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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바울서신

[고후 8:9; 9:8] 번영인가, 가난인가?



    사랑하는 님, 나는 빕니다: 님의 영혼이 잘 되듯, 님이 범사에 잘 되고 또 강건하기를!  (요한C서=요삼 2절. 이하 성구 사역)

    우리 주님 예수 크리스토의 은총을 여러분도 아십니다. 비록 그 분이 풍요로우셨어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해지심은 그 분의 가난 때문에 여러분이 풍요로워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코린토B서=고후 8'9)


    하나님은 능하셔서 모든 은총을 여러분에게 풍요롭게 하십니다. 이는, 여러분이 범사에 늘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행들을 풍부히 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코린토B 9'8) 

 


한국은 이전부터 그래왔지만..요즘은 미국에서 소위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 또는 '형통신학'(prosperity theology)을 강하게 부정하는 비공식 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습니다. 


그 요인은 여러가지입니다.
이 요인들을 독자는 잘 살펴 보시길 바랍니다.

우선,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여러 모로 이상한 열매를 맺거나 본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케닡 코플랜드나 베니 힌, 크레플로 달러.. 이런 사람들이 성도들의 헌금을 모조리 챙겨 사역자들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몇 백 만 달러 짜리 호화 저택에서 호화 자가용차를 굴리고, 개인 전용 제트기로 날며 사치한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탈세 혐의를 받거나 연방의회 상원 재무위원회의 조사에 응하기도 했습니다. 또 상당수는 뉴에이지 식 긍정철학을 결부시켜 가르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번영 복음으로 거부 내지 부자가 된 교회와 그 사역자들도 대동소이하며, 예외가 아닐 겁니다.
이들은 도무지 주변의 가난한 교회와 사역자들을 돌볼 줄 모르니 대체로 번 돈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천국 시민들은 번 돈을 잘 쓸 줄 알아야 슬기로운 청지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숱한 사역자들이 그래서 말썽이 돼 왔습니다. 아울러 이들 다수는 프리메이슨리나 또는 사실 상 카톨맄 산하 '기사단' 등 온갖 비밀집단과 연계돼 있습니다.


둘째로는..번영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훈 자체에 대한 불신과 회의 탓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대체로, 기독교적 겸양과 중도적 검소 정신을 금욕이나 '가난=미덕'으로 오인한 전통적 교회교육으로 인하여 뿌리 박힌 [기독교=가난해야 하는 종교] 등식으로 인한 요소도 있고, 또, 안티기독들의 중상모략도 포함됩니다.

크리스천은 하늘나라 시민으로 되도록 하늘에 보물을 쌓고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금욕적 가난이나 청빈은 기독교에서 온 것이 아니라 천주교 수도원이나 불교에서 온 것입니다.
한 가지 유념할 사실은, 카톨맄의 총 본부인 바티칸은 실상 무척 돈과 보물이 많은 거부라는 점입니다. 


셋째로는, 싸탄 마귀 그 자의 사특하고 간교한 이중작전 탓입니다.

마귀는 한 편으로는, 번영을 모두 싸잡아 악으로 간주하게 하여 소위 '청빈의 미덕'으로 기독교의 자원 말리기 작전을 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싸구려 '번영 복음'으로 교회와 사역자들의 배를 불려 주어 맘모니즘에 젖고 돈맛에 찌들려 사치생활을 하고 타락하게 만들고 있는데..이 이중작전은 현재 썩 잘 먹혀 들고 있지요.


그럼, 과연 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도대체 번영과 형통이 악입니까, 선입니까?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어느 쪽일까요?


이번 주말에 설날을 맞아, 사람들은 서로를 축복하고 덕담을 합니다.
다들 복 받고 서로 잘 되고 건강하기를 빌어 줍니다.
심지어 '민족대이동'을 통해 고향 또는 친지를 찾아 온 강토를 누비면서까지 그렇게 합니다.
모두 진심으로 그렇게들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서로 잘 되고 번영하고 형통하길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지요!
서로 복을 빌어 준다고 해서 미신도 아니고, 구태여 모두 꼭 기복주의인 것도 아니며..싸구려 '번영복음'도 아닙니다.
인생은 복을 바라고 빌어 주는 존재이며, (일반은총이라고 말하는) 기본적인 복을 현재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도대체 복과 번영, 형통의 뭐가 잘못이라는 겁니까?!

행여 번영과 형통 자체가 나쁘다면.. 우리는 설날 덕담도 그쳐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잘 되길 바라는 말도 마음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번영과 형통, 성공은 서로를 위해 빌어 주고 또 각자가 누려야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과 가정과 회사가 성공하지 못하고 번영하지 못하고 형통하지 못한다면, 잘 안 되고 못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살림이 펴지 않고 고생하게 마련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풍요롭고, 번창하고, 사역이 성공해야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세상이 빌어주지 못하는 복-곧 먼저 영혼이 잘됨-까지 빌어주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신약 성경에서 장로는 성도에게 "사랑하는 님. 님의 영혼이 잘 되듯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길 빕니다"라고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계에 잘못된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정반대인 극과 극의 흐름입니다.
 
위에서도 비쳤듯, 한 흐름은 교회가 마땅히 누려야 할 성도의 복과 번영, 형통과 성공을 모두 싸잡아 '기복주의'로 매도하고, 아예 부정하고 불신하는 흐름입니다. 그 결과 가난한 성도는 더욱 가난해져 가고, 교회는 자산부족으로 날이 갈수록 사역 규모가 줄어들며, 본디 재력과 자산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자기 힘을 믿고 살게 됩니다.

다른 한 흐름은, 복과 번영, 형통과 성공을 극대화하여 '번영복음'으로 만들어, 개체교회 또는 개인이 치부하고 사치하면서, 일부만 잘 먹고 잘 살고 일부만 잘 쓰고 잘 지내는 삶으로 치닫습니다.
물질/영달 위주의 저급한 교회가 되기 십상이라는 뜻입니다. 

미주 한인교회들 중에는 연예산이 몇 백 만 달러요 얼마요..떵떵거리면서, 연말연시 주변의 가난한 목회자들이나 성도를 돌보거나 '설날 떡국잔치' 한 번 벌이는 교회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 사회나 언론 같은 데서 그런 운동에 나서는 것을 보곤 합니다.
명색과 간판을 내미는 그럴 듯한 일도, 꼭 '수평이동' 내지 수평흡수를 염두에 둡니다.

주변의 작은 교회들을 모조리 수평이동 흡수 대상 또는 '조무라기' 경쟁 상대로 보기 때문에 외면하고, 선교한답시고 멀리 해외에 거창한 이름을 내어건 사역에만 왕창 왕창 돈을 씁니다. 그러면서, "억울하면 성장해서 우리처럼 대형교회가 되라..개꿈이나 꾸지 말고 큰 비전을 가져라. 하려면 좀 큰 일을 해라!"고 은근히 기세를 부립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왜 부정적인 비판만 일삼냐? 긍정적으로 살라"고 충고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교회의 자기착각이요, "주체할 줄 모르는" 비대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런 교회에겐, 형통과 번영이 역설적으로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러다 보면, 여기엔 실상 '기복주의'적 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덕에 도무지 보답하는 것 없이, 그저 "달라, 달라, 달라!", "바쳐, 바쳐, 바쳐!"로 일관하는, 일그러진 삶입니다. 물론 대형교회가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면 초기교회는 규모를 막론하고 서로 돕는 교회들이었지요. 


위의 두 극단은 다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흐름이요 잘못된 열매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1. 이 두 극단을 피할 것,
    2. 균형을 갖출 것

    - 두 가지입니다.

물론 신자들은 다들 잘 되고 잘 누리되, 잘 써야 합니다!
다들 영혼도 잘 되고 범사에 잘 되어 풍요롭고 건강해야 합니다.

방법만 올바르다면, 잘 벌고 잘 되는 것 자체가 나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잘못 쓰고, 잘못 누리는 데 있는 겁니다.
복음을 역이용해 개인이나 이득을 챙기겠다면, 그건 그 개인의 생각과는 달리 "잘 누리는" 게 아니지요.


이미 티엘티의 수많은 글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사도 요한의 기도대로 신자들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라고 누누히 말씀드렸습니다.  

누가 이 성구를 몇 박자 복음, 무슨 박자 복음으로 써 먹는다고 해서, 또는 누구 꼴 보기 싫다고, 그에 대한 거부감과 역반응 탓에 성경의 진리까지 부정하는, 획일주의적 우를 범해선 안 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손해일 뿐입니다.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중요하며, 그 진리를 내가 활용하느냐,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의 무수한 약속들이 그림의 떡일 뿐이라면, 내게 무슨 소용입니까?
하나님은 그처럼 알량한 귓전 뉴스를 복음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실로 내게 복되고 유익하고 기쁜 소식이기에 복음인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성도들이 잘 되길 비는 복음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주/천지 창조 때, 모든 창조물이 잘 되고 번창하고 번성하고 복 받기를 선언하셨습니다!
온 인류가 형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안 되고 저주 받기를 선언하시지 않았습니다. 잘 안 됨과 저주는 모두 죄와 마귀 탓에 온 것이지요.

성도는 먼저 영혼이 잘 돼야 합니다.
거듭나야 하고, 성령충만을 누리고, 은사를 활용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울러 성도는 범사가 잘 되어야 좋습니다. 만사가 형통해야 옳습니다.
성도는 가난과 결핍이 아닌 풍요를 누리게 돼 있습니다. 누려야 합니다.
성도는 영육 간에 강건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가난의 신이 아니시고 전능과 권능과 풍요와 치유의 신이시기 때문이지요.  
 
성도는 늘 "가난해야 한다"고, 천주교 수사들과 관상가들이 퍼뜨린 '청빈' 사상에 속지 마세요.
그러기에 관상기도를 중심한 관상영성은 교회에 가난을 몰고 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과 한국 교회가 서서히 가난해져 갑니다. '기복주의'라는 주장 떄문에 십일조 정신이 사라지는 탓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가난은 심령의 가난이지, 육신과 물질의 가난이 아니지요.
예수님마저도 물질적 가난의 흔적이 좀체 보이질 않습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찢어지게 가난한 거지 신세가 되셨다는 게 아니라, 하늘 보화와의 비교 차원에서입니다. 주님은 찌들어진 면걸(免乞) 신세로 사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참조: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주님이-가난해지셨다는-의미 )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늘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셨지, "나와 함께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태초부터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누구나/무엇이나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신자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받은 번영과 형통과 성공과 풍요와 건강은 잘 써야 합니다.
이 다음, 내세에 주님 앞에 설 때, 구원만 달랑 받거나 부끄러운 구원만 받지 않고 하늘나라 상과 금관을 받기 위해선, 교회나 개인이나 이 세상에서 잘 쓰고 잘 뿌리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 경고받은 라오디케아 교회처럼 "아, 난 풍요롭구나. 부족한 게 없다"라고 자화자찬하고 자가만족하는 교회라면, 주님 경고대로 썩고 망할 교회입니다(요계 3'17 참조).
에페소교회처럼 과거 가난할 때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던 첫 사랑을 잃지 말고, 잘 되고 풍요로울 때도 끝까지 지탱하려면, 챙기기만 하거나 가진 자산을 꼭꼭 동여 싸서 끼고 있지 말고, 흩어 뿌려야 합니다.

그것이 더 큰 것을 맡아 할 수 있는 올바른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대형교회인 예루샬렘교회는 처음부터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아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자,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초기 이방인 교회들이 심한 가난 속에서도 거금을 모아 예루샬렘교회를 돕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분께 영광 돌리는 교회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되찾는 교회들이길 바랍니다.


티엘티의 모든 독자들은
성경대로
영혼이 잘 되고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여..
늘 바로 쓰고 바로 누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