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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요8:31-59] 참 스승이 보장하는 자유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8'31-59

   "만일 그대들이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그대들은 나의 제자들이라오! 그대들이 (그) 진리를 알게 될 텐데, (그) 진리가 그대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오." 
 
(30,31절 사역)

 

   사람들은 흔히 진리라는 것을 말하곤 합니다. 세상 사람들, 일반인으로부터 불자들, 소크라테스 같은 철인들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시로 '진리'를 거들곤 합니다. 또한 생각이 깊다는, 소위 '성인'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진리'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것이 다 진리일까요?
그들 말처럼 모든 것이 다 진리라면, 세상엔 정말 진리 아닌 것이 없겠지요. 실로, 온 세상과 온 누리가 비진리 아닌 진리로 가득 차 있을 터입니다! 실제로, 뉴에이저들은 그렇게들 말합니다. 심지어 나무나 벌레도 신이라거나 그 속에 신이 있다고들 주장하니까요. 그들은 '신적'인 것은 다 진리로 봅니다.

사실일까요? 다 참일까요?

성경이야말로 처음부터 참을 말하며, 진리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나..불행히도, 에덴 동산에서 아담/하와를 꾀어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 불순종/범죄를 하게 한 뱀은 속에 엉거능칙한 거짓말장이, 마귀가 든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거짓말장이', '모든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셨습니다(44절). 처음부터 살인자였던 마귀가 진리 쪽에 서지 못함은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본디 제 됨됨이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곧 마귀의 세상이요, 마귀가 신/왕으로서 한시적으로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 진리를 알고 배우기 전, 마귀의 거짓과 마수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마귀에게 지배받는 세상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참/진리와 무관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기자인 사도 파울은 "사람들은 다 거짓되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 할지어다"라는 구약 말씀을 되풀이 선언합니다(로마서 3'4a).

보십니까? 사람들은 다 거짓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참되십니다.
온갖 신화들을 보고 종교들을 보세요. 거짓으로 거의 꽉 차 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짓에 싸여 있어, 그것들의 참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흥미롭게도, 세상 종교들은 거의 한결 같이 자기네가 진리라거나 모두 진리라면서, 기독교를 거짓 종교 또는 한낱 수많은 길들 중 하나의 길, 하나의 종교라고들 주장하지요.

그러나 기독교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들입니다. 딴 종교와의 대화나 '조화', 더 나아가 혼합을 추구하는, 이름/명목만의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수많은 '영성'들이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혼탁한 영성들이 진리라고 착각들을 합니다.


온 불교계가 존중하던 고 성철 큰스님을 사람들은 진리의 한 사표인 양 생각했지만, 그는 죽기 얼마 전 공공연히 마귀 싸탄을 찬양한 사람입니다.
그는 싸탄이야말로 참 부따(부처: 깨달은 자)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마귀가 깨우친 게 있다면, 거짓말로 사람들을 꾀어 범죄하고 타락시키는 방법이겠지요.  

성경에 따르면, 마귀/싸탄은 모든 거짓의 아비입니다.
거짓에서 참/진리가 나올 수 없지요. 논리적으로 불가한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은 참되셔서 전혀 거짓이 없으시고, 늘 언약을 지키실 만큼 신실/성실하시고, 충실되고 변함 없으시다고 증언합니다.
이 모든 표현들이 성경 원어상 히브리어 '에메트', 그리스어 '알레테이야', '아멘' 등에 담겨 있습니다.

약속을 자주 어기는 사람을 진실되다거나 참되다고 하지 않습니다.
약속은 단 한 번을 어겨도 대뜸 의혹과 의심을 사기가 쉽지요.

하나님의 참되심은 그 분의 약속/언약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언약/약속을 지키고 이루고, 예언을 그대로 성취할 수 있는 존재야말로 참되고 유일한 신입니다.
그런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호바(여호와/야웨)님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모든 언약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과 신약-옛 언약과 새 언약 및 그 성취 내용들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이 모든 언약의 핵심 가운데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완전 성취이신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the Truth)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에메트/알레테이아/아멘을 성취하시고 대표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참이십니다!

그 분은 더 나아가 진리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선언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든 억압, 억눌림과 고통과 불편과 부자유,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 방법을 잘 모릅니다.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자유롭게 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겁니다.
목적이 있다면, 수단방편도 있기 마련이죠. 그런 방법이 없다면 몰라도, 있는데도 몰라서 자유롭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온갖 권모술수 등 헛된 방법들을 추구하지요.


오늘 바탕본문이 담긴 요한복음 8장 후반부를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30,31절에 따르면, 분명히 유대인들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은 그들을 좀 더 설득하십니다.
그들이 만약 주님 말씀 속에 머물면,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이며, 진리를 알 테니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안 가 돌변합니다. 이를 테면 "말짱 도루묵"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잠깐, 진리 및 자유와 연계된 주님 말씀을 몇 단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 말씀 속에 거하기.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주님 말씀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원문의 "거한다"는 말은 계속한다, (늘/꾸준히) 지탱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잠시 있다 떠날 게 아니라,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주님의 말씀을 떠나 있으면, 참으로 주님의 제자일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늘 참되며 신실하므로, 그 말씀을 떠나 살면, 결국 그 대신 거짓 속에 거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놀랍게도, (30절까지) 주님 말씀을 믿었던 유대인들이 그 날 계속 주님 말씀을 듣다가, 모두 도로 떠날 뿐더러, 급기야 이를 갈며 돌을 들어 주님을 쳐 죽이려고까지 달려듭니다(59절).
이게 뭔 상황인가요..정말 경악스럽지 않습니까?

이처럼 참으로 주님의 제자되기란 쉬울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례 없이 많은 교계 사람들이 주님의 진리를 떠나 쉽사리 비진리에 빠져드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과 거리가 먼 이상한 '영성'들을 '진리'로 받아들여, 거기 거하려 듭니다.
예컨대, '관상(觀想)기도'라는 것은 성경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라 성경을 잘 모르던 시대인 4세기쯤 에짚트의 안토니 등 광야 수사들이 계발한 명상적 기도 방법으로서, 당대의 국제도시 알렉산드리 등에 뿌려진 타 종교의 명상법과 매우 유사하며, 놀랄 것도 없이, 20세기에 이 기도를 부활시킨 사람들 모두-머튼/키팅/페닝턴/매닝어/로어/나웬/포스터..)가 종교혼합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력을 모르면 모를까, 알면서도 이 관상영성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사람들은 주님 말씀인 진리를 사실상, 또는 부분적으로 모르거나 모른 체 하며, 그 진리에 거하길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 속에 거한다는 것은..그 말씀을 늘 염두에 두고 되새기며 지키는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푸른 초장에 비스듬히 누워 꼴을 뜯어먹고 되새김질하면서 떠나지 않는 양떼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 말씀의 진리가 푸른 초장 위에서 맘껏 즐기고 놀도록 자유를 보장해 줍니다!
양들이 맘대로 초장을 떠나 곁길로 가 버린다면, 이리 떼의 공격을 모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리 떼 같은 마귀와 그 졸개들에게 자유를 구속 당하고 말지요.


둘째로, 진리로 자유를 얻으려면, (말씀으로) 주님의 제자여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런 혜택을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죠.
그처럼 사제 관계는 필수적 상관 관계입니다.

자고로 한 스승의 제자가 되면, 스승에게서 얻는 특권과 혜택이 많습니다. 스승이 지닌, 그리고 베푸는 모든 것을 다 맘껏/한껏 얻어 누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선 제자로서 스승의 모든 지식을 혹 100%는 아니라도 대부분 전수할 수가 있습니다. 또 스승과 함께 지내면서 그 삶을 배워 익히고 체득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지닌 것들을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스승이 지닌 명성과 권리를 그 제자로서 당당히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어느 명작곡가/연주가가 한 동네를 방문했습니다. 그 동네의 한 아마추어 연주가는 평소 그의 제자라고 사람들을 속이며 활동해 왔었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명사가 동네에 왔다는 소식에 그만 이내 '뽀록' 날까 봐 놀라고 당황하여, 몰래 그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해 온 소행을 고백하면서 용서를 청하자, 그 명작곡가는 그 자리에서 연주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 아마추어가 몇 곡을 치자, 그 작곡가는 이런저런 부분들을 상세히 고쳐 주고 나서 말했습니다. 
   "자, 이제 당신은 정말 나의 제자요. 동네에서 맘껏 연주하오!"
그 아마추어는 뛸 듯이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 날부터 명실공히 그 명작곡가/연주가의 제자로 살아갔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가 될 때,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상 못할 온갖 큰 특혜를 누리게 됩니다!
한 마디로 무한한 기쁨과 평안과 온갖 좋은 것들입니다.
또한 그 분의 이름으로 일컫는 크리스천이 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나 크세노폰, 가우타마 시타르타 샤카무니(석가)의 사리푸트라 등 '10대 제자들'을 비롯한 문하생들, 얀휘(안회/자연) 등 콩푸지(공자)의 제자들 등이 스승의 총애와 은덕, 영예의 일부를 얻었지만, 우리 주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혜택과는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승도 스승 나름, 제자도 제자 나름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대표적인 특혜는 바로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지요.
참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주님은 로고스/말씀이신 당신께서 곧 길/진리/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그 분 안에 은총(사랑)과 진리가 가득합니다.
그 분과 그 말씀을 알면, 자유롭게 됩니다.
자유처럼 좋은 것이 없지요.

참 자유는 진리 곧 참을 알 때만 획득됩니다.
거짓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참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크리스토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때가 곧 그 자유를 누리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그 어떤 스승도 예수님 같은 자유를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나, 하나님이신 그 분만 참되시기 때문이죠.
수많은 스승들이 참과 자유를 말하고 장담했지만, 그들중 아무도 진정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이 죽음서 되살아나신다 예언하셨고, 정말 그대로 부활하셨거든요!
모든 딴 스승들은 다들 해골이나 흙이 되어 무덤에 그냥 누워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죄에서, 무덤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아드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면,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습니다(36절).
하나님의 아드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을 말하자, 유대인들은 그 분을 믿지 않았습니다(45절).

주님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52절).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겐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진리의 모습이고 보장입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