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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야콥의 예언 (메시아계보대장정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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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0장 전후를 보면서 우리는 야콥의 열 두(12) 아들 중 요셒 외에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유다는..
1. 라헬이 죽고 난 뒤 야콥 일가가 에델 망대 부근에 머물 당시 장자 레우벤이 서모 필하와 통간한 뒤 장자권이 크게 줄어 들어 들면서 (창 35:22, 49:3,4. 훗날엔 유다/요셒에게 장자권의 대부분을 앗김) 상대적으로 위상이 높아졌고..

2. 요셒을 질투하는 형들이 요셒을 죽이려 들자 맏형 레우벤과 함께 은근히 요셒의 생명을 살리는 데 크게 기여했고(죽이는 대신 약대 대상에게 팔자고 제의함. 창 37:25~27)

3. 카나안 가뭄 때 양식을 사러 1차 미쯔라임(애굽)에 내려갔던 형제들의 대변자 노릇을 하여 2차 방문 전 아버지 야콥을 설득해서(43:3~5, 8~10) 막내동생 빈야민(베냐민)을 데리고 내려갔고(이때 그는 막내 빈야민에게 만약 해가 온다면 자신의 목숨으로라도 대신할 생각이었다.)

4. 미쯔라임 2회 방문을 통해 유다의 변론/능변으로 이미 형제들의 대변인 격이 된 점을 기자(모쉐)가 암시해 놓았으며(44:14 '유다와 그 형제들') 이때부터 유다는 요셒을 제외한 11 형제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으로 등장한다. 

5. 빈야민의 양식 자루 속에서 총리 요셒의 은잔이 발견되자 요셒 앞에서 길게 해명/변론한 사람도 유다였다. 그는 잘못이 '발각'됨에 따라 기꺼이 다들 요셒의 종들이 되겠다는 포기를 표명하기도 한다. 이런 말은 그 누구도 쉽지 않다.
특히 아버지 야콥과, 라헬의 아들 중 ("잃어버린" 요셒과) 빈야민 사이가 (요셒 대신) 생명으로 서로 결탁됐기에, 빈야민 대신 자신을 담보물로 제공하겠다는 희생적 자원 정신은 매우 감동적이다(창 44:16~34). 이 해명 끝에 요셒은 복받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해 형들에게 자신을 공개하게 된다.
유다의 이 탁월한 중재적 변론으로 그는 12형제들 중 요셒 다음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6. 야콥도 레우벤 대신 유다를 가족 대표, 대변인으로 여겼다(창 46:28).

7. 아버지 야콥이 (성령님을 통하여) 행한 예언에 따라 12 형제들 중 장차 메시아를 포함한 왕손들이 줄이어 태어나는 명가를 이루게 된다(49:8~12). 이 축복/예언에서 유다는 왕들의 조상일 것이 확실히 예고되며(49:8~10a 참조), 특히 왕으로 나실 메시아 '쉴로'가 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 명언됐다(10b,11).
야콥의 12 아들 축복/예언 내용이 유다에게 가장 많이 할애된 점도 이를 입증한다.

물론 유다 족 외에도 빈야민 지족 출신의 초대왕 샤울을 비롯, 훗날 남/북 분열왕국 시대에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왕들로 여러 지파 사람들이 등장하나 하나님이 빼신 진정한 왕가는 유다 가문이었습니다.
일찍이 유다 가문에서는 왕조 시대 이전에도 야베즈와 같은 존귀한 지도자가 나왔고(연대기A=역대상 4:9,10) 훗날 미쯔라임 출국 후 광야시대 때의 위대한 용장 칼렙도 있지요.
칼렙은 카나안으로 파견된 12명의 정탐꾼들 중 한 명인 데다(민 13:6), 예슈아(본명 '호세아')와 함께 유일한 1세 생존자(민수기 26:65)로 카나안 헤브론 산지를 정복한 명 노장입니다. 광야 시대 초기의 유다 족장이기도 했고(민 34:19). 칼렙의 조카이자 사위인 판관(사사) 옽니엘도 역시 탁월한 리더였지요(판관들=사사기 1:11~13, 3:9~11).

유다 가문 최초의 군주로 왕가로서의 혈통을 연 사람은 다윋.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군/대언자였고 특히 시편을 통하여 장차 자기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아를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여기서 잠시..창세기 49장 가운데 야콥이 유다 후손에게 한 중요한 축복/예언을 분석해 보렵니다.

예후다(=유다)! 너를 네 형제들이 칭송하리! 
너의 손은 네 적들의 목 위에 있고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
사자 새끼란다-오 예후다, 아들아!
넌, 먹이로부터 일어선다네
엎드리면 사자 같고 웅크리면 암사자 같아
그 누가 감히 깨우리요?
규가 예후다에게서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의 발들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
-쉴로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민족들이 복종하기까지!- 
그는 포도나무에 그의 나귀를 매고
가장 좋은 가지에 새끼나귀를 매리
그는 포도주에 자기 옷을, 
붉은 포도즙에 자기 겉옷을 빨 것이라
그의 눈들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그의 치열은 우유보다 희리 (창 49:8~12 사역)

[야콥이 맏아들 레우벤과 그 바로 아랫동생 시메온 레비 까지는 별로 좋은 예언을 하지 않고 저주 비슷하게 들립니다. 물론 뼈가 있는 말들이지요. 특히 430여 년 뒤인 훗날 미쯔라임 출국 후 형제들에게서 독립해 사제 지파로 선임되는 레비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 유다 예언에서부터는 마치 돌변하듯 기쁨과 축복이 넘칩니다! 

사실 유다는 어느 모로든 요셒처럼 모범적인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며느리를 잘못 대우하여 파생된 이런저런 문제가 많았지요. 심지어 며느리를 성매매여성으로 오인하여 잠자리를 같이 할 정도로.
그러나 그는 야콥 일가의 먹거리 장만 차 미쯔라임에 입국할 당시 대변인/중재자로 뛰어난 역할을 했습니다. 확실히 그의 입엔 성령님의 슬기가 있었지요.

유다는 아마도 아버지 야콥이 세 형들-레우벤/시메온/레비-에게 저주하다시피 내던지는 예언(창49:3~7)이 너무도 충격스러워 자신의 옛 죄과들이 주마등 같이 떠올라, 형들 못지 않은 엄청난 책망과 저주를 예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정작 그를 위한 예언은 축복 일색..형들과는 정반대입니다! 구구절절 형제들의 최상위권에서 지도자/지배자가 될 성격의 축복입니다. 즉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레우벤을 제치고 사실상의 장자권을 (요셒과 함께 나눠) 갖게 됨을 시사해 줍니다(연대기A=역대상 2:3, 5:1,2 참조). 

칭송/찬양은 곧 유다의 이름 자체입니다. 이것은 장차 유다 족이 형제들의 존경과 예우를 받을 왕족의 위치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바로 메시아의 선대인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다 족이 형제들 중 가장 탁월하게 될 시대는 아마도 다윋-슐로모 시대일 것입니다. 더욱이 왕들의 왕 메시아가 나실 지족이니 모든 형제지족들이 경배하지 않을 수 없을 터입니다.

여기 유다족의 상징 동물인 사자는 물론 왕권을 암시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유다 족의 사자'로 비유됩니다(요계 5:5). 바꿔 말하면 유다족은 사자로 상징되는 왕권을 쥐고는 있으나 그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진정한 왕, 왕들의 왕이심을 나타냅니다(티모테A 6:15, 요계 17:14, 19:16).

9절의 예언처럼 참으로 유다족 즉 유대인들은 세계 모든 곳,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실력, 권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 왕가가 모두 이스라엘-유대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10절은 실로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입증되는 부분입니다. 유다에게서는 탁월한 지도자가 혈통을 이어가며, 또 훗날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에도 남부 유다 왕국은 상당기간 존속되며 포로시대에도 바빌론-메디아-페르시아 시대 재상으로서 외국에서조차 통치권을 가진 유다 족 다니엘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고 포로시대 이후에도 총독 제룹바벨 등이 거의 끊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쉴로 즉 메시아가 그렇습니다.

'쉴로'는 고대로부터 메시아를 뜻하며 권력자, 권위자, 민족/백성을 모을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 전통상 여기서 고유명사로 번역돼야 옳습니다. 이 점에서 일부 성경 역본들이 고유명사 아닌 보통명사로 풀어 쓴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쉴로는 또 민족의 모여듬이란 뜻에 걸맞게 예슈아/판관(사사)시대에 언약궤(법궤)가 있는 성막이 위치한 지리적 장소이기도 했습니다(예슈아=여호수아 18:1, 판관들=사사기 21:19).  

그러나 무엇보다도 쉴로는 평화를 뜻합니다! '샬롬'과 같은 어원의 낱말입니다. 따라서 "쉴로가 오시기까지"란 말은 샬롬이 오기까지, 즉 평화의 군주(이사야 9:6)이신 예수 크리스토가 오기까지란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언제 정식으로 평화의 군주로 오십니까? 첫째는 상징적으로 예루살렘 입성 당시에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이란 이름 자체가 예루샬람, 예루샬라임, 예루샬렘 등 평화의 뜻을 담고 있지요. 본래 이 곳은 카나안 왕도였는데 고대에 아브람을 축복한 멜키쩨뎈이 건설한 샬렘과 같은 곳이었다고 추정됩니다(창 14:18, 히7:1). 멜키쩨뎈은 의의 왕인 동시에 평화의 왕 즉 예수님을 상징하는 사람이었지요(히 5:6,7:2).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시가에 평화의 왕으로 진입하실 때가 바로 제카리아(슥) 9:9(이사야 62:11a 참조)이 성취되던 때였습니다. 이때 제자들과 시민들이 "호샤나!"(우리를 구하소서)를 외치며 종려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길바닥에 깔아 드리는 등 왕에게나 하는 예우를 갖췄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주님이 이때 정치가로서 지상왕국을 건설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실망하고 도로 배신하지요. 랍비라고 존중하면서도 메시아 아닌, 일종의 '사기꾼'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로, 주님은 참된 평화의 군주로 오실 진정한 그 날을 예언하며 흐느끼십니다(마태 23:37~39, 루카 19:41,42). 이때 주님은 "평화(샬롬/실로!)에 관한 일"(뤀 19:42)이라고 하십니다. 이 평화가 누굴까요? 바로 참 메시아이신 평화의 군주 예수 크리스토를 가리키지요! 즉 정치적 군주가 아니라 참 평화의 왕으로 지상에 다시 오실 날이 정작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창 49:11~12절은 흔히 유다족의 물적인 풍요로움을 가리킨다는 차원에 그치고 예사로 넘기는 구절입니다. 풍유법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적극 피하느라고 드라이하게 문자적 해석만 하고 놔두고 맙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구절 역시 유다와 관련된, 즉 메시아와 관련된 구절로 풀 수 있습니다.
유다 족이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옷과 겉옷을 포도주/포도즙에 빤다는 말은 보통 의미 있는 말들이 아닙니다. 이곳은 장차 다가 올 슐로모(솔로몬)의 평화 시대를 비롯, 메시아의 참 평화시대까지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믿는 유대인들의 죄가 메시아가 뿌릴 보혈에 씻길 것을 암시했다고 해도 틀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결코 풍유법적 해석으로만 매도될 게 아닙니다.

더구나 야콥의 예언 중 이 11절에서 나귀나 나귀새끼가 포도나무에 매인 것은 분명히 제카리아 9:9과 함께 마태복음 21:1~11의 광경을 전혀 연상시키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다족에게 이런 축복이 있었기에 결국 예수님도 그 나귀를 이용하시게 된 게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11절이 메시아와 (거의) 무관하고 단지 유다에 대한 물적인 예언일 뿐이라고 고집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문자적으로만 건조하게 해석하면 영적이지 못할 터입니다.

[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려는 생각입니다. 이 점 이해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