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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메시아계보 대 장정

보아즈와 뤁1 (메시아계보대장정9)



다윋 왕조의 고요한 새벽

주 본문: 뤁 서(룻기) 1,2장
 
구약성경에서 뤁 서(룻기)의 위치는 매우 독특합니다. 물론 성경 전체는 메시아와 그 구속사 중심으로 흘러가는 대 서사시와도 같지만, 뤁 서는 특히 메시아 계보상 보석 같은 중대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믿음의 그릇을 통해 역사를 꾸려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마치 토막극처럼 너무도 생생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다윋 왕가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시는 대하 드라마의 무대감독, 야웨 하나님의 연출 솜씨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더구나 자칫 가장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물론 유대인들은 뤁 서가 단지 다윋 왕가의 내력 때문에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예수 크리스토가 베틀레헴에서 태어났든, 다윋 왕가에서 태어났든 전혀 무관하게 느낍니다. 예수 크리스토를 단지 하나의 '거짓 대언자' 내지 '미치광이 종교인'으로 봅니다. 영적인 눈이 가려져 어둡기 때문입니다. 야웨 하나님을 단일신으로 믿는다는 것 빼놓고는 대다수의 비신자들 및 무신론자들과도 흡사한 태도이지요. 

그러나 우리에겐 뤁 서가 다윋 왕가 뿐 아니라 바로 다윋 왕가의 합법적 후예로 태어나신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의 계보를 밝혀 주기에 더 없이 소중한 한 권입니다.

앞서 살핀 대로 광야시대-카나안 정복시대를 거쳐 판관(사사)시대로 넘어가면서 메시아 계보는 암미나답-나숀-살몬-보아즈-오벧 가계로 이어집니다.

예리코 파견 첩보원으로 추정되는 살몬은 그곳 기생 출신인 믿음의 이방여인 라합과 사랑하고 결혼하여 보아즈를  낳습니다. 뤁 서를 보면 보아즈는 비록 작은 도시 베틀레헴의 한 농장주이지만 매우 폭 넓고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입니다. 그동안, 이 집안이 암미나답-나숀-살몬 등 선대를 이어 오면서 유다족을 대표하는 훌륭한 귀족 가문임을 우리가 느끼지만, 보아즈도 바로 집안을 대표하듯 기품과 위엄을 대물림 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아무리 훌륭한 집안도 다음 대로 이어 가면서 잘못된 자식 교육 탓에 부정적 '돌연변이' 현상이 벌어지기가 일쑤인 탓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판관 기데온의 집안(판관들=사사기 8:23~9:57 참조), 판관시대 말기의 사제/판관 엘리의 집안에서 발견하지요(슈무엘A=삼상 2:12~4장 참조). 심지어는 드물게 훌륭한 지도자였던 최후 판관/대언자 슈무엘의 자식들까지도 그랬음을 엿보게 됩니다(슘A 8:1~3). 부모의 소홀이든 부주의이든 자식 교육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신비로운 것은, 보아즈의 성품과 행동은 어느 모로 보든 메시아이신 예수 크리스토를 닮아 있다는 사실. 그는 온유하고 인자하고 도량이 넓고, 덕스럽고, 생각과 말씨가 너그러운 한편 매우 신중하고 자상한 사람입니다.

뤁 서에서는, 물론 믿음의 여성 나오미-뤁의 주인공 역할도 두드러지지만, 보아즈가 이른 바 '기업무름'(토지회복)의 일환으로 이방 여성 뤁을 기꺼이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사극 드라마처럼 남녀 양측의 '배역'이 두드러지죠. 그 점에서 한 편의 로맨스 같던 라합과 살몬의 스토리를 능가합니다. 더구나 라합/살몬 자신의 아들과 그 아내 이야기이니 오죽하겠습니까! 또 보아즈의 이런 너그러움과 수용성은 바로 자신의 어머니 라합이 이방 출신이기에 자연스럽게 생성된 지도 모릅니다.

나오미 집안이 남성들을 모두 잃고 결국 온 가족 중 시모-자부 둘만 남았다가 유다 왕가의 선대 계보를 잇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경이로운 신비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엘리멜렠과 아들들이 모두 생존했다면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각본' 아래 일어났을지 모르지요. 뤁이 그냥 평범한 여인, 한 유다 족의 일원으로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타마르/라합/뤁..다윋 왕가 및 메시아 계보에는 이런 특이한 여성들 특히 이방 여인들이 번갈아 개입됐다는 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히브리적/율법적 '정통'보다는 믿음의 사람들을 얼마나 중시하시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대안': 뤁과 보아즈

한때 가뭄과 흉년으로 기근에 찌든 베틀레헴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에서 지내던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렠, 두 아들 말론과 킬리온 등 집안 남자들이 타향 땅에서 다 죽은 것은 참 기이한 일입니다. 어떻게 남자가 한 명도 살지 못했을까요? 왜 대물림할 남자가 끊겼을까요?

우리는 그 정확한 원인을 모르지만..하나님은 고대로부터 아브라함/이짜크/야콥 등 히브리족에게 본향 카나안을 떠나 이방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곤 하셨습니다. 까닭은 이방은 우상숭배죄가 관영하고 그런 데서 편히 살다 보면 하나님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죠.

또 과거 하나님은 유다의 장남 에르, 차남 오난까지 악한 아들들을 차례로 저주/심판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유다가 겁이 나 막내 셀라를 내놓으려 하지 않자 결국 며느리를 통해 직접 유다의 씨로 대물림하게 하십니다.

나오미가 이런 가문의 내력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베틀레헴 유다족 사람들이 유다 직계 후손인데 그걸 잊겠습니까! 아마도 그래서 나오미는 이런 불의의 상황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 간주한 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나오미가 본향 베틀레헴에 돌아왔을 때 주민들이 환영하면서 "나오미(기쁨)냐?"고 묻자, "날 '나오미'라 부르지 마오! 차라리 '마라'(괴로움/씀)라고 불러 주슈" 라며 처절한 아픔과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또한 그 이유를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히신 탓"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통탄합니다:

     "내가 풍족한 가운데 떠나갔는데 주님이 나를 텅텅 비어 돌아 오게 하셨다오. 주님이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는데 왜 나를 '나오미'라 부르는 거요?"

그녀의 말에는 전능자 야웨 하나님과 그 심판에 대한 두려움, 원망 등이 담긴 듯 들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것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나요. 하나님은 나오미-뤁 가족을 심히 사랑하시고 그들이 상상 못할 더 큰 비전과 아름다운 행복의 터전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머나먼 이방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계획 속에서 미래의 유다 왕가와 메시아의 가문을 이루어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마치 예리코 함락 드라마의 막후에 한 기생의 도움이 필요했듯, 이 기막힌 구속사 연출의 핵심엔 뤁이라는 한 믿음의 이방 여성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뤁은 가히 평범 차원을 넘는 여성입니다. 남편 말론이 죽고난 뤁은 역시 모압 출신으로 남편 킬리온을 여읜 동서 오르파와 함께 시모를 따라 베틀레헴으로 오려 하자, 나오미는 그들을 측은히 여긴 나머지 고국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권합니다. 오르파는 울다가 결국 떠나지만, 뤁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게 어머님을 떠나라고, 따라오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셔요.
     어머님이 가시는 곳,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시는 곳, 나도 머물렵니다.
     어머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실 테니
     어머님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되렵니다.
     혹 죽는 일로 말고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야웨)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 내리시길 바랍니다." (1:16~17)
 
세상에..! 이런 고백을 언제 어디서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가요? 이런 일편단심을 우리가 어디서 쉽게 볼 수 있겠나요? "이 몸이 죽고 죽어"의 단심가를 부른 충신 정몽주나 순국녀 논개, 열녀 춘향 같은 곧은 절개가 아닐까요? 조국 모압 대신 어머니와 야웨님의 나라를 택하여 살고 말겠다는 뤁의 결단과 고백은 마치 온통 믿음으로 절규하는 한 편의 시 같지 않습니까.

뤁의 이 고백은 그녀의 미래의 또 다른 시어머니 라합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마치 라합이 두 정탐꾼 앞에서 했던 신앙고백과 방불하지 않습니까! 조국 예리코 대신 이스라엘과 야웨를 택했듯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고 우상 많은 이방 땅에서 이처럼 보석 같은 두 여인을 잇달아 빼 내시고 골라 뽑으신 것입니다!
엘리멜렠-나오미 가정이 모압에서 산 것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10년 남짓한 세월이었지만, 나오미의 신앙은 뤁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음을 봅니다. 뤁은 이미 나오미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나오미의 조국을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과 의지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뤁 서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 천사들을 통하여 역사하셨음은 여기저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삭줍기

뤁과 나오미가 본가이자 본향인 베틀레헴으로 돌아왔던 때는 마침 보리 수확의 계절이었기에 뤁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자신-두 가족의 끼니 연명을 위해 보리이삭을 주우러 나섭니다. 뤁과 보아즈의 로맨스 드라마의 출발점은 우연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의 다음 법칙과 플랜 때문이었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

이어진 성구까지 붙여 보면..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24:20~22)

이것은 사랑과 관용의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수십 년 전인 광야시대 때 모쉐를 통해 내리신 하나님의 이 법규 때문에 뤁은 용기를 갖게 되고 밭으로 나서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 뤁이 보아즈와 결혼하게 된 것도 기업무름이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의 법 때문임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의 역사 배후엔 하나님의 여러 사랑과 은총의 법이 수시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베틀레헴 주변의 그 많은 보리밭들 중에서 하필이면 "우연히" 시아버지 엘리멜렠의 친족인 보아즈의 밭에서 줍게 된 것이죠(뤁 2:3). 말이 우연이지 과연 이게 우연이겠습니까? 성령님과 천사들의 인도라고 할 밖에요.

뤁 서의 이 부분을 읽노라면, 으레 장 프랑수아 밀레의 대표작 '이삭줍기'가 생각납니다. 가난한 카톨맄 농가 출신 화가인 밀레는 퐁텐블로 숲 부근 샤이이 농장 들판에서 일하는 여인들을 경건한 사실적 화풍으로 그렸는데, 마치 뤁 서처럼 프랑스 농촌 빈민들에게도 이삭줍기는 정당한 권리였죠.

"때마침"(!) 보리밭 주인 보아즈가 밭을 방문하여 추수꾼들에게 축복 인삿말을 합니다.
     "야웨께서 그대들과 함께 하시길~!"

그의 어진 인품이 담긴 첫 장면입니다. 일꾼들도 모두 "야웨께서 (주인)님께 복 주시길~!" 하고 답합니다. 좋은 주인에 좋은 일꾼이란 느낌입니다.

이때 보아즈가 이삭줍기 여인 뤁을 발견합니다. 첫 대면입니다. 뤁은 주인과 일꾼들 사이의 인사말을 듣자 "아..저 분이 이 밭 주인이시구나. 참 인상이 좋으시다" 하면서 가슴이 콩닥콩닥 두 근 반 세 근 반 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낱 보리이삭 줍기에 끼어든 자신은 멀리서 갓 이사 온 초라한 이방 여인에 불과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보아즈는 추수꾼 감독에게 묻습니다. "저기 저 젊은 여인은 (처음 보는데) 누군가?" 감독은 "나오미를 따라 온 모압 여성인데요, 이삭을 줍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니 잠깐 집에서 쉰 것 빼곤, 아침부터 내내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합니다. [이 때 보아즈가 뭔가 감독에게 귀띔으로 부탁해 두는 대목이 있습니다. 2:9 참조] 뤁의 근면과 열성, 보아즈의 돌봄과 관심 등을 짚어 볼 수 있는 장면들이지요.   

보아즈는 바로 자신의 친족인 엘리멜렠의 과수댁 '나오미'란 이름 하나에 순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더 없는 온정과 너그러움으로 뤁에게 다가갑니다.

     "내 딸이여, 들으시오. 이삭 주우러 딴 밭에 가지 마오.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여종들과 함께 있으시오."

말투를 보아 아마도 보아즈는 뤁에 비해서는 한참 연상일 터입니다(뤁 3:10 참조).

그리고는 덧붙입니다:

    추수꾼들이 베는 보리밭을 잘 살펴 뒤를 따라다니며 맘껏 주우라고.
    일꾼들에게 당신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으니까 염려 말고 하라고.
    목이 마를 때는 청년들이 채워 놓은 물항아리에서 따라 마시라고.

얼마나 자상하고 세심한 배려인가요!  

뤁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마움의 눈물이 절로 솟구쳐 주르르 흘러 내렸을지도 모릅니다. 누구시기에 나 같은 처지의 이방 여인을 이처럼 살갑고 다정하게 돌봐 주실까. 그러기에 땅바닥에 공손히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저는 이방 여인인데 어쩜 이렇게 제게 은덕을 베푸시며 돌아보십니까!"

그 이유를 보아즈는 명확하게 밝힙니다:
 
     "그대가 남편이 죽은 뒤로 시어머니께 한 모든 일들, 부모와 고향을 떠나 과거 알지도 못하던 민족에게 온 것도 다 알고 있소. 주님께서 그대가 한 일을 갚아 주실 거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왔으니 그 분이 그대에게 넘치게 갚아주실 거라오!"

우리는 보아즈가 농장주의 입장에서 단지 처음 보는 한 젊은 여성에 대한 호기심에서만 하는 말이 아님을 절감합니다. 속에서 우러나는 온정과 정성, 충심의 말투입니다.   
특히.."하나님의 날개 밑에"! 이 말은 시편 36:7 등의 말씀을 인용한 느낌입니다(시17:8, 63:7 참조). 실로 정답고 인자한 말투가 아닐 수 없지요. 마치 주님의 심정 같지 않습니까(마태복음 23:37)?   
 
더욱 감격에 겨워진 뤁이 답합니다: 

     "나의 주님, 제가 님께 은덕을 입으렵니다. 저는 님의 한 하녀만도 못하지만 님께선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친절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자기비하적인 겸손한 이 답변은 꾸밈 없는 현재의 진심 그대로이지요.

점심식사 때도 보아즈는 뤁에게 온갖 온정과 친절을 베풉니다(2:14). 그리고 식탁을 떠날 때도, 또 다시 일꾼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뽑아 버려서라도 줍게 하라고 뤁을 위한 각별한 특혜를 지시합니다(15,16절).

뤁이 저녁까지 주운 이삭을 떨어 보니 한 에파(약 22리터)쯤 됐습니다. 상당한 분량입니다. 나오미는 뤁이 갖고 온 심상치 않은(?) 양의 곡식을 보자 뭔가를 느끼고 대뜸 묻습니다. 

     "얘, 아가! 오늘 어디서 (이렇게 많이) 주웠니? 어디서 일을 했기에? 어쩜! 너를 돌보신 분에게 복이 있기를..!"

뤁도 상기된 얼굴로 기쁘게 대답합니다. 

     "보아즈라는 분이에요."

보아즈? 보아즈가 '나오미'란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유추했듯, 나오미의 입에서도 '보아즈'라는 이름 하나로 그에 대한 축복과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야웨님의 복이 그분에게 있기를 빈다! 그 분(주님)은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끊이시지를 않네...사실 그 분은 우리와 가까운 일가란다. 우리 기업무름을 해 줄 사람들 중에 한 명이지."

그러자 뤁은 보아즈가 베푼 각별한 친절을 덧붙여 간단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그 분이 또 제게,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 젊은 일꾼들 곁에 가까이 있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나오미는 뭔가 흥분스러운 예감에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그게 낫겠다, 내 딸아! 그 분의 여종들과 함께 일하고 딴 밭 사람들은 만나지 마라."

그래서 뤁은 보리 추수만 아니라 밀 추수를 다 마칠 때까지도 보아즈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며 지냅니다.

참으로 정겹고도 포근한 추수 정경입니다.
참으로 정겨운 시모-며느리 사이입니다.
참으로 좋은 밭 주인입니다.

(계속)


[ 필자는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자는 생각입니다. 이 점 독자가 이해해 주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