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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첫 주급 받던 날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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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오늘은 아들아이가 첫 풀타임 일을 시작하는 날이다.
여름방학 동안 일하면 얼마의 수입이 들어온다는 것을 예상하곤 벌써 어디다 쓸 것인지 미리 다 정해 놓고 일도 하기 전부터 돈 벌 생각에 어지간히도 좋아한다. 

30여년 전, 지금 아들 나이와 비슷하던 무렵의 내 모습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뉴욕의 이스트 맨해튼 거리에서, 일을 끝낸 뒤 서브웨이로 걸어가며 눈물을 글썽이다가 끝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 못한다. 훌쩍거리노라니 온종일 서서 일하느라 아픈 다리와 발바닥의 아픔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 날이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내가 첫 주급을 받던 날이다.
손 안에 들려진 빳빳한 20불짜리 다섯 장이 하루 꼬박 12시간씩 6일 동안 일한 나의 첫 노동에 대한 보수다.
처음 받아 보는 주급.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수.
나의 아이처럼 차라리 나도 사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면 주급 받는 날 신 날 법도 했건만 난 그렇지 못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세탁소였다. 
Counter 보는 일, 세탁물을 분류하고 wrapping 하는 일을 종일 서서 하다 보니 발에는 항상 불이 나고 오른쪽 팔은 어깨 위로는 올릴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바깥의 더위와 스팀 press의 열기를 더하면 찜통 같던 세탁소 안에서 여름 동안의 나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일하는 세탁소를 드나드는 손님들은 자유로운데 나는 카운터 너머 반대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다. 누군가가 먹는 파란 사과의 싱그런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해도 나는 그 향기로운 냄새의 주인공을 찾아 나설 수 없다. 가끔 유난히 향기로운 사과 냄새가 나면 지금도 그때를 생각나게 만든다.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이 가게 안으로 마냥 쏟아져 들어 와도 나를 밖으로 불러 내지 못한다.

일이 끝나고 가게를 나설 때에야 겨우, 해지기 전 얼마 안 남은 하루의 끝자락을 맛보며 집으로 향한다.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서브웨이를 두 번씩 갈아 타고 12시간씩 일하고는 또 서브웨이를 두 번씩 갈아 타고 집에 가는 일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날은 왠지 100불이라는 돈의 가치가 전혀 나의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30여 년 전 100불은 지금으로선 적은 돈이 아니다. 뉴욕의 웬만한 아파트 렌트가 250-300불 정도이던 때니까. 아무리 들여다 보고 만져 봐도 돈의 가치를 손끝에 느낄 수 없다. 처음 내가 해 본 가장 힘든 일에 대한 대가 치고는 너무 허무할 뿐.
아낌 없이 쏟아 부은 나의 노력에 비해 20불 짜리 5장이 터무니 없이 작게 느껴지던 날이었다.

하루 12시간씩 종일 서서 일하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다.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던 내가 스스로 갸륵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든 일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니 내 손에 들려진 돈 100불이 내가 일하는 동안 내 속에 일어나는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그리고 생각의 변화가 반영되는 대가는 아니었다. 그만큼 나는 나의 전부를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쏟아 부었기에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환산될 수 없는, 나만이 그 가치를 아는 나의 첫 세상 경험이었나 보다. 

그날 눈물을 글썽이던 나는 절반은 서러움, 절반은 오늘도 해 냈다는 자부심이 두루 섞여 인생 첫 발을 내딛은 첫 일터에서의 체험이 100불이라는 돈의 가치와 맞바꿀 수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던...뉴욕 거리에서의 내 옛 모습이다.

흐르는 눈물이 신기하게도 자신을 약하게 만든 게 아니라, 헤쳐 나아가야 할 미지의 첩첩산중 같던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왠지 해 낼 만 하게 느껴진다. 이 나라 어느 곳에 나를 혼자 떨어뜨려 놓는다 해도 살아 갈 수 있을 듯한 자신감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운다. 그렇게 이 넓디넓은 미국 땅을 가슴 속에 안아 보게 되었다.

별 일이다.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일도 아닌데 나는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는 자신감에 갑자기 훌쩍 커버린 듯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듯한 장애물이 하나씩 허물어져 내리면서 앞이 보이는 것 같다.

부모님을 따라 뭣 모르고 따라온 미국에서의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같은 과목은 하면 할수록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과목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꾸역꾸역 올라 와 다 집어 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이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안에서 시작된다.

그리곤 항상 이겼다. 포기하지 않고.
그때나 지금이나 포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하면서 배웠던 무엇이 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한 것 같다. 아무리 공부가 어려워도 찜통 속 같던 세탁소에서의 중노동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하면서 발바닥에 불이 나고 주저 앉고 싶어도 자신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아무리 어려운 공부도 포기한다는 것이 자신을 포기하는 것 같아 무조건 해 내야 했었는지 모른다.

데려다 주는 사람 없어도 촌스런 이민 가방에 살림살이를 담아 그레이 하운드 고속버스를 타고 업스테이트에 있는 대학교에 가는 것 쯤은 익숙해진 나.
무거운 옷을 많이 들어야 했던 나에게는 이것도 해야 하면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랑 차로 온갖 것을 다 실어 오던 미국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창 밖을 유유자적하게 거니던 사람들이 누리던 여유가 부러웠지만 내게 주어진 게 아닌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누릴 수 없는 것은 단념하고 나 혼자 다 알아서 하는 데 익숙해져 간다. 

당시는 한국 학생이 학교 전체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적었다.
주위의 친구나 교회의 많은 분의 자녀들이 공부를 포기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물론 부모님의 비지니스를 도와야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대부분 돈을 버는 것이 대학 가고 공부를 하는 것 보다는 우선이었다. 나라도 그럴 수 있었지 싶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나의 첫 주급이 내게 가르쳐 준 레슨이 있어선지 돈 버는 것에 쉽게 매료되진 않았다. 첫 주급 받던 날 100불의 허무함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공부할 수 있었고 아무리 어려워도 이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내겐 없었다.
그리고 공부를 끝냈을 때는 내가 얼마나 잘 했느냐 보다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겐 가장 의미 깊게 다가오고 무엇인가 나보다 더 커 보이던 것을 해 냈다는 것이 또 다른 차원의 성숙함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했다.

짧은 여름 동안 세탁소에서의 고된 일은 이렇게 공부하고 일하고 내가 사는 미국을 알아가고 배워 가는 데 큰 밑천이 된 것 같다. 너도 나도 하기 싫어하는 육체노동이지만 내게는 일하는 것의 귀중함을 깨달은 지름길이었다.
여름 동안 받은 보수 외에도 내가 얻은 많은 지혜와 용기 나 자신의 새로운 발견은 오늘의 내가 있게 한 많은 요소 중 하나로 마음속에 아직도 신선하게 남아 있다.

나의 아들아이도 두 달 반 정도의 여름방학 동안 일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얻을까 궁금하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에게도 필요한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기대한다.
아직은 돈이 좋아 일하는 아이 같으나 일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갈 때쯤은 그만의 체험이 있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성숙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