작심삼일이 모여 성경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내게서도 묻어 날 수 있다면……
한 번 소망해 본다.
아~! 너무나 아득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간절해진다.
'남녀.가정.결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끝내주는" 칠면조 조리법(뉴하우스) (26) | 2008.11.26 |
---|---|
취학 전 어린이의 정체성과 훈련 (뉴하우스) (2) | 2008.10.20 |
부모를 떠나서 (뉴하우스) (0) | 2008.06.18 |
자녀교육에도 좁은 문은 선택하십시오 (세운돌) (2) | 2008.05.31 |
부모는 아이들과 놀아 줘야 (4) | 2008.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