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레네
http://blog.naver.com/yoochinw/130042187003
지역사회변혁에 관한 유명한 '트랜스포메이션(변화/변혁) 비디오에 관련된 글을 번역했습니다. 도시선교/지역사회선교에 관심있는 분들은 모두 한번 보았을 만한, 널리 알려진 비디오입니다만, 새로운 관점에서 비디오를 평가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번역글을 올립니다. 원문과 비디오 예고편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가 더욱 기도해야 하며, 기도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기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의 바른 자세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찾아서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삶에 더 많은 기도를 편입시키려는 운동이 몰려 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습니다. 합시다."
여러 나라들에서, 특별히 4개 지역에서 생긴 결과에 대해서 매우 대담한 주장을 하는 비디오가 전세계적으로 교회들을 파고 들고 있다. 이것은 "트랜스포메이션(변화, 변혁)"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비디오에서는 이런 용어들이 제시된다. "인구의 92%가 거듭난 지역사회를 상상해 보라; 범죄감소로 인해 도시의 감옥들이 문을 닫았다; 농업생산성이 성경이 말하는 비율에 이르렀다." "상상해 보라 - 지역 술집들이 교회로 바뀐 마을; 조상의 사당들이 파괴된 마을; 문중 전체가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들어온 마을. 상상하지 말라...믿어라!"
카리스마 잡지, CBA 마켓플레이스, 국가기도위원회가 이 비디오를 추천했다. 기도(운동)와 복음전도에 관련된 수많은 사역들이 이 비디오를 그들의 웹사이트를 통해 배포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YWAM(예수전도단), 미국국가기도위원회의 "기도부흥비디오" 섹션, 그리고 CCC, 프라미스키퍼스와 어글로우 등이 있다. 추천사들은 처치온더웨이의 잭 헤이포드와 케네스 해긴으로부터도 나왔다.
그들은 이렇게 선전한다 -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정말로 움직이신다는 것을 교회들과 공동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 비디오를 추천한다. 올 6월 버지니아 우드브리지에서의 도시변혁 컨퍼런스에서 가진 시사회에서, (엔딩)크레딧이 시작하자, 500명이 넘는 전체 관중들이 찬양으로 펄쩍펄쩍 뛰었다 -- 비디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진정으로 찬양하는 마음에서. 이 박수는 5분이 넘도록 지속되었다."
"트랜스포메이션(변화)" 비디오는 지금까지 3500만명이 시청했다. (2002년 현재/역자) 트랜스포메이션 비디오는 2000년 CBS TV 방송에서 방영되었다. 다양한 미디어 연합의 홍보 덕분에 이것은 대세가 되었다. 비디오에서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주장들을 점검했는지 의문스럽다. 이것은 "이제 150개국에서 판매되며, 거의 1000곳에서 비디오에 묘사된 것을 경험하려고 크리스천들이 연합기도로 모이고 있는 것을 안다." (소스: 조지 오티스 주니어) 비디오의 배급은 "실로 폭발적이었다"고 페트리는 말한다. 8만 카피가 넘도록... 40개의 국제 사역이 이것을 사용한다. 이것은 25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는 아랍어, 만다린(북경표준어), 중국어와 히브리어가 있다.
"그릇된 보도"를 했다는 비평을 받을 수 있는 만큼, 이 보도는 정직한 진리추구 안에서 했어야 할 것이다. 여느 사람처럼 우리도 최상의 결과를 바라긴 했으나, 단지 증언만이 아니라 사실들도 들여다 보려고 했다. 우리는 누가 이 기사를 보면서 "무엇하러 기도하는가?"라고 생각하게끔 그를 실망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이것은 본 기사의 작성을 도운 사람들의 의도나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믿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청하는 것에 관련해서 그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우리는 기대한다.
하지만 만약 사실상 기도가 이룬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기도가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만약 사실상 비성경적인 방법이라면, 그 어떤 기도의 방법을 추천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제작된 이 비디오 프로덕션의 수면 아래를 들여다 보며 우리가 발견한 것에 대해, 우리는 충격 받았고 당혹감을 느꼈다.
백그라운드
조지 오티스 주니어는 "저명한 조사연구가"라고 불린다. 비디오의 진행자로서 그는 콜롬비아 칼리로부터 캘리포니아 헤멧, 과테말라 알모롱가, 케냐의 키암부를 여행한다. 이 네 도시들은, 기도할 때 어떤 전략들(영적전쟁/기도공식)을 따름으로써 일어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델로서 다루어진다.
(비디오) 웹사이트에서 "센티넬(파수꾼, 비디오 사역의 이름/역자)"은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을 단호히 고수할 것을 맹세한다. "모든 사실들은 점검되고 또 점검되었다. 복수의 취재원이 참고되었다. 흥미본위는 회피했다. 정직은 센티넬의 리더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다." 오티스는 그가 연구가일 뿐 아니라 꼼꼼한 연구가임을 암시한다. 그가 하는 것이 연구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지역사회 변혁으로의 이정표를 읽는 데 수년을 보낸 사람"이라고 나타나 있다. (비디오에서) 은밀하게 증진되는 것은 마귀의 요새(견고한 진)를 묶고, 파하고, 무너뜨리는 영적 전쟁이다. 그는 비디오의 시작에서 "지역사회 변혁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씨름하는 개념이다"라고 바로 짚었다. 그래서 그는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이런 변혁이 일어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비디오는 센티넬그룹이 저작권을 가지며, 글로벌네트프로덕션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사이트를 방문하면 C. 피터 와그너가 쓴 [당신의 도시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방법론에 대한 책들과 비디오들을 볼 수 있다. 그 사이트에서 증진되는 것 모두를 살피려는 것이 이 기사의 포인트는 아니다. 하지만, 와그너와 기타 사람들과의 연관은 이 비디오의 참 의도와, 비디오 도처에 나오는 키워드가 뜻하는 바를 보여준다. 스스로 말하듯이 와그너의 사역의 철학은 성경적이 아니고 실용적이다. "...우리는 목적이 방법을 정말로 정당화함을 확실히 보아야 한다. 이것 말고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만약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 내가 겨냥하는 목적을 달성한다면, 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좋은 방법이다. 만약, 반대로, 내 방법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계속 사용하는 것을 어찌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피터 와그너, "당신의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 - 건강한 교회의 일곱 생명 징후들" - 강조는 원문에 따름) 따라서 효력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와그너에게는 상관이 없다. 비디오 속의 많은 사실들은 잘 작동되는 것처럼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것이 작동되기를 바라는 나머지 이것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이 경우에는 기도를, 그들의 근거로 삼는다. 적절한 조사도 물증도 제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은 종종 근거없는 증명되지 않은 증거를 사용하는 '제삼의 물결'(the Third Wave) 지지자들에게 전형적인 것이다.
조지 오티스 주니어는 기독교 연구 정보 단체인 센티넬 그룹(Sentinel Group)의 대표이자 A.D. 2000 기도트랙연합 (United Prayer Track) 코디네이터이다. 와그너는 기도트랙연합과 AD 2000 운동(AD 2000 and Beyond Movement)의 영적 전쟁 네트웍의 국제 코디네이터로 활동했으며, 글로벌하베스트(Global Harvest) 교회의 설립자이다. 조지 오티스 주니어는 비디오에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나온 훌리오의 아내인 룻 루이발 목사가 시무하는 콜롬비아 칼리에 있는 교회의 당회원(이사)이다. 그는, 영적전쟁, 제삼의 물결 그리고 새 부흥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들과 함께 영적 전쟁 세미나에서 발표를 해왔다. 그의 몇 권의 책들은 피터 와그너의 "영적 요새(견고한 진) 분별하기" (Discerning Spiritual Strongholds) 코스의 필독서이다. 그 중에는, 영적 매핑 현장조사 매뉴얼(Spiritual Mapping Field Research Manual), 마지막 거인(The Last of the Giants), 여명의 미로(The Twilight Labyrinth)가 있다.
오티스는 "영적 교두보" 단계로부터 "영적 돌파"로 그리고 "영적 변혁"까지의 지역사회의 진보를 측정하는 28단계의 등급을 발명했다. 영적 매핑 단계는 제9단계까지는 시작되지도 않는다. 오티스는 지적한다. "그 지점에 이르면 당신은 지역사회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강림을 청원하는 핵심중보자들를 갖게 된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1998 1월호) 기실, '영적 매핑'이라는 용어는 1991년 조지 오티스 주니어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것을 "주어진 지역사회에서 부흥의 방해물을 진단하는 훈련"이라고 정의하며 말한다. "강렬한 기도와 부지런한 탐구를 통해, 실행자들은 영적 차원의 조망(landscape)을 잴 수 있으며, 세속세계와의 사이의 도덕적 관문을 분간할 수 있다."
피터 와그너가 설립했거나 참여한 많은 그룹 중의 하나인 와그너세계기도센터는 '예언적 장로들의 사도협의회'라고 불린다. 이 집단은 기도와 영적 전쟁에 있어서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사도적 장로로는 척 피어스, 더치 쉬츠, 신디 제이콥스, 마이크 비클과 토미 테니 등이 있다. 이 그룹은 2000년 2월말 콜로라도에서 만난 후 성명을 발표했다. 뛰어난 예언은사를 가진 리더들을 위한 공동포럼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협의회는 1월 기도센터에서 가진 비슷한 모임에서 태어났다. 모든 도시에는 그 도시를 통솔할 사도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와그너는 또한 "도시사도들: 도시변혁을 위해 지역사도들을 동원하기"라는 새 책을 출판했다.
신디 제이콥스는 "영적 전쟁 전문가"이자, 열방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대적의 문을 취하라 - 전투적 중보자를 위한 훈련수칙"이라는 책을 썼는데, 피터 와그너가 서문을 적었다. (여기서 그녀는 와그너가 그녀의 멘토라고 말한다.) 많은 새로운 개념들이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기도 중의 웃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거나 응답이 오는 중임을 의미한단다. 본 필자가 아마도 해당 장절을 성경에서 놓쳤나 본데 혹시 찾는 데 도와줄 사람은 없는가? 그녀는, 복음전파를 막는 하늘의 요새(견고한 진)를 파하는 예언적 중보기도를 사용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제이콥스는 "늦은비"의 '승리자' 교설을 고수한다. 그것은, 종말교회가 남자아이(manchild)를 낳는데, 이것이 세계적 부흥이라는 것이다. (이에 관한 유일한 성경적 전례(前例)는 계시록 7장에 나오는 대환난이다.) 중보기도의 장군들은 신디 제이콥스가 이끄는데, 그녀는 더치 쉬츠가 목회하는 빈야드 교회에 출석하며, 선지자 릭 조이너가 추천한 "하나님의 강"이란 책을 썼다.
피터 와그너의 예언적 장로들의 사도협의회
협의회의 예언 중의 하나는 이렇다. "교회는 2000-2003년에 핵심전환기에 있을 것이다. 이 기간 중에 특히 젊은이들이 부흥으로 전환할 것이다.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풀으시려는 변혁을 보려면 2003년 10월까지 우리의 도시들에 사도적 통치체제가 세워지고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8년, 오티스의 센티넬 그룹, 와그너의 글로벌하베스트 교회와 테드 해거드(후에 동성애 성추문을 일으킴/역자)의 기독정보네트웍은 콜로라도 스프링즈에 있는 해거드의 뉴라이프교회 구내의 하이테크 세계기도센터로 들어가기로 계획되었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1996년 5월호) 이 모든 것이 수석 엔지니어인 와그너 산하로 모여있다. 그는 말한다. "중보자들을 서로 연결하고 그들이 성령께 들은 것들을 서로 알게 해 주는 이 전자신경센터 작동의 중심체는 영적 매핑이 될 것이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1998년 1월호) 이것은 영적 존재들의 도시적/국가적 전투에 참여하는 크리스천들의 CIA 비슷한 것이 될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이 "영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를 다른 이들에게 퍼뜨릴 것이다.
여기 은밀히 연관된 에드가르도 실보소는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도시들을 점령하기"라는 책을 썼다. 세계가 믿기 위해서는 일치가 필수적이라고 그는 믿는다. 초대교회에 일치가 없었는가? 그 때는 세계를 이겨서 그리스도께 바쳤는가? 뭐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하나님께서 결과를 얻기 위해 새로운 길과 방법들을 보여주셨다고 우리는 듣는다 - 그들이 하는 말이다.
로사리오 시 반경 100마일(160Km) 이내의 교회들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은 1985년 메리길도(Merigildo, 그 지방의 강력한 주술사/역자)의 영의 권능을 부순 기도팀의 덕분이라고 실보소는 말한다. 실보소는 또한 토론토 블레싱/거룩한 웃음, 성령에 취함을 지지한다. 신디 제이콥스는 수년간 이 영적 전쟁 운동에 관여했으며, 로드니 하워드 브라운의 거룩한 웃음운동의 선배뻘인 에드 실보소의 아르헨티나 부흥에 관여했다. 이것이 후에 토론토 블레싱이 되었고, 펜사콜라로 전이되어 이제 브라운스빌 부흥이 되었다.
에드 실보소는 말한다. "음. 우리가 가는 도시에서마다 우리는 토론토 블레싱을 본다. 나는 이것이 정말로 블레싱(축복)이라고 믿는다...토론토 블레싱을 교회에서 내쫓아야만 한다 - 교회로부터 세상 속으로! 만약 이웃의 기도집마다 [필자 생각에, 토론토 블레싱이 뭔지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주는 듯한] 예수님의 나타남(발현)이 있으면, 모든 이웃 주민들이 그 집으로 몰려들 것이다." 그는 "교회에서 내쫓는" 선에서 끝냈어야 했다. 오늘날의 부흥들에서 이것(나타남)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지를 고려할 때,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정의가 분명히 필요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토론토 블레싱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예수님의 나타남인가? 모든 이웃 사람들이 토론토에서와 같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싶은가?
에드 실보소는, "기도 전도"를 주도구로 사용해서 모든 도시들에 예수를 전파하는 성경적 원형(原型)이라는 것을 개발했다. 이것은 1994년 이후 세 대륙의 16개 도시에서 구현되었다. 이런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보면, 우리는 이 비디오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게 된다. "지저스라이프'라는 잡지는 에드 실보소와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의 부흥과 복음전도에 대해 물었다:
에드: 기도 전도는 기본적으로 디모데전서 1:15부터 2:8까지에 있는 것을 구현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5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너를 위한 명령이 있는데, 네가 이를 지키면 성공할 것이다." 함축된 내용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진리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변화' 비디오에서는 죄와 회개를 말하지도 않으며, 복음이 명확히 설명되지도 않는다. 복음이 언급될 때에는 자주 표적과 기사와 연관지어진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오티스 주니어의 신학(이렇게 불러도 된다면)은, 최소한 정통 방식으로는 그런 견해들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경적 복음전도, 적어도 스펄전이나 훌륭한 선배들이 이룬 복음전도방식에는 반하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배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보려면 이 웹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오티스의 "그들이 절대 몰랐던 하나님"이란 책을 일부 인용해 본다. ("죄는 병이다-잘못된 개념 1"이란 장에서):
"무엇보다 겁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크리스천들이 시류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특출한 기독교 저술가는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한 죄가 (아직 그의 허리에 있던) 모든 인류를 죄와 사망의 병으로 감염시켰다고 주장하며, '죄의 감염'을 언급한다. 그 때 이후로의 모든 사람들은 사망을 선고받은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는 오직 하나의 치료법 밖에 없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성경 어디에 죄를 병과 약함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p. 57 그는 (칼) 메닝어 박사(심리분석학자/역자)를 우호적으로 인용한다.] 그리고는 다음 장에서 원죄 교리를 세운 이 중대한 실수를 어거스틴의 탓으로 돌린다.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동정녀 탄생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죄인인지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아닌가? 우리가 죄 없이 태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죄를 짓기로 마음 먹는다는 것인가? 어거스틴이 이에 대해서 처음 쓴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죄가 정의되지 않은 막연한 환영으로 남아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죄의 승리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죄가 성경을 통해 철저하게 확인되지 않았는가? 사람들을 속박해 온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라, 타고난 곤경인 죄성 속에 사는 것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다.
"죄성은 습관적인 방종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발달하며, 그 결과로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다. 바울은 이런 상황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것과 싸울 수 없음을 로마서 7장에서 언급한다. 따라서 우리는 죄성은 존재하지만 이것이 선택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 불순종의 선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오티스는 답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빈약한 예들을 든 것 외에는: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나 죄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선택에 의해 비롯된다는 것도 역시 알아야만 한다. 이것의 좋은 예로는 헤로인 중독에 속박된 마약중독자이다. 그는 마약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근원은 그의 선택 속에 있었다." (p. 76)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그렇게, 아직도 그릇된 나무 열매를 먹으려고 선택하고 있지는 않다. 오티스 주니어에 따른다면, 우리는 선택에 의해서 죄의 성향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최악의 경우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히 선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의 신학을 따르자면 이것이 그가 뜻하는 바이다. 새로운 성품을 갖지 못한 불신자는 죄 지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어떤 죄를 짓느냐 하는 것뿐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몸에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혔다." (p. 93)
만약 예수께서 죄의 빚을 갚지 않으셨다면 누가 갚았는가? 이것이 복음이 아니더란 말인가?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히브리서 9:15)
"하나님이 우리 대신 그를 벌하심으로 그는 우리의 대리가 되었고 우리는 죄의 노예시장에서 도로 사들여졌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고린도전서 6:20, 7:23)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0:28)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그리스도는 우리 죄로 인해 희생제물로 죽으셨다. 크리스천이 되려면 우리가 죄인이고 다른 분 즉 그리스도에 의해 죄값이 지불되었음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지불하거나 모른 체 할 수 없다. 이를테면, 우리는 죄의 노예시장에서 도로 사들여졌고 예수께서는 그 모든 값을 치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십자가에서 "테텔레스타이"(모두 이루었다)라고 하신 이유인데, 이것은 1세기에 채무에 관한 계약서에 사용된 용어이다. '모두 이루었다'는 것은 죄의 부채가 갚아졌다, 모두 갚아졌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예수께서 문자적으로 그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사셨다는 전제를 받아 들인다면, 이것은 보복적이고 피에 주리고 성경적 용서와 전혀 모순된 모습으로 하나님을 그릴 뿐 아니라 아울러 심각한 어려움을 일으킨다. 예수께서 문자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갚은 빚은 더 이상 빚이 아니다), 그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면, 우리는 단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에 대한 신학적 단어는 보편구원론으로, 이는 단순히 모든 세계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p. 109)
위의 주장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된 대속을 오해한 것이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8)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요한계시록 1:5)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6-10)
"그래서 속죄는, 하나님의 죄관(罪觀)의 피나는 실현 속에 있었고, 자기 죄책과 책임을 인정하는 죄인들을 겸손하게 하는 능력 속에 있었다. 사람이 이런 조건 하에 있을 때, 하나님은 현명하게도 그를 용서하시고, 화해가 일어난다." (p. 116)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로마서 6:10)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가의 문제이다 -- 그것이 결정적 쟁점이다. 정말 그리스도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추측하듯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시는가? 왕의 왕께서 쓰레기더미를 다스리러 오시는가? 죄인의 상태는 구원과 상관없다는 개념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와 구원의 성질에 대해서 모르는지를 나타낼 뿐이다." (p. 141)
나는 오티스가 암시하는 것 모두를 알지는 못하겠지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깨끗한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고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공로 없이 받는 호의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우리가 절망적으로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로마서3장; 마가복음 7장)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7)
비디오에서 오티스와 나레이터는 이런 키워드와 핵심구들을 사용한다: "청사진", "현상", "지구적", "영적 뿌리", "영적 분위기", "변혁", "도시의 영적 DNA" 등등. 이런 단어들과 개념들은 성경과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며,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들이 설명되는 방식은 더욱이 그렇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당신은 기도에 반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할지 모른다. 만약에 이것이 바른 기도라면, 그래서는 안되며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릇된 동기뿐 아니라 그릇된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도 훈계를 받는 터이다.
특정 종류의 기도 또는 기도 준비에 의한 지역사회의 영적 DNA를 바꾸는 예는 이런 "성령의 움직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것을 "변혁"이라고 부른다. 비디오는 전체 도시와 사람들이 '변화'된 것을 보여준다. 사실은 도시의 영적 DNA라는 것은 없다 -- 그 도시가 기독교적이든 아니든. 이것은 전술한 사도들/선지자들을 통한 새 계시들에 의한 정보이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보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 운동과 이 비디오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열쇠다. 그렇게 해야 이 비디오 연출의 참된 의도를 알 수 있다.
이 도시들의 문제점을 규명함에 있어 영적 매핑의 개념은 계속 언급되고 아주 중요하게 여겨진다. 도시들의 영적 DNA가 바뀌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성경은 이런 기도행위에 대한 어떤 가르침도 제공하지 않는다. 초대교회는 이런 신기술 없이 어떻게 새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었나? 복음전도와 제자도는 진부한가? 그들이 제시한 이런 식의 기도가 부흥 역사 속에서 사용된 적이 있는가? 그들은 실제로 그런 기도를 해 보기나 했는가?
한 도시가 통째 변화되는 개념은 성경적이다. 이것은 오직 한 번 발생했고, 요나에게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그런 발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것이 일어났을 때 화를 냈다. 비록 그가 도시를 질러 걸으며 설교했지만, 그는 "땅밟기 기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령들을 묶지" 않았고, 하나님이 편안하게 임재하시도록 장소를 깨끗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설교했다. 맞다, 설교했다!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들의 파멸이 가깝다는 사실이 설교하는 요나를 기쁘게 했다. 비록 그는 부르심에 순종했지만 니느웨의 파멸을 보고 싶어했고 심판을 기대했다. 요나서 3:5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존중하셨지만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화가 났다. 그들이 받아 마땅한 것을 받는 것을 보고 싶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은 구원을 받았다 - "하나님은 선하시고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메시지 없이, 대신 심판의 메시지로 인해서.
오해 말라. 나는 이 예가 채택돼야 할 완벽 모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한 도시를 변화되게 하신 유일한 성경적인 예가 니느웨란 것이다. 오늘날 지옥과 심판은 빠지고 복의 복음만이 들어가 있다. 우리의 복음의 많은 부분이 필스베리 도우보이(배를 간질이면 기분좋게 웃는 광고 속 인형/역자) 식 전도 유사한 것이 되었다 - 기분 좋게 하기 위해 배만 간질인다.
그래서, 앗시리아(니느웨)는 사도행전에 나온 것보다 더 큰, 사상최대의 부흥을 이루었다 - 100%였다. 여기 귀하의 도시 점령을 위한 모델이 있다! 하지만 이런 성경적 모델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대신에 그들은 결과를 위해 비기독교적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
하나님은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아무렇게나 니느웨 도시 전체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아껴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려고 하신 일이다. 예언된 바와 같이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은 잡혀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니느웨에서조차 되풀이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 이것은 절대 되풀이되지 않았다.
대사명의 완성으로 다가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사탄의 저항이 커지기 때문에, 영적 매핑은 특별히 지금 필요하다고 오티스는 말한다. "1990년대는 1970년대가 아니다"라고 오티스는 말한다. "하나님은 매우 현명하시고 수완이 비상하시며, 교회마다 다른 강조점, 다른 방법론, 다른 전략들을 주셔서 지배적 문화에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 1998년 1월호) 이것이 성경적으로 다루어지는 한 우리 모두는 그에게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비디오를 만든 센티넬 그룹은 20/20 플랜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 최전선 중보자들을 위한 전투 정보 -- 이며, 회원에게는 월드 인사이트(World Insight)라는 8쪽 짜리 매거진을 통해 매월 브리핑이 제공된다. 여기에는 오늘날 중보자들과 영적 도해자들(mappers)을 위한 필수정보가 들어 있다. 이것을 통해서 온 세상에 벌어지는 가장 중대한 영적 사건들을 발견한단다. 그들은 회원들에게 기도를 요구한다 - 적어도 매주 20분씩 하되 소속 지역사회를 위한 회원의 전투일정에 따른 이벤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목표 그룹'인 20 국가와 지역들을 위하여. 만약 이 기도가 성경적이라면 다 괜찮다. 만약 아니라면 - 그렇다면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오티스는 또, 비디오의 동반저서인 "정보에 입각한 중보기도"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지역사회에서 악을 뿌리뽑고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간단하고도 집중적인 효율적 기도전략을 개발하게끔 도처의 기도용사들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 사용간편한 안내서는 당신이 대적의 견고한 진을 드러내어 공격하기 위한 체계적 계획 수립을 도와줄 것입니다. 영적 매핑과 전투기도에 관한 성경적인 통찰과 실용적인 정보가 가득한 '정보에 입각한 중보기도'는 기도의 능력으로 지역사회를 변혁시키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오티스 주니어는 이 분야에 새내기가 아니다. 그는 1994년 2월 멜로디랜드 크리스천 센터에서 열렸던 기도와 영적 전쟁에 관한 컨퍼런스의 주강사들 중 한 명이었다. 이 행사는 "현대 영적 전쟁운동의 톱 리더"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헥토 토레스, 톰 화이트, C. 피터 와그너, 에드 실보소, 신디 제이콥스, 프랭크 해몬드, 더치 쉬츠, 존 도우슨, 게리 버걸 등을 포함한다. 영적 매핑을 가르친 오티스 주니어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여겨졌다. 공동 후원자로는 글로벌하베스트교회, AD2000 기도트랙연합, 영적전쟁네트웍과 인조이가 있다.
기도의 집을 세우는 일을 하는 웹사이트에서 센티넬 그룹은 복음적 돌파와 세계 지역사회 변혁을 가져올 기도 캠페인 지원을 돕는 데 전념하는 기독연구정보 대행사로 나와 있다.
센티넬 사이트에는 '당신의 도시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웹사이트로의 링크가 걸려 있다. 여기에서는 조금 더 많은 방법들을 보여주고 있다. '당신의 도시를 위한 그리스도' 사역은 온타리오주 런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이클 피어스가 이끈다. 이 사역의 사명은 "설정된 어젠다(의제)/행사연결진행"을 사용해서 도시에 '부흥'을 가져오는 노력들을 코디네이트하는 것이다. 마이클 피어스와 그의 '당신의 도시를 위한 그리스도' 사역은 피터 와그너, 신디 제이콥스, 더치 쉬츠, 밥 베켓, 조지 오티스 주니어 등이 저술한 책들을 승인하고 추천한다. 마이클은 '토론토 블레싱/거룩한 웃음' 운동을 지지하는 서부 온타리오 갱신네트웍(Western Ontario Renewal Network)의 멤버이다. (사실 그들이 발행하는 책을 보면 서로가 서로의 책을 추천한다.)
이 모든 "영적전쟁/도시점령"은 지난 몇 년 간 일어나고 있는 비성경적인 부흥운동과 굳게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략적 전투를 위한 기도 가이드를 썼는데, 이에 대한 리뷰를 보려면 여기로 가라.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는 "땅밟기 기도"이다. 그들은 이것이 효과적인 중보기도를 위해 교회 공동체의 많은 인원을 동원할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는 하나님이 주신 도구라고 믿는다. "우리는 이렇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도구를 알지 못한다." 대단한 주장이지만, 비슷한 다른 주장들도 많다.
땅밟기 기도의 대표적 지지자인 스티브 호돈과 그래엄 켄드릭은 땅밟기 기도를 "현장에서 통찰력으로 하는 기도"라고 정의한다. 기도할 특정대상을 정하기 위해 각 장소의 "영적" 역사를 조사했거나, 또는 성령으로부터 직접 "영적으로 분별된" 전략적 정보를 얻은 중보기도자들이 현장을 방문한다. 중보자가 인근을 걸어 다닐 때 물리적 활동과 영적 활동이 결합된다. 그들은 땅밟기기도를 삶의 스타일로 삼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세, 여호수아, 아브라함, 에녹- 그리고 예수의 삶을 점검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그들이 하려는 것은 그 성경적 근거를 찾는 것인데, 과연 있는가?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 이웃집들로 걸어 다니며 영적인 견고한 진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주께로부터 듣기를 기다렸는가? 분명히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르쳤다. 어쨌든, 그는 우리가 혈과 육에 대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견고한 진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6장에서 언급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방법에 대한 지시는 하지 않았다.
사도 피터 와그너는 말한다. "예수행진(March for Jesus)은 하나님 나라 전진을 위한, 여태껏 알려진 최강의 도구들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있다 - 전례 없는 복음의 추수를 위한, 또한 의와 사회정의를 향한 우리 사회의 중대 변화를 위한 새 영적 권능을 발생시키는... 이런 종류의 공개선언은 도시를 덮고 있는 어둠의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 그 날 어떤 엄청난 영적 권능이 방출될까. 이전과는 결코 같지 않은 세상이 기대된다." (미니스트리투데이 1992년 5/6월 피터 와그너 - 예수행진)
그 방법은 이런 식이다: 우리가 걸을 때, 보려고 눈을 뜨고 들으려고 귀를 연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무엇을 지탱해야 하는지의 정보를 우리의 감각이 알려 준다. 할 말을 도와 줄 유용한 노트나 샘플기도를 가지고 가도 좋다.
걸을 때나 운전할 때 기도하는 것에 잘못은 없다. 포인트는, 이것을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도구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성경에도 없고 신약교회에서 사용되지도 않은 이 방법.
그들은 이것을 일종의 현장 중보 "땅밟기 기도"라고 부른다. 이것은 단지 즉석에서 하나님이 응답을 내려주시기를 기다리는 기도이다. 걷거나 돌아다니는 것과는 상관 없는 얘기다. "땅밟기 기도는 더 명확히 기도하기 위해 우리를 더욱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소리인지 나는 모르겠다. 어쩌면 당신은 알지 모르지만. 이것이 걷는 것과 무관하다면, 그냥 집에 머물러 골방에서 집중해서 기도하는 게 어떻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의 주장은 "우리의 의도는 단지 우리가 땅밟기를 하는 지역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올 뿐"이라고 한다. 이 개념은 예수행진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다. 영국의 예수행진 공동설립자가 1992년에 지은 '예수행진' 책자는 행진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의 목적들은 우선 가장 먼저 영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 위에 있는 영적인 대기(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보기 원한다."
그렇게 되었는가? 자유주의자들과 무슬림들이 어느 때보다 많은 오늘날의 영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는 약속을 기도하지, 문제를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축복을 기도하지, 저주를 기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건설을 기도하지, 파괴를 기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이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에서는 에큐메니칼 맛이 난다. 예수께서는 어둠의 일들을 파괴하러 오셨고,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들을 책망(폭로)하라고 말했다. 누구든 그가 복음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축복을 받는다 -- 복음을 믿지 않으면 축복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한 설교자들과 복음전도자들이며, 땅밟기 기도자들이 아니다.
'당신의 도시를 위한 그리스도'는 "캐나다가 기도로 덮이는 것을 보는 것: 지역사회 마다, 거리마다, 사람마다. 완전한 공동체로 이르도록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초청하는 환경 만들기"를 보는 것이 그 목표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역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위해 초청받으시는가? 사도들은 왜 이런 것을 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았는가? 이것은 '신사도'들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치유의 사도들을 보유했고, 이제는 기도, 전투기도의 사도들을 보유한다 --뭔가 특별하지 않은가?
땅밟기 기도는 결과를 갖다 준다는 게 그들 주장이다! 거리, 이웃지역이나 지역사회에서 계속되는 땅밟기 기도를 납득시킬 만한 케이스가 되는 문서가 나와 있다. 잠시 생각해 보라; 당신의 이웃 지역은 당신의 기도에 비례하는 부흥을 경험할 잠재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그들 방식 대로 오래 기도할수록 거기 비례해 기도가 성공적일 것이란 식의 뜻이다. 이것은, 만약 악이 이 세상에서 지배한다면, 그것은 크리스천들이 올바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그들의 지역사회에서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을 물리칠 만큼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영적 전쟁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 속에 개인적인 죄, 개인적인 하나님이나 순종에 대한 책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마귀의 권능을 깨고 자유를 얻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지 집단적인 경험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속에 어떤 진리의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극단에까지 끌고 갔다. 물론 우리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특정적으로 기도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등대의 목적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와 그리스도의 믿음에 이르도록 (베드로후서 3:9) 이웃에게 하나님의 복을 간구하는 것이다. 요한1서 5:14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기 원치 않으신다"를 '아무도 멸망하지 않는다'로 바꾼다. 하나님은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복음을 들을 때 개인 쪽에서의 선택이다. 우리는 기도로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하셔서 그들을 결심의 지점에 이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수는 있다. 누가 말했듯이, 우리는 땅에 물을 줄 수는 있어도 그들에 대한 은총 자체를 빌 수는 없다. 이 방법론은 하나님 아닌 기도를 권능으로 만든다. 성령의 이끄심 없이는 아무도 그분께로 오지 못한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 - 오늘날 우리가, 특히 이런 기도서클에 네트워크로 연계된 많은 사람들로부터는, 거의 듣지 못하는 무엇이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문제종교집단이 발행하는 일간지/역자)는 오티스의 트랜스포메이션과 영적 전쟁을 통한 승리 주장을 기사작성 가치가 있는 뉴스거리로 생각했다. "보수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귀신이나 지역령들을 상대로 직접 기도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공격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성경이 매우 애매하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라고 '기도!' 잡지의 편집인 조나단 그라프는 말한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한다. 하지만 좀 더 은사적인 신자들은 '성경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를 가지며,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매핑은 연구도구 - '부흥을 막는 것들을 진단하는 훈련'이며,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우리 지역사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이 문제가 어디서 왔는가? 이런 것들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조지 오티스 주니어는 말한다. 미스터 오티스는 센티넬 그룹 대표."
복음공동체 밖에서, 기도가 다른 종교집단의 영향력을 없애고 그들 멤버를 개종시키려는 뻔한 목적으로 그들을 노릴 때, 곧 불쾌감이 일어난다. 오티스는 '기도!'에다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람들을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요청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어긋난다... 우리가 호소하려는 바는 평평하게 고른 경기장이다 - 진리의 전진으로부터 [사람들을] 막는 영적 무지를 잠시 걷어 올리는 것..."
사람들을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오티스의 개념은 걱정스럽다. 대신에, 이것은 고른 경기장을 만드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영적 무지를 걷어 올림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무지는 불신에서 나온다. 성경은 가려짐이 들어 올려질 때 크리스천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고린도후서 3:16)
믿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통해 들어야 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확신을 가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사도행전 26:18)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이다.
그 개인이 크리스천으로 회심하도록 하나님께 요청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된다!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가? 복음이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먼저 영적인 땅을 고르게 하라고 성경 어디에서 가르치는가? 사도들이 이런 것을 행한 보기가 있는가? 성령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들에게로 올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틀림 없이 그들의 삶 속에서 이미 일하고 계시며, 귀신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저지할 수 없다. (그들과의 작은 충돌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교회에 힘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그리스도 예수 주님을 전파했던 그 위임을 주고 있다.
그가 로마서 10:15-17에서 말한 바와 같다.
어떤 신자들은 복음전파의 보고서를 믿지 않는 것 같다. 그 대신 그것이 전쟁-- 복음전도를 위해 땅(또는 공중)을 세분하기 위한 하늘에서의 영적 전쟁--으로 대체되었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이 과연 복음전도에 나서느냐 아니면 대부분의 시간을 자칭 선(先) 복음전도에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사도시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것이 행해지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도대체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더 큰 권능인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세례를 주리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그들을 담대한 증인으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 그들이 속한 문화 속에서 진리를 위해 터놓고 논쟁하기 위해서. 그들은 일어서서 믿음을 위해 논쟁함으로써 그들 시대의 종교와 그릇된 철학사상을 반박했다. 이것(증인의 담대함)을 위해 이런 새로운 권능이 주어졌는가? 아니다. 이것(새 권능)은 도시 위에 있는 귀신들을 확인하고 내쫓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기도의 그릇된 개념의 시작일 뿐이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것을 본다. "정부 관리들은 기도가 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비디오의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있다. 케이프타운의 시장은 비디오를 그의 도시 리더들에게 보여줬다고 페트리는 말했으며, 남아프리카 프레토리아의 시장은 100개의 카피를 받아서 다른 리더들에게 배포한다고 약속했다. 캐나다 온타리오 런던 시의 시장은 런던시가 비디오에 나온 축복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으며, 아이다호 보이스의 몰몬교 시장도 그렇게 했다고 센티넬 그룹은 말했다." (출처) 만약 영적 매핑이 그들이 말하는 대로 작동한다면, 심지어 몰몬교도들도 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놀랄 일도 아닌 것은, 우리는 이미 예수행진 캠페인에 그들이 동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변혁
비디오에 나오는 영적 전쟁 운동 교리와 사람들을 살펴 보았으니 이제 그 주장점을 보기 위해 비디오 자체를 들여다 보기 원한다. 비디오의 주장은 이 전략적 영적 전쟁의 방법이 적용되었을 때 (한 곳만 빼고 - 어느 곳인지 확실치 않음) 각 지역사회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교묘한 암시는, 그들의 기도 방법론을 따르면 당신도 동일한 결과를 볼 것이라는 것이다. 대단하게 들리지 않는가?
오티스는 말한다. "지역사회 변혁은 많은 크리스천들이 발버둥치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런 주저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내가 나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인생 경험의 한계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티스는, 영적 부흥을 경험했는지와 대규모의 교회성장이 가능한 지 질문을 받은 사람들의 예를 든다. "그들의 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거의 누구도, 적어도 서방세계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지역사회에 번져가는 심오한 번혁이다. 그 결과 우리는 이것을 달성 불가한 줄 생각하는 성향을 갖는다. 하지만 이것은 유효한 가정이다."
여기서 잠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는다는 것과 그리고 요나의 예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그것의 발생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우리가 의문을 갖는 것은 방법론이다. 단지 그 기도만이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 상태와 마음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어떤 기도를 우리는 말하고 있는가?
영적 부흥과 큰 교회성장으로부터, 전체사회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데 휩쓸려 변화되는 그런 도약은 성경이 제공하지 않는 도약이다. 일어나기를 그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확실히 아니다.
비디오를 통틀어 스티브 프라이의 노래가 특정 지점에서 간간히 연주되어 무슨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기분을 고조시킨다. 비디오 안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전체에 걸쳐 되풀이된다 - "우리는 전쟁을 선포했다" "우리는 어린 양의 보혈로 승리했다" "승리는 외친다".
그 지역사회들 대부분은 먼 곳에 있고 제시된 주장을 모두 조사하기는 매우 힘들지만, 우리는 그 모두로부터 뭔가를 찾아냈다. 우리는 비디오를 (그리고 운동을) 진짜라고 또는 성경적이라고 승인하기 앞서 모든 것들을 조심스럽게 체크해야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는다.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에게 기도와, 기도가 이룰 수 있는 일에 관해 알리는 데 이 영화를 사용해왔다. 그런 면에서 이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실제 목적은, "부흥"을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증진시키고 교회를 이끄는 방법을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비디오는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기도를 강요해서 결과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비록 결과가 분명히 우리 모두가 원하는 한 목표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문제시 되는 것은 방법이다. 이것은 성경적 모델로부터 온 기도가 아니다. 피터 와그너가 이미 말했듯이 "내가 사용하는 방법이 내가 노리는 목표를 성취한다면, 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좋은 방법이다." 이것은 진리를 위한 기준이 아니다. 이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을 볼 때 이런 견해가 지지받는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 결과를 얻는 한 이것을 어떻게 얻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하지만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결과가 성경적 모델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존속하겠는가?
그래서 트랜스포메이션 비디오를 통해 증진되는 개념과 실제로 그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독자와 함께 검증해 보기 원한다. 이것은, 피터 와그너로부터 또는 이(비디오)를 지지하거나 킹덤나우 주권주의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온 영적전쟁운동에 다름 아니다. 센티넬 그룹의 조지 오티스와 그들과 연합한 조직들은 이 개념에 오랫동안 연관되어 왔다.
나레이터가 말하듯이 "우리는 지역사회의 거리들과 기관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최근까지 들썩들썩한 여러 군데를 볼 것이다. 우리는 이 가장 인상적인 현상들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조사할 것이다." "성령의 권능에 의해 극적으로 바뀐 4개 지역사회, 하나님이 마을을 방문하시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 빛나는 예를 보여주는 네 곳의 지역사회." 단호하게 쓰인 단어들을 주목하기 바란다 - "들썩들썩한", "인상적인 현상들", "극적으로 바뀐", "빛나는 예". 우리는 이런 강력한 기술들이 과연 정확한지 4개 지역을 거쳐 여행해 볼 것이다.
[이후 장에서 네 곳(콜롬비아 칼리, 과테말라 알모롱가, 케냐 키암부, 캘리포니아 헤멧)의 변혁에 대한 비디오의 주장과 반론이 계속되지만, 번역은 일단 여기서 마친다. 단, 과테말라 알모롱가에 관한 내용 일부는 볼 수 있다. 더 관심이 있는 독자는 영문 원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후에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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