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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요 5:1-9] 베데스다의 놀라운 변화

            베테스다 못의 유적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5'1-9


[ 요한복음 묵상 시리즈와는 별도의 메시지입니다. ]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변화를 겪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지만, 그보다는 부정적인 변화가 더 많은 것이 인생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부정적 변화-큰 불행 같은 것이 찾아오면,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기 쉽지요.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은 그런 부정적 변화가 오래 지속되는 경우입니다. 


지인이 경영하는 병원 얘기를 들어 보니, 요즘은 입원하는 성인병 환자들 가운데 젊은이들이 부쩍 늘고 있답니다. 20대의 젊음 때 건강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풍이 들어, 60대가 되도록 고생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바탕본문에 나타난 중증/말기 환자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언제부터인가 문득 부정적 변화가 시작되어, 마침내는 삶이 비참하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무려 38년...그러니까 거의 40년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는 이 병을 앓아왔습니다. 실은, 예수님 나이보다 더 긴 세월입니다. 

말이 40년이지, 거의 평생인데 얼마나..지겹습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미 삶을 포기했을지 모르지요. 당대의 불치병입니다. 그의 젊은 시절 가깝던 친구나 주위 사람들이 다 떠났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가족들만 그가 굶어 죽지나 않게 돌보며 근근히 살아온 모양입니다. 
 
헤제키야(히스기야) 왕이 건설한 방대한 예루샬렘 수도 시설과 연결된, 이 베테스다( 베데스다) 못 주변에는..5개 행각이 있었습니다. '행각'(行閣)이란 주랑()과도 같은 말로, 벽 없이 지붕과 기둥만 있는 건물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은 이 주랑들 중 하나로 그를 수시로 데려오거나 거기서 한참 지낼 동안 먹을 빵을 갖다 주었거나 그런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이처럼, 장기간 양로원 같은 데서 홀로 투병하거나 외로움을 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흔하지요.
 

그런데 한 가지, 놀랍게도 이 환자는 이 병을 불치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죠. 
사실은, 이 기나긴 세월동안 한결 같이 한 가닥 소망에 모든 것을 걸고, 그것만을 목적으로 지내왔습니다. 비록 그 목적마저도 그를 계속 배신해 왔습니다만. 

그것은 베테스다 못의 물이 움직일 때, 남보다 먼저 가서 몸을 담그는 기회였습니다. 천사가 이따금씩 내려와 소용돌이처럼 물을 흔들어 놓고 가면,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전설 같다는 말은, 천사가 정말 설령..비록 물을 흔들어 낫게 해 준다고 해도, 그 혜택을 받는 사람이 매번 딱 한 명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황당하기 때문이죠. 환자들만 옹기종기 모여 지내는 여기에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환자는 지난 약 40년간 그러고 있었습니다. 40년간 천사가 과연 몇 번이나 내려와 물을 흔들어 놓고 갔는지는 몰라도, 그는 늘 누워있는 몸으로 여태 단 한 번도 먼저 내려가서 몸을 담가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다른 동료 환자들이 먼저 내려가곤 했지요. 

이 5개 주랑엔 온갖 질환자들, 장애인들, 혈기마른 사람 등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물이 움직이는 순간을 벼르고 있다가, 그런 기미가 보였다면 저마다 먼저 물에 들어가려고 허둥지둥, 허겁지겁 서둘러 내려갔기에 아마도 아수라장이었을 것입니다.  

베테스다 못물의 움직임..그것은 소수에겐 긍정적 변화였을망정, 주랑 주민들 99%에겐 부정적 변화였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현대 사회랑도 닮은 모습인지요.
바로 우리 주변 사회의 모습 아닙니까?

영어엔 "The early bird catcheth the worm."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존 레이의 17세기 영어 격언모음에 처음 기록된 문장이었지요.  
일찍 깨어 날아다니며 설치는 새가 일찍 먹이/벌레를 잡는다는 말로, 결국 생존경쟁을 부추기는 말 같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면, 성공을 위해서는 미리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  
이러니,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먼저 온 자, 경쟁에 이기는 사람이 임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암만 미리 준비하고 노력해도 전혀 이것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여기 이 불쌍한 환자는 같은 주랑의 동료 환자들 눈치를 봐서 물의 움직임을 미리 대기하고 일어나 봐야 언제나 늦습니다. 그것도 무려 40년이나요!
아무도 그를 데리고 떨리는 물결 가까이 미리 가 주지 않습니다. 각각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서는 주로, 오직 스스로 돌봐야 하는 무서운 경쟁사회입니다. 
여기 긍정적인 요소가 얼마나 될까요? 철저히 부정적인 사회입니다. 

이곳에 갇혀 있다시피 해온 이 '38년 환자'는 처음엔 경쟁자인 환자들, 동료들을 어지간히 원망하고 미워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봐야 득될 것도 아무 것도 없으니 이젠 그나마 지쳐서 그런 감정도 무뎌졌거나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희망도 점점 엷어지고 옅어져 갑니다. 가냘프게 희믜한 불빛처럼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 환자들은 그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뒤처져 자신이 혜택을 못 받을 때마다 한탄의 신음 소리를 내뱉거나 으드득 이를 갈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베테스다..그곳은 소문과는 달리, 또 하나의 지옥일지언정 치유의 낙원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들의 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 어느 날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이 가련한 인생-'38년 환자'를 구해 주러 오신 예수님입니다.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딱 한 명이 움직이는 물로 낫는다는 전설처럼..
주님은 이곳의 수많은 환자들중 딱 한 명을 고치시러 온 셈입니다. 
그 숱한 세월동안 가물가물 꺼져가는 등불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버티던 환자에게 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고, 진리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예샤야후=이사야 42'3). 


본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이 환자의 병이 이미 오래 된 줄 알아 보셨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계시 은사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성령을 기름 붓듯, 물 붓듯 한량 없이 부음 받으셨기에(행전 10'38) 사람의 속도 꿰뚫어 보시곤 하셨습니다. 


아무튼,
주님은 그 오랜 세월,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한 가닥 치유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던, 끈질긴 목숨과 끈끈한 희망줄을 잡고 놓치 않던 이 환자를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38년 환자에게 남은 희망과 가녀린 믿음, 그것이 그의 긍정적 변화의 씨였습니다. 

바로 이 온정, 긍휼, 자비와 사랑이 주님을 이곳의 그에게 찾아오시게 했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주님은 그의 흐릿한 눈빛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과 일말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대는 낫고자 하오?"

그러자 환자는 이 점잖고 고상해 뵈는 분이 누구이기에 나를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다음 순간, 그는 잡고 있던 지푸라기 대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희망을 걸어 봅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 저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제가 갈 동안 남이 먼저 내려가 버리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한없이 측은히 여기시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그대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오." 

예에..?? 놀랍지 않습니까? 
웬만한 사람 같으면, "헐~! 뉘신지 모르오나 제가 여기 이러고 있은 지가 38년째이걸랑요. 그런데 저더러 일어나 걸어가라니..어찌 그런 말씀을..? 지금 절 모독하기로 작심하신 겁니까? 물이 움직일 때 데려가 주겠다고 하시진 못할 망정.. ㅠㅜ"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니오..이 환자는 뭔가 직감했습니다. 
감이 왔습니다.

    때는 왔구나..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때가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상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말만 듣고,
그 말에 순종하여, 
정말 그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깔자리를 털어 그냥 걸어갔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죠. 
38년 고질병이 순간 영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떻게요? 물론 주님의 긍휼과 치유의 권능이 작동되기도 했습니다만..
그가 그 말씀대로 순종할 마음을 갖는 순간 치료됐습니다.  
주님은 예호봐 라파..곧 고치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런데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으니, 환자든 신유은사자이든 누구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히브리서 11'6). 


이래서, 이 사람의 지속적인 부정적 변화는 38년만에 종결되고, 모처럼 일대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젠 더 '38년 환자'가 아닙니다! 여느 환자도 아닙니다. 
이젠 더 베테스다 주랑 신세를 질 필요도 없습니다. 동료 환자들과 너네나네 티격태격 부정적인 경쟁을 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와 그를 돌봐온 가족의 기쁨과 보람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겠지요. 
그날부터 그의 가정은 천국이고 낙원이었을 터입니다. 

경쟁사회의 상징이다시피 했던 베테스다 못은 이제 복음과 변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젠 믿음으로 천국을 침노하여 차지하는 선하고 긍정적인 경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마태복음 11'12). 
희망과 빛, 예수님이 찾아오셨기 때문이지요. 

언제 천사가 와 흔들어줄지 모를, '능력' 있고 발빠른 특정인을 위한 "움직이는 못물"은 이제 의미와 필요성이 없고..
말씀에 귀 기울여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은총과 평화와 복과 치유가 누구나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의 생명수 샘물이신 우리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 할렐루야! 


이 38년 환자의 "내 때", 그것은 바로 나의 "내 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복음은 남의 것이기 전에, 우선 먼저 나부터 맛보고 내가 거듭나고 내가 체험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복음이 제아무리 좋아도, 내가 그 혜택의 대상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며 무슨 기쁜 소식입니까?
남이 아무리 병이 나아서 내가 기뻐해 주어도 내 병이 낫지 못하면 그것은 사실상 신소리이지 달콤한 소리가 될 수 없죠. 


우리 삶에 긍정적인 일대 변화가 주로 언제 찾아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는 '예'요,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참되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이 참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게 생명이 되고 치유가 되고 번영이 된다고 고백해야 좋습니다. 


일찍이 하나님 말씀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우리는 거듭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른 때, 바른 기회에, 바른 음성에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이 환자가 이 일대 호기를 놓치고 주님의 제의를 부정적으로 거부했다면, 그는 못에서 계속 더 기다리다가 결국 죽어갔을 것입니다. 긍정적 변화를 볼 기회를 영 놓쳐 버렸을 것입니다.  


독자는 지금 부정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바로 지금이 주님을 찾을 기회입니다.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이 환자는 주님이 찾아오셔서야 그 말씀을 들을 기회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주님의 말씀을 모두 다 기록한 성경책이 늘 있지 않습니까?

성경의 모든 약속은 참이요 진리입니다! 
성경이 약속해 놓은 모든 것은 믿는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에는 불치병의 치유도 포함됩니다. 

사람으로서는 절망 뿐인 부정적 상황도 믿음으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부정적 변화는 오직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긍정적 반응으로 긍정적 변화로 바꾸어집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이 말씀에 순종합시다. 
긍정적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무조건 긍정을 부르짖는, 노먼 빈슨트 필 유의 세속적인 긍정철학과 혼동하지 맙시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진리입니다. 
그 말씀에 '예~!'와 '아멘!'으로 반응하자는 것입니다. 
분별을 하려면, 올바른 분별을 제대로 합시다. 


티엘티 모든 독자에게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 응답과 
은총, 평화와 복이 넘치길~!

전능한 주 예수 크리스토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