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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시 80] 한국교회라는 포도나무

바탕본문: 시편 제80편


오늘은 마음의 이끌림에 따라 이 시편을 묵상합니다. 본 시는 다른 유명 시편들에 비해 그다지 자주 널리 다뤄지지는 않는 시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좌 옆의 '인자'(人子, Son of Man)에 관한 17절 단 한 절만 봐도, 중요한 메시아닠(Messianic) 시편들의 하나임에 틀림 없습니다. 먼저 본 시의 표제에 나타난 '아샆'이라는 인물에 관해 좀 알아 보죠. 아샆이라면, 다빋-슐로모 시대에 활약한 성전 음악인의 한 명입니다. 예투둔(에탄), 헤만과 함께 레빝 지족의 3계열을 따라 나뉘어 찬양으로 성전을 섬기던 악장/지휘자의 한 명입니다.
그런데 본 시의 내용을 보면 주로 포로시대를 다루고 있어, 과연 다빋-슐로모 시대의 음악인이 노래한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따라서 아샆 자신이기보다, 3계열 규약에 따라 포로시대 이후 훗날까지 섬긴 아샆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샆의 이름으로 된 시편들이 여러 개(시 73-83편) 있어 서로 대조해 볼 때, 본 시편은 훨씬 후대의 냄새가 납니다. 그 다음으로 표제에 포함된 '슈산님 에둩'이란 말은 '언약의 백합들(복수)'이란 뜻입니다. 시 제60편 표제(슈산 에둩, 곧 단수)와도 같습니다. 이것은 백합화 모양 또는 문양의 현악기 또는 관악기를 뜻한다거나 동명의 가락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의 악기들이 다 또렷한 한계가 있는 고만고만하게 비슷비슷한 악기들이어서, 특정 악기의 특정 음색이 필요했다기 보다 가락 설이 더 유력해 뵙니다. 이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요셒 족속 곧 에프라임/빈야민(베냐민)/메나쉐(므낫세) 등을 위하여 예호봐(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셔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습니다. 특히 얼핏 원망하는 듯 하지만, 하나님의 '온정 샘'을 자극하며 부르짖는 특유한 간구 방식이 나타납니다(4,5,12절). 그 다음(8-)..미쯔라임 출국(출애굽)시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과 그 역사 전체를 한 그루 포도나무로 은유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즉, 하나님이 미쯔라임에서 포도나무를 옮겨다 카나안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에 심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뿌리가 깊아 박혀 온 땅을 가득 채우고 그 그늘이 산들을 가려, 하나님의 백향목 같습니다. 그 가지는 바다까지 뻗어 나갔고, 넝쿨은 강들까지 미쳤습니다. 그런데 그만..농부인 주님이 심으신 그 포도나무 밭의 높고 든든한 담을 주님 스스로 헐어 버리셨습니다. 주님이 포도원에 실망하신 탓입니다. 그러자 포도원 곁 길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탐스런 포도를 마구 따 먹고 따 갑니다. 또 숲 속의 멧돼지들이 포도원을 마구 헤쳐 버리고 들짐승들이 포도송이를 움키거나 떨어진 포도를 주워 먹습니다. 참으로 황폐한 모습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울부짖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간구합니다. (우리에게로)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어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그러면서 시인은 다시 하나님의 온정 샘을 자극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 주님이 힘을 주신 가지들." -그것들이 불타고 베어지며 주님의 징벌로 망해갑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시어 과연 당신께서 옮겨 심으시고 여태 돌봐 오시며 튼실하게 기르신 그 포도나무, 당신께서 버리시고 거의 망하게 하신 그 포도나무를 다시 돌아보시게 됩니다. 참으로 예언적인 시이자, 성취된 시가 아닐 수 없지요. 놀랍게도 이 시는 비단 과거의 이스라엘-유다 뿐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교회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교회도 마치 예호봐 하나님이 심으신 한 그루 포도나무 같은 존재이죠. 이스라엘을 엑소더스-탈(脫) 미쯔라임-시키셨듯,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일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국교회라는 포도나무를 몸소 가꾸셨기에 그 뿌리가 깊이 박혀 온 한반도를 가득히 채우다시피 하고 그 영향력이 한국 사회에 크게 미쳤습니다. 한국이 이처럼 잘 살게 된 배경엔, 일찍이 조선을 개화시켜 문화화 한 주된 동인(動因)이었던 기독교의 힘이 컸지요. 중세 유럽도 게르만 족 같은 민족들이 초기의 야만성을 벗어나면서 급속도로 문명 사회가 됐고, 다른 대부분의 국가도 그랬습니다. 누구도 이 진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혹시 중국이나 인도나 일본이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잘 살지 않느냐고 보는 사람들은..그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교역 상대국가들이 어떤 나라들인지를 둘러 봐야 합니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세계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불과 1세기라는 단기간에, 작은 한반도 땅에 세계 최대급 교세와 교회 분포율을 이루었지요. 참으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은 존재입니다. 나뭇가지가 바다까지 길게 뻗쳐 나가듯, 포도나무 넝쿨이 자라 강물까지 미치듯, 한국교회의 복음과 힘은 멀리 바다 건너 해외에까지 널리 퍼져갔습니다. 한국 성도들이 가 보지 않은 나라, 한국 교회가 세워지지 않는 큰 나라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미국만 해도 약 4천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떤가요? 큰 교세와 부를 자랑 삼고, 대사회적/대정치적 관심 따위가 커지고 타협을 하더니 여지 없이 부패해지고, 근래엔 해외로부터 온갖 이상 영성을 받아 들여, 성경 말씀 대신 그런 것들을 진리로 삼지 않나요? 한국교회는, 과거 포도원 담처럼 그 순결을 지켜 주고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순수한 순교적 신앙을 점점 내 버리고, 이상 영성을 뿌리는 명사들을 불러 들이고 그들의 '명저'들을 탐독하며, 결국 한국교회의 '포도'를 몰래 몰래 아니 공공연히 따 먹게 내버려 두는 존재는 아닌지요? 이러니, 작고 간교한 여우떼가 포도원을 헐고, 숲속의 멧돼지들 같은 사나운 세력, 자생한 들짐승들이 한국교회를 점점 삼켜 가고, 안팎으로 좀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래도 정작 이런 비탄적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성장정체 상태의 원인을 깨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냥 학적인 다양한 분석/시도를 할 뿐입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요인의 하나는 이상영성의 침투입니다. 그것이 한국교회를 안팎으로 갉아 먹고 있습니다. 수많은 이상 영성 도서들이 한국 크리스천들의 서가를 메워 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런데도 대다수의 교인들, 성도들이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무서운 상황입니다. 이처럼 한국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적은 안팎에 널려 있습니다! 성부님은 진리의 하나님, 성자님은 진리의 말씀이시고,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경 진리가 아닌 이상영성을 선호하면서 참 성장과 성숙, 발전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시인의 기도처럼 하나님께 "돌아오소서!"라고 울부짖기 전,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요르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잠가서 나병에서 치유 받아 어린이 살결처럼 깨끗해진 나아만 장군처럼,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와 크리스토님의 보혈에 몸을 잠가 순결을 되찾아야 합니다. 오직 참되신 주님의 진리만이 우리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불 타고 벰을 당하고 주님의 징벌로 계속 망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요..? 그런 보장이 없습니다. 시인은 간청합니다. "님의 손을 님 오른쪽의 그 분 위에 얹으소서, 님께서 몸소 강하게 하신 인자님 위에!" 이 부분은 인자가 되신 성자님 곧 예수 크리스토님을 가리키는 메시아적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자님은 아버지께서 강하게 하시어 대속과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 보좌의 오른편에 계십니다. 권능이 충만하여 혁혁하고 강하신 그 분은 언젠가 조만간 세상과 악을 심판하시고 왕들의 왕, 주들의 주님으로 군림하실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유일한 길이 메시아이듯, 교회나 성도가 온전히 회복되는 길은 그 분만 의존하는 길뿐입니다. 교회의 참 힘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 분이지, 힘다운 다른 힘이 없습니다. 교회의 참 힘은 길/진리/생명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살 길은 진리로 돌아가는 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