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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초컬릿-그 겉과 속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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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까르르~
그칠 줄 모르는 웃음과 연신 재잘되던 수다가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는 큼직한 사이즈의 러슬 스토버(Russell Stover) 초컬릿을 보는 순간 좀 가라앉는 듯하다.
내가 맡은 여자 고등학생들의 성경공부 시간이다. 

나는 이미 삼십 대에 돌입한, 갓난아기를 둔 엄마이자 결혼 초년생이다.
그리고 이 사춘기 여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결혼의 중요성을 가르치려는 심각하고 의욕 많은 교사다. 

돌아 보면 실로 웃음만 나지만, 나에게는 꼭 가르치고 인식시켜 주고 싶은 중대사였다. 그래서 모두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초컬릿 박스를 쳐다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하나씩 골라 먹되 안에 무슨 filling이 들어 있는지 알아 맞춰 보는 게임이에요."

다시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저마다 하나씩 dark 또는 milk chocolate 을 들고 안에 숨겨진 것이 무엇일까 궁리하느라 바쁘다. Coconut…peanut…raspberry, cream… 등등 맞출 듯 기세가 등등하지만 진작 한 입 깨물었을 때는 한결 같이 ‘오우, 노우~!’ 하며 다음 타자 역시 틀릴 것을 기대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간다. 

이렇게 주일 아침부터 아이들에게 초컬릿을 하나씩 먹여 놓은 나는...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짐작한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사람의 속에 진정 어떤 사람인지는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외모지상주의 시대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복이다. 그리고 외모로 서로 끌리도록 하나님은 남녀를 만드신 거 같다. 제 눈의 안경이 다 도수가 다를 뿐이지, 문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고심 안 할 수 없다. 

아무리 듣고 배운들 사람 보는 안목이 그리 쉽게 생기지는 않는다. 또 안목이 있은들 매번 이성적으로 정확히 따지고 가르고 쪼개기만 하고 살 순 없는 법이다. 누구나 판단이 흐려지거나 아예 서지를 않을 때가 많다. 많은 세월의 비바람을 맞은 후에도 그러하건만 이제 겨우 teenager인 저들 속에 무슨 안목이 있겠나?

그래서 더 가르쳐 주고 싶었다. 
많은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성들. 그들의 열정과 헌신, 강하고 뜨거워 보이는 신앙도 나름의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데까지는 연장이 안 되나 보다. 

나도 학생 시절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내 삶의 전부로 생각하고 무척 마음이 뜨거워져 식을 줄 모르던 때가 있었다. 그 열정이 마음에만 머물러서 문제였지만.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맘 속에 드는 의문이 있었다.
‘하나님은 결혼도 나의 인생 전반의 모든 생각과 결단도 간섭하시나?’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다면 ‘이젠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나?’ 하는 갈등과 함께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실망과 어딘지 모르게 편치 않은 마음, 손해 보는 듯한 기분,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서서히 몰려 온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는 데다 어쩌다 보니 신앙과 나의 삶의 현장과는 어느새 분리되어 있었다. 아니 나의 은혜받은 감격이 나의 머리 속 생각까지는 점령을 못 했던 것 같다.

주위의 안 믿는 남자들과 결혼만 잘 하는 친구들. 기막힌 스펙의 안 믿는 남자들과 나를 엮고자 하는 열성 집사님들은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도 남았다. 

이렇게 시작되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나의 짧디 짧은 젊은 날들을 참 길고도 외롭게 만드시는 듯 했다. 

나 자신 속에 진정 무엇이 자리잡아 나를 움직이는지 서서히 알아져 간다.
그리고 내 속을 꿰뚤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는 어떤 가식도 척함도 순진한 착각마저도 배겨 나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내가 나를 안다고 하는 것조차 아는 것이 아니며...
내가 좋은 거라 생각하는 것이 다 내게 합당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간다.

십자가 앞에 내 짐을 내려 놓는 것이 인생 막다른 골목에서 내게 강요되는 자포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나의 짐을 대신 져 주시고 나는 홀가분하게 하늘도 바라보고 길가의 꽃도 바라보며 지금까지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던 하나님과 그 지으신 세계를 마음에 품을 수 있게 하셨다.

이렇게 눈에는 안 보이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삶의 법칙까지 나는 배워 나갔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이 무엇인지를 나는 맛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time table 과 내가 원하는 timing 이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나의 생각을 초월해 내게 가장 합당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 가고 이렇게 나의 믿음의 분량도 아주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하고 추측하고 싶어 하고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 하지만 하나님만이 아시고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더우기 일생의 중대사인 자신의 배우자를 결정하는 일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냐” 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듣거나 말거나 어린 청소년 아이들에게,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가기 전에 가르쳐 주고 싶어 한 것이다.

설사 나는 남보다 더 기다려랴 할지라도…
설사 토끼 앞에 당근을 들고 유혹하는 이들이 나를 계속 push 하고 믿음을 돌이키려 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초조함과 강박감이 결단의 원인이 되어 안 믿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그 누구 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의 때를 믿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했다. 물론 엎어지고 넘어지며 다쳐 가며 배우기도 하겠지만.  

요즘은 추세가 그런지는 몰라도 그때 그 아이들이 나이 30을 훌쩍 넘기고도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마다 왠지 그때 그 초컬릿 때문에 그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찔금한다. 

다행히 그 중 하나가 결혼을 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와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그녀의 오랜 기다림도 믿음의 인내임을 잘 아는 나는 이렇게 지나간 옛 추억의 한 페이지를 꺼내 보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