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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메모리얼 데이에 (뉴하우스)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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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5월 네 번째 월요일을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로 지킨다.
미국판 현충일-조국과 우방국가를 지키던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희생을 기리는 날-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누리는 자유와 복을 얘기한다.
연휴라 바베큐 하며 노는 사람들로 공원은 가득 찬다.
이 집 저 집에서들 모여 오랜만에 친지들과 좋은 시간을 갖는다. 

미국은 지금도 전쟁 중이라 계속 군인들이 죽어 간다.
전시가 아닐 때라도 훈련 중 불의의 사고로 희생되곤 한다. 이런 삶의 단면은 군인인 남편 때문에 나로선 항상 가까이 피부로 느끼고 보는 냉엄한 현실이다.

내가 참석한 첫 메모리얼 서비스(기념식)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마침 남편이 속해 있는 부대의 군인이 훈련 중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채플 강대상 앞에 놓인 그의 영정 사진과 군화 그리고 긴 총대에 걸린 헬멧이 눈길을 끈다.

그가 속한 부대원들도 속속 들어 와 자리를 채운다. 가족들을 에스콧 해서 맨 앞 좌석에 앉힌다. 순서를 맡은 이들도 착석하고 마지막으로 국기를 앞세우고 군인들을 대동한 가장 높은 계급의 장군이 입장하자마자 서비스가 시작된다.

나라에 바친 헌신과 업적을 기리는 의미도 없진 않으나 메모리얼 사비스의 진정한 의미는 남은 식구와 그와 함께 소속된 부대의 동료를 위로하기 위한 의식이요 예배이다.

군인이 속했던 부대의 리더가 나와 호명(ceremonial roll call)을 한다. 몇 명의 선발된 부대원들이 각각 “Here, sir!" 하는 대답이 채플을 울린다.

이윽고 죽은 군인의 이름도 호명된다.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다.
두 번째 또 외친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세 번째도...이름을 부르는 이의 목소리조차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 재촉하는 다급한 목소리는 아니다. 역시 적막하다. 이렇게 많이 살아 있는 무리 가운데 그가 더는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맨 앞 줄에 앉은 가족들의 등 너머로 돌아 앉은 눈망울이 말똥말똥한 어린 아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것 같다. 아빠를 잃은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처진 어깨도, 남편을 일찍 잃은 아내의, 덤덤한 듯도 하고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 모르는 듯한 눈빛이 측은하다.

여러 차례 메모리얼 서비스에 참석해 본 나는 나 자신도 내가 측은히 여기는 그 군인의 아내가 앉은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아마도 남편을 군인으로 둔 많은 아내는 누구나 한 번쯤은 나와 같은 생각이 스쳐가지 싶다.

이라크 전쟁이 터지고 얼마 안 있어 새로운 곳에 이사한 지 겨우 17일이 남편과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시간 전부였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나의 남편도 파병되었다. 생명의 위협이 있는 위험한 곳에 간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과 초조함 보다는 가기 전의 준비 과정의 절차만으로도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사후 처리의 전반에 걸쳐 결정권을 내게 주는 파우어어브어토니(poa)와 생명보험 그리고 유언장은 살아 돌아 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는 사무 절차이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도 비상 시를 위해 챙겨 두어야 할 법적인 절차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쟁 시 라는 것이 이런 통상적인 절차마저 나에게는 심각한 현실로 다가 온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그 흔해 빠진 전화와 이메일도 안 된다. 정확히 어디쯤 있는지도 모른다. 적에게 노출될까 봐 가르쳐 주지 않는다. 얼마 후 날라 오는 편지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 된 소식을 전해 준다.

오래 전 가르치던 학생이 커서 해병대 장교가 되었다. 그도 일착으로 나가 불꽃 튀는 그 현장에 있었다. 우리가 생각이 났는지 다니러 왔다. 새로운 곳에 아직 정착이 안 된 나와 아이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기도해 주는 이들이 너무 고맙다. 걱정하지 말라는 전화해 주시는 아는 목사님들이 고마웠다.
아들아이와 시간을 보내 주겠다는 이웃이 고맙다. 말 없이 우리 잔디까지 깎아 주는 이웃의 젊은 청년이 참 고마웠다. 

그냥 전화 해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많은 사람들.
그 중에는 deck(뜰마루) 공사를 위해 말이 오가다 취소할 수 밖에 없던 미스터 힐리도 있다. 가끔식 전화를 해 오지만 공사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한다. 그냥 안부만 묻는다. 그도 내 얘기를 들어 주는 사람 중 하나다.

D.C. 에 있는 미 육군병원.
아들아이가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어 입원하고 있을 때다. 남편이 무사히 귀가한 후 딱 한 달 후다. 허벅지까지 양쪽 다리가 잘린 군인이 휠체어를 밀고 나타난다. 그리곤 무슨 검사를 받기 위해서인지 방으로 들어 간다. 얼마 후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차 보이는 여자 분이 여기저기 돌아 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하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를 단 번에 알아 차린다. 그리고 그녀의 핏기 없고 힘 없어 보이는 표정의 이유도 알 것 같다.

위내시경을 하려고 기다리는 우리 아이.
많이 아팠다. 병원에 20일쯤 있다가 퇴원해 다시 재입원했다.
그가 빨리 낫기를 바라며 지켜 보는 나의 아픔도 그녀의 아픔에 비해 너무나 작게 느껴진다.
새파랗게 젊은 청년. 아마도 18살에서 20살 사이인 것 같다. 그의 한 쪽 바지 가랭이가 너풀댄다. 목발을 짚고 병원 복도를 뛰다시피 성큼성큼 걸어 간다.
우리 아이는 14살이다. 아이의 현재의 고통이 불과 몇 살 위인, 앞날이 창창한 그 빡빡머리 청년의 두려움, 혼란스러움, 고통에 비하면 견딜 만 해 보인다.

창문 밖을 내다 보면 이 병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무관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 병원만 나가면 모든 게 정상이다. 전쟁의 상흔이 엿뵈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있는 쪽은 한 쪽 다리가 절단된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 한 동안은 서로를 보며 서로에게 위로가 안 될까 싶을 정도다.

드디어 남편이 집에 온다. 공항에서 기다리면서 간혹 사막용 군복을 입고 럭섹을 멘 군인을 보면 식구 같이 반갑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고 악수하고 말해 주고 싶다. 무사히 살아 돌아 와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

많이 그을긴 했으나 건강한 모습, 웃는 얼굴로 되돌아 온 남편이 고맙다.

정체도 모를 벌레에게 온 몸을 뜯겨 가려워 고생하던 하고 많던 날들은 잊혀 간다. 무거운 헬멧에 짓눌려 잘 일어나지 않던 머리도 다시 자라고 일어서기 시작한다. 화씨 120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땀에 푹푹 젖어 살던 그는 8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오히려 춥다고 한다. 또 다른 문명 문화에 약간의 적응이 필요하나 몸도 마음도 그의 영혼도 다 건강하다. 

미 육군병원에서 본 수심이 가득하던 그녀. 두 다리를 잃은 군인의 아내가 궁금하다.
나는 이렇게 웃는데 그녀는 웃을 수 있으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게는 지난 몇 개월이 이미 지나가고 잊혀 가는 세월로 들어섰는데 그녀는 계속 전쟁이 가져 온 아픔을 평생 눈앞에 보며 살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나의 아이는 회복이 되어 많이 아프던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데, 그 젊은 사병의 엄마는 어떤 심정일까? 그 청년은 의족을 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겠지? 그에게 자부심이 있을까? 희망과 꿈과 소망이 있을까? 아니면 많은 다른 군인들처럼 옆에서 죽어 가던 동료를 지켜 봐야 했던 그 기억으로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그와 그의 가족의 아픔과 고통이 전해져 온다. 빨리 시간이 지나 마음과 몸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도해 본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 온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각도 내 가족을 보는 눈도 변해 가고 있음을 알아 차린다.

물건의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또 사용자에 의해 정해진다. 많은 사람이 선호하면 좋은 물건이 되기도 한다. 가끔 나는 사람의 가치 또는 아름다움이란 어떻게 정해지는지 궁금하다.

“Beauty is in the eyes of beholder” 라는 말이 있듯이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을까?

그렇다면, 보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와 아름다움 그리고 그만이 발할 수 있는 빛의 색깔도 다양하다는 논리도 생길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맘이 놓이고 위로가 된다. 세상 모든 사람의 기준과 기대에 못 미쳐도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이 귀하고 아름답게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허벅지까지 잘린 남편을 그 아내의 눈이 그가 건장하던 때와 다름 없이 귀하고 세상에서 가장 잘 나고 멋 있는 남편으로 볼 수 있으니까. 비록 한 쪽 다리가 예전같이 온전하지 않아도 그 청년의 부모의 눈은 그 청년이 태어 나던 날과 다름 없이 사랑스럽고 대견한 아들로 볼 테니까. 좀 더 많은 사람이 이들을 귀하고 아름답게 보기로 작정하고 바라 보는 주관적인 눈을 갖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도 내 가족의 일원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을 배운다. 나를 위해서 무엇을 얼마만큼 해 주느냐에 따라 남편과 아내의 자격도 가치도 매겨지는 계산적인 눈보다는 또 얼마만큼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성과를 거두는가 하는 조건부적인 눈으로 아이를 보기보다는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동행하며 힘이 되어 주고 또 나를 나 되게 하는 내 가족을 너그러운 눈으로 보고 싶다. 

나는 혼자일 때 삶의 무게가 훨씬 무거운 것을 안다. 역시 혼자는 반 쪽일 수 밖에 없음을 나는 너무 잘 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을 피부로 느낀다.
그래서 나의 눈으로 보는 남편의 가치는 살아서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내게 소중하고 귀하다. 많은 여성의 로망이자 당당히 요구하는 가사 분담은 내게는 보너스다.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보너스에 불과하다. 기대도 안 한 보너스가 많이 지급되면 그만큼 더 감사할 뿐이다. 

아마도 나도 그를 영원히 잃거나 아니면 휠체어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 많은 부상 당한 군인들처럼 그도 그렇게 될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무사히 돌아온 그가 더 소중한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찾아 들어 온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하’  하고 깨달아지는 순간이 내게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다. 

Memorial Day를 맞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많은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나는 이런 자유를 누린다.

심지 않고는 거둘 수 없나 보다.
나의 영혼 구원과 자유를 위해 예수님도 피를 흘려 주셨다.
내가 누리는 영혼의 자유와 육신의 자유가 귀하다.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생각하며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