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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정.결혼

부모를 떠나서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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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시티홀(City Hall)에서 선서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내일이면 결혼할 신부감이, 혼인신고를 하러 시청에 다녀 와서 내 귀에 대고 한 말이다.

스트레스가 가득한 그녀.
아무리 웃으면서 최선을 다해도, 결혼식 준비에 바쁘다 못해 지쳐 만사가 귀찮은 듯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6월(유월)은 너도 나도 결혼하고 싶어하는 가장 인기 있는 달이다.
June은 로마 신화에서 결혼의 여신 유노(Juno)에서 딴 이름.
따라서 6월에 결혼을 하면 행복한 신혼 생활의 복이 따른다는 전설에 따라 소위 ‘June  Bride’(유월 신부)가 되고 싶어하는 신부감들이 무척 많다.

나라마다 풍습이 다르고 다른 문화권에 따라 결혼에 대한 인식과 전통도 다르다.

'지붕 위의 악사'(Fiddler on the Roof)에서 Tevye가 “tradition”, “tradition" 외쳐대던 모습이 말해 주듯 급변하는 이 시대에도 나름의 전통과 원하는 바가 결혼이라는 예식을 두고도 많이 작용한다.

서구식처럼 신부가 결혼식의 주인공이라서 대개는 신부가 원하는 식으로 주도되는 결혼식도 있고, 동양에서와 같이 집안의 행사로 취급되어 부모가 원하는 쪽, 예식 행위가 더 중요시되기도 한다. 

미국서 사는 한국인들의 혼례식 또한 아주 재미 있는 양상을 띤다.
서구적인 것에 노출되고 영향을 받은 자녀와 한국적인 것에 익숙해져 있는 부모 세대와의 차이가 빚어내는 결혼식 날에 대한 오해와 섭섭함이 얽히고 설켜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보았다. 

아들의 ‘신랑 입장’ 을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
그러나, 미국식과 한국식의 짬뽕을 원하지 않는 당사자들.
하객의 숫자대로 청구하는 피로연에 RSVP 없이 불청객까지 대동하고 나타나는 친지들.
장소가 협소해 더 넘을 수 없는 하객의 숫자를 맞추느라 꼭 초대해야 할 사람을 잊은 경우.
식구 중심으로 조촐하게 하는 결혼식 초대장에서 누락돼 섭섭해 하는 많은 사람들.

재미있는 사연들이 줄을 잇는다.

결혼식은 누구나 자신의 형편과 여건에 맞추어 이왕이면 나름대로 취향도 맘껏 살려서 아름답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경배로 드려지는 예식이면 더 할 나위 없이 좋겠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결혼식이다.

신혼 뉴스와 초대장을 받고는 입고 갈 옷 걱정에 다이어트를 해서 몸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둥 초대된 손님들마저도 주연은 아니래도 조연쯤은 되려는 관심이 많이 표명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식절차며 드레스며 장소며 날씨며 음식이며… 신경 써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모두가 잊어선 안되는 것이 있다. 새로 가정을 이루는 커플이 이날 결혼예식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아무리 자녀를 잘 키워 결혼시키기 아까워 하는 부모라도 이제는 자녀의 결혼이 새로운 가정의 출발임을 인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이 날은 내 아들과 딸이 부모를 떠나야 하는 날이다.
부모는 이들을 기꺼이 축복해 주고 떠나 보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둘의 결혼은 부모의 삶의 또 다른 연장이 아니다.
결혼하는 남녀를 중심으로 새로운 가정이 태어나고 둘 중심의 새로운 울타리가 생기는 날이다. 유교 사상이 깊이 깔린 한국인의 정서냐, 아니면 뿌리도 깊이도 효도 모르는 개인적인 미국식의 사상이냐를 논할 일이 아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세기 2:24)

성경의 가르침이 가장 자연스럽고 모두가 편안하게 수용해야 하는 유일한 결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요 인식이다.

가정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개의 가정을 주신다.

하나는 내가 선택권 없이 태어나는 나의 부모가 처음 이룬 가정이다.
내가 양육 받고 자라나는 가정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선택해서 결혼을 통해 이루는 나의 가정이다.
그래서 결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 가정의 탄생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새로운 언약이다.

설사 나의 첫 가정은 그리 행복한 가정이 아닐지라도 나의 두 번째 가정, 내가 선택해서 이루는 가정은 얼마든지 나의 첫 가정과는 다를 수 있다. 얼마든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다. 

이렇게 행복하기 위한 새 가정의 출발은 심각한 책임과 의무를 동반한다.   

상식적으로 남의 가정에 가서 감 나와라 대추 나와라 하며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의 가정에서 주인 노릇하며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하는 이도 있을 수 없다.
용납되는 행동과 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녀의 새로운 가정에 대한 무례함과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이 당연시 되거나 정당화 되기도 한다. 부모가 자녀의 가정에 하는 것은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탁 받지 않은 배려는 상대방에게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부담으로 다가 온다.

못 미더워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믿어 주는 것이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며 축복이다. 그들의 성향과 특성을 존중하고 그들만의 생각을 그들의 삶과 가정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는 너그러운 축복이 될 때 부모에게는 큰 기쁨이 선물로 주어진다.

이들의 가정을 또 새 가정의 울타리를 인정할 때 얻어지는 기쁨이다. 

“곱게 기른 딸을 보내 주셔셔 감사 합니다” 

“집집마다 다르니까 그 댁에 맞추어서 또 배워야지요.”

양쪽 집안의 어른들이 하시는 대화가 내 귀에 들린다.

결혼이 가정과 가정이 맺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집안 대대로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정은 한 식구가 "늘고" 다른 가정은 한 자녀를 "빼앗긴다"는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다. 

이런 사고가 아직도 만연하다 보니 자연히 힘의 대결로 치닫고 우리 가정에 들어온 새 식구와의 마찰이 많은 가정사의 주된 소재가 된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모시는 믿음의 가정 그리고 따뜻하고 사랑이 있는 가정의 모습은 아니다. 

결혼과 더불어 부모는 자녀를 떠나 보내야 하고 결혼하는 남녀는 당연히 부모를 떠나야 한다.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에배소서 5:31)

남녀가 부모를 떠나는 것은 결혼 전부터 하는 준비다. 이미 감정적으로 성숙하고 정신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싱글의 삶이 결혼으로 연결될 때 결혼생활  안에서도 역시 만족하며 행복하다. 반면, 아직 미성숙한 젊은 남녀가 도피 삼아 하는 결혼은 부모를 떠나는 결혼이 아니다.

자기 부모에게 잘 하는 여성을 장차 아내감으로 원한다는 많은 젊은 남성의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남성은 아직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새 가정에 대한 인식의 결여 때문이다. 그런 경우 말할 나위도 없이 서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고 심지어 가정이 파괴되기도 한다.

남편과 아내를 중심으로 하는 새 가정의 의무와 책임을, 부모를 떠나지 않고도 감당할 수 있을까? 미처 든든히 보호받지 못하던 가정의 울타리를 아무나 넘나들며 질서를 깨고 그 가정의 고유성과 다이내믹을 깬다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래서 남녀는 나의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각자의 부모를 떠나야 한다.

사도 바울의 말이 생각난다.

결혼한 남자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나뉘고, 결혼한 여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떡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남편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나뉜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뉘는 마음이 남편과 아내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양쪽 부모에게까지 또 그 외의 식구에게 까지 계속 나뉘다 보면 분요함 없이 주를 섬기기는 어렵다. 

그런데 울타리가 보호되지 않는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섬겨야 할 사람의 범위가 타당하지 않은 선까지 의무화 되어 사도 바울의 염려보다도 더 심각하게 진정 하나님을 섬겨야 할 시간, 하나님과 나에게만 할애돼야 할 시간조차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가정이나 안정감이 있어야 그 구성원인 식구들이 건강하게 활동한다.

그러면 이 안정감은 어디서 생기나?
가정을 이루는 남녀가 서로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남녀이기 앞서 한 인간이기 때문에 내가 갖는 나의 울타리가 존중될 때, 남녀가 같이 이루는 가정의 안정된 울타리가 형성된다.

가정의 울타리는 우리 식구만 재미있게 오손도손 잘 살겠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정의 가장 기본 단위인 한 개인의 존재와 인격이 안정감과 안전함을 느낄 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주는 헌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가치마저 존중이 안 되고 위치마저 항상 충돌과 대립에 노출되고 어떤 무차별한 공격에도 대비할 수도 없는 울타리 없는 무방비 상태라면 자신을 보호하느라 가정에 충실할 수 없게 된다. 기쁨으로 섬기는 나의 가정은 더는 아니다. 남자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여자는 아내와 엄마의 역할에 최선을 할 수 없다.
연로하신 부모님에게는 아직도 아들과 딸의 책임을 감당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생긴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가정은 끊임 없이 존중돼야 한다.
우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의 자녀를 양육한다. 양육하는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은 절대 무시될 수 없다. 좋은 집과 부유한 환경보다도 부모가 화목한 가정이 자녀에게 마련해 줄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고, 아이의 인격 성장에 가장 영향을 주는 요소이다. 그러나 울타리가 전혀 없거나 안전하지 못한 가정에서 화목한 부부가 있을 수 있겠나?  

남녀가 부모를 떠나지 않고는 가정다운 가정, 엄연한 울타리가 있는 독립된 가정을 이룰 수 없다. 이런 사이클은 반복되어 우리의 자녀에게도 가정의 중요함, 가정의 따뜻함이 있고, 언제고 돌아오고 싶은 내 집, 여유 있게 태엽을 풀 수 있는 평안함, 사랑하는 표현이 가득한 가정이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가정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 못하는 많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화목한 가정이다.

결혼의 테잎을 끊는 것이 행복 자체가 아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행복한 삶이 모두의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기분 좋게 하나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가정에 대한 성경적이고 근본적인 바른 이해가 있어야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는 우려를 범하지 않는다.
가정이  가정으로 존중 받고 각 가정의 울타리가 튼튼할 때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다. 행복한 가정에 행복한 자녀가 있고 그들도 자신들의 행복한 가정을 꿈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