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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눅 4:16-30] 믿음의 소수가 됩시다


              왕들A(열왕상) 17'8-16

   
바탕본문: 루카복음서(눅) 4'16-30

얼마 전 어느 독자는, 살아오면서 들어 본 설교자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만 필요에 따라 믿는 듯 했다는 귀띔을 하였습니다. 
제 자신이 평생 들어온 설교들도 대부분 그랬고, 앞으로도 으레 그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설교자들 자신은 성경을 "다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실상 일부만 믿고 있다는 귀결입니다.  
물론 일부 설교자들은 대뜸 반발할지 모르지만, 이 글을 읽어 나가노라면 다소나마 이해가 될 터입니다. 

지난 제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말/글-성경책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말씀 그대로 권능을 발하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때였습니다.  
그 전에는 사실상 구원을 중심으로 성경의 일부만 막연하게 믿고 있다고 생각됐을 뿐입니다.  
일종의 종교/도덕 서적처럼 책으로만, 이야기로만, 문자로만 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읽고 듣는 사람이 믿음을 거기에다 적용시켜야 제대로 "먹혀들고" 작동합니다! 
이것을, 성경책 속의 문자에 믿음이라는 변수 내지 화합물이 섞여 작용할 때, 화학반응이 일어난다고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말씀을 그리스어로 '로고스'다, 'ㅎ레마'다..따져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굳이 그런 설명을 빌지 않고도 쉽게 말한다면, 진리는 약속 내용대로 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약속대로 되지 않는 말글만의 진리는 참일 수 없고, 진리일 수가 없지요. 거짓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참이고 진리이며, 그 분의 약속이기에, 우리가 구약(舊約)/신약(新約)이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약속대로 이루어질 말씀이라는 뜻이지요.
이것은 단지 메시아와 구원에 관한 예언의 성취만 뜻하진 않습니다. 
모든 약속의 성취를 뜻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진리를 대하는 방식을 설명하실 때, 믿음으로 반응할 것을 수많이 강조하실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페트로(베드로)는 믿음으로 물 위로 걷다가 한 순간 두려운 생각에 물 속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은 "믿음이 적은 사람, 왜 의심했는가?"라고 물으시며 건져 주셨습니다.  

다양한 환자를 고쳐 주실 때도 거의 매번 "그대 믿음대로 되기를~"이라고 축복하셨고, 가끔 정말 드문 믿음의 소유자를 만나시면, "그대의 믿음이 크오!", 탄복하시며 칭찬도 해 주셨습니다.
한 로마 백부장(centurion)이나 쉬로-페니키아 여인의 경우가 그랬지요. 
 
어느 날, 주님이 열매 없는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뒤 뿌리째 마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자, 주님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들려져 바다에 던져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실제로 얼마마한 수의 산들이 믿음으로 바다에 풍덩풍덩 빠졌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약속에 대한 믿음의 권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짐작케 해 주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글로만, 듣기에 좋은 감정적 자극의 말로만 듣는 데 익숙한 우리는 그 분의 말씀에 담긴 엄청난 위력과 약속의 진리를 좀체 실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기껏 믿으면 구원받고 이 다음에 천국 간다는 정도입니다. 
구원은 성경 진리의 핵심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더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히브리적 개념의 구원은 영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 주신 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구원했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소수를 제외한 설교자들 대다수는 구원은 믿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이나 교인들의 믿음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나머지에 대해선 기도의 응답 정도로만 국한되어 있고, 성도 또는 교인들이 "대강 알아서 해야 할" 추상적인 교훈들입니다.
우리가 다 겪어온 진상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또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설교자들 자신이 좀체 신뢰감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내가 들어 왔고 알아 온 설교자들 대다수는 실제로 영이 구원 받는 믿음을 거의 전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밖에 기도 응답 등은 청중이 대강 알아서 하라고 놓아둠으로써, 사실상 대단한 믿음을 실천할 여지 같은 것을 남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가끔 믿음의 실체를 알려 주는 진귀한 설교자도 없지는 않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중년에 접어든 뒤늦게나마 그런 설교자를 만날 수 있었고 제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성경말씀의 실천이라면 도덕적/감정적 차원의 동의나 공감 정도로 생각합니다.
"은혜롭다", "은혜 받았다"는 보편적인 평가의 표현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네 찬송가-'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새302/통408)이 이 상태를 어느 정도 은유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 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주님은 물 위를 걷다가 파도 속에 빠져 들어가는 페트로를 향하여 "믿음이 작은 사람, 왜 의심했는가?"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을 보면, 물 위를 걷는 믿음은 미신적 믿음이요 기독교와 상관 없다고 믿는 '믿음'이 더 흔합니다! 
그렇다면..주님과 페트로도 기독교와 무관했겠군요. 

또 뽕나무나 산더러 번쩍 들려 바다에 빠져라는 믿음의 이야기는, 힘 있는 믿음에 관한, 듣기 좋고 기분 좋은 자극적/정서적인 말씀 정도로 듣습니다. 
그런 태도로 믿음지수 제로(0)에 가깝게 머무는 것이 "안전한 믿음"이고, 그 이상 뭘 더 실천해 보겠다는 겨자씨 만한 믿음은, 극히 위험하고 광신적/미신적인 믿음으로 치부되곤 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은, 말씀의 약속과 하나님의 권능을 통한 병 낫기 위한 믿음보다는, 돈과 병원과 의약, 의사들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더 높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도 병원도 의사도 환자에 대한 모든 도움의 손길을 놓고 말 때,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간구하기보다 같이 손을 놓고 마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절대주권주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뜻이면 고쳐 주시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만 가져보지, 그 이상의 것-믿음-을 가지려는 때가 드뭅니다. 
정작, 성경에서 "그대는 낫기를 바라오? 나도 바라니까 믿음대로 나아요!"라고 하신 주님의 뜻은 읽으려고, 알려고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건 예외일 테고, 나야 뭘..병원에서 못 고쳐 주면 이대로 아프다가 죽지." - 이런 환자들이 대다수라는 것입니다. 
 

또 이런 유의 메시지를 전하면.."여보쇼. 나더러 믿음 없다 하지 말고, 당신부터 먼저 해 봐요! 당신, 의사의 도움 안 빌리고 언제 병 나아 봤어?" 식으로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바로 주님께서 지적하신 표적만 바라던 유대인들의 태도와 같다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뤀 4'23).
 흔히 신자들은 유대인들이 표적만 바랐으니, "이적이나 표적을 바라선 안 된다"고들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하신 것은 권능의 일을 행하는 믿음의 부족이지, 믿음이나 권능, 이적 자체를 탓하신 게 아니죠.
 
그래서 사도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사실 믿음은 드문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바탕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을 봐도(25-27절), 고대 대언가 엘리야 시대에 있는 큰 흉년 때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도움을 주고 받으러 찾아간 믿음의 여인은 오직 이방인 시돈 땅 자레팥(아람어: 자렢타)의 과부였습니다.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샤 당시에도 이스라엘 전국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믿음으로 순종하여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가 어린이살로 깨끗이 고침 받은 사람은 외국의 나아만 장군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맞아, 믿음은 드물어. 나 같은 보통사람이야 뭐..", 
   "옳아, 믿는 사람은 적어. 그런 사람은 유별나거나 머리가 좀 돈 사람이지"..
라고 말하면서..위험스럽게 믿는 광신적인 극소수보다는 믿지 않는 보편적 다수의 일부에 속해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스스로 위로 받고 말겠습니까.
   

오늘 바탕 본문 앞부분(뤀 4'18,19)을 보면, 유일한 참 메시아이신 주님은 은혜의 해(희년) 곧 은총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됨을, 
    억눌린 사람들을 높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은 분명 두 가지 의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영적인 복과..
   물적/육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적인 풍요를 주시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전자만 놔 두고 후자를 빼 버린다면, 모든 것을 영적으로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이 복이라오" 하면서, 풍요의 길을 위한 믿음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여전히 가난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통한 복을 영적으로만 해석하여, 물적 풍요는 구약시대와 유대인들의 것이고, 오늘날 신자들을 위한 풍요는 오직 마음의 가난(플러스 물적 가난!)이라는 해석들을 하곤 합니다. 
착각이고, 짧은 생각이죠.

늘 강조해 왔지만, 아브라함의 복은 한 마디로, 영/혼/육/물의 모든 좋은 것을 뜻합니다. 
영과 혼이 잘 됨 같이,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복입니다(참고: 갈라티아 3'8-14 요한C서=요삼 2). 갈라티아 3장에 나타난 바, 크리스토(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받아 속량하신 저주는 영적인 죄만이 아닌, 가난과 두려움, 고통과 억눌림, 질병과 모든 해롭고 악한 것들로부터입니다. 
고대에 에발산에서 선포된 저주 그대로입니다(신명기 27'12-26; 28'15-68). 

크리스토님이 대신하셨으므로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삶 속에 적용할 수 있는 (저주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메시아의 복된 소리, 기쁜 소식이지요. 

교회가 이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믿음의 사람들을 양산해 낼 길이 없습니다. 
여전히 믿음의 사람들은 희귀한 대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소수가 될 것입니까?
불신의 다수가 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