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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눅 19:1-10] 잃었다 되찾은 양, 자카이


바탕본문: 루카복음서(눅) 19'1-10



자캐우스(한글 역: '삭개오')는 당대의 부유한 도시, 예리코(여리고)의 이름난 키 작은 사나이였다. 그가 상당히 악명 높았던 것은 당대에 지탄 받던 세무관이라는 직종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마다 그를 밉게 보았고, 피정복지의 종주국인 로마나 헤로드 정부의 '똘마니', '꼬붕'으로 여겼을 터였다.  

특히나 그는 이름 탓에 미운 털이 곱박혔다. 라틴어식인 자캐우스, 그리스어로는 자카이오스라는 그의 이름은 '순결', '깨끗', '의로움' 등의 뜻을 지닌 히브리어 '자카이'(또는 '자키')에서 왔다. 그래서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역겹고 메스꺼운 역설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특히 빈민들에 대한 세무관들의 횡포가 심했고, 따라서 그들은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다. 사회적 위치나 돈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정서로는 동포들에게 현저히 배척 받고 비천하게 취급 받는 신분의 하나였다. 정부에겐 대우 받고 유대인 사회에선 따돌림 받는 왕따의 대상이었다. 


이와 함께,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 종교인, 위선자들에게 특히 미움받으신 것은 복음 전도 차원에서 이들 세리나 또는 창녀들도 마다 않고 가까이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소 자캐우스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집에 들어가신 그날도 동네 사람들을 비롯한 뭇 사람들은 못볼 것을 본 양, "그가 죄인의 집에 머물려고 들어갔다"며 수군댔다.  

예수님의 12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인 마태도 자캐우스처럼 세무관이었다. 마태의 또 다른 이름은 레뷔('결합'이란 뜻). 고대의 사제족인 레빝(=레뷔족)과 같은 이름이다. 백성과 가장 결합되지 못한 직업인이었던 그가 예수님과 결합된 것도 빜 아이러니다. 

    


자캐우스가 주님을 만나뵌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니, 긴 얘기를 하지 않겠다. 여기서 단지 필자가 하고픈 말은 주님은 자캐우스를 아브라함의 후예로, 그리고 한 마리 되찾은 양으로 대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자캐우스가 자기 집을 찾아 주신 주님을 황송해 하면서도 기쁨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고 삶을 바로잡으려 다짐했을 때,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한 후손이기 때문이오"라고 선언하셨다. 순간 사람들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평소 세리들을 저주하다시피 해온 그들에게는 일대 충격 선언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나? 저런 인간에게도 구원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침을 뱉어가며 혐오해 온 대상에게 이건 해도 너무 하지 않나..? 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동포에게서 속여 뺏은 것이 있다면 네 곱이나 갚겠습니다!"라고 주님 앞에서 단언하는 자캐우스의 힘차고 의연한 말과 그 표정에 의미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님은 자고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밉보이려면 그냥 가던 길로 계속 가고, 미뻐 보이려면 가던 길도 돌이켜 되돌아올 일이다.  

주님의 한 비유 속에서도 아버지 하나님은, 가슴을 내밀며 자신의 겉모습만의 '의로움'을 뻗대어 자랑하는 자칭 의인인 파리세의 입에 발린 기도보다 가슴을 치며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죄인인 세리를 더 옳다고 인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뉘우치고 돌이킨 예리코의 세무관, 자캐우스는 이제 더는 추하고 사악한 죄인이 아니라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의 착하고 당당한 한 후손이었고, 하나님 앞에 온순하고 온전한 한 마리 어린 양이었다. 


물론 유대인들 누구나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긍하며 살았다. 율법 생활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면서 자기보다 의로우신 주님과 제자들을 비웃고 힐난했다. 그러나 주님은 위선적인 그들을 향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응수하셨다. 

우리도 유대인처럼 자신이 최소한 명목상의 크리스천이라고 자긍하고 있지나 않은가. 표면상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고 교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영적인 아브라함 후예라고 굳게 믿지는 않는가..?


주님께서 자캐우스에게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그도 아브라함의 한 후손임이라"고 선언하신 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뜻하지 않는다. 자캐우스가 믿음으로 기쁘게 주님을 모셔들이고 회개(뉘우치고 돌이킴)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참 메시아(크리스토)/구주(예슈아=예수)로 받아들이는 사람만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다. 가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이신 예수께 되돌아오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참 후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자동으로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 아니다. Make no mistake about it(오해 없기를).



주님은 이어서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건지려고 왔소"라고 하셨다. 이 후속선언은 더욱 중요하다. 번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 원문을 보면, "토 아폴롤로스" 곧 "잃어졌던 (그)것"이라고 사물을 뜻하는 듯한 중성적 단수 '관계대명사'를 썼다. 물론 중성이라고 해서 다 사물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 그리스어의 성(gender) 표기는 영어와 다르다. 예수님을 가리킨 어린양은 남성 명사로 되어 있는가 하면, (성숙한) 암양은 여성 아닌 중성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


왜 예수님은 여기서 잃어졌던 '그(사람)', 잃어졌던 '그들' 대신 '잃어졌던 '그것'이라고 하셨을까? 그 까닭을 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주님은 여기서 바로 당신의 잃어졌던 한 마리 양을 가리키고 계신다! 

아닌 게 아니라 주님께선 바탕본문보다 불과 얼마 전 사건인 바로 루카복음서 15장의(!) 비유 때 100 마리 양들 가운데 잃어진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선한 목자로 자신을 비유하셨다. 그 한 마리를 찾느라 목자는 99 마리를 뒤(산)에 두고 먼 길을 이리저리 찾아 다녔다. 그리고는 기어코 그 한 마리를 찾아 되돌아와 벗들과 이웃들을 불러 즐긴다는 비유를 하시면서, 죄인 한 사람이 뉘우치고 돌아오는 것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보다 더 기뻐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자캐우스가 그런 경우였다! 주님은 의인들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서 9'13). 주님이 자캐우스와 같은 직업인인 세무관 마태(레뷔)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 초청받아 많은 세리들,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종교인인 파리세들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자네들의 선생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냐?"고 묻자, 주님은 건강한 사람들에겐 의사가 필요 없고 환자들에게만 필요하다(9'12)고 일깨워 주셨다. 

여기서 '건강한 사람'들이란 사실 당대의 유대 종교인들처럼 건강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들이 더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스스로 죄인이라고 깨닫고 뉘우치기까지는 구원과 치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셈이다. 

오늘날 '건강한 교회'로 자처하는 교회들은 어떨까? 정말 모든 면에서 건강..할까? 모든 면에서 건강하지 못하다면 사실 건강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신이 병든 줄 모르고 건강하다고 믿고 지내는 것은 더 건강하지 못한 상태요 의식이다.   



주님은 왜 비유 뿐 아니라 거의 실제로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로 자처하시는가? 산 우릿간의 99 마리는 이미 있는 양들이며, 어찌 보면, 그들은 기존의 율법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만족해 하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그러나 잃어진 양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어두운 세상에서 배회하는 죄인된 양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 심정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제키엘(에스겔)서 34장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양떼를 사랑하시는 목자 하나님의 안타까우신 심경이 절절이 너무나 진솔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목동 출신의 왕 다뷛이 시 제 23편에서 노래했듯), 우리의 목자왕이신 하나님은 잃어진 양을 중시하신다. 

   ".. 목자는 (마땅히) 양떼를 돌봐야 하지 않나?"

   ".. 보라, 내가 몸소 내 양떼를 탐색하여 찾아내련다."

   "목자가 양떼와 함께 있을 동안 흩어진 양들을 돌보듯 내가 나의 양떼를 돌보련다. 내가 구름끼고 어두운 날          

    그들이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들을 건지련다!"

   "..내가 내 양을 그들(타락한 이스라엘 목자)의 입에서 건져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련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목자-예호봐 라아-이신 아버지의 이 심정을 고스란히 함께 지니고 계신다(시 23편과 요한복음 10'1-18을 서로 비교해 보라). 예수 크리스토 자신이 예호봐 라아이시니까! 


세상 사람들,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미워했던 예리코의 세무관 자캐우스, 회개하여 더 할 나위 없이 착한 성도가 된 그는 언젠가 공중에서 우리 모두와 함께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는 잃어진 양이었다가 주님이 몸소 되찾으신 양이 되었다. 


우리도 주변의 잃은 양을 탐색하여 되찾아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