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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C 목사는 왜 뉴에이저인가?


본 비평문 원본에 대해 Y교회는 '명예훼손'을 주장하면서 다음넷 권리침해신고센터에 고발, 임시삭제처리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본 티엘티는 '혐의'가 완전히 풀리기까지 민감한 일부 내용만 바꿔 임시복원조치를 취합니다.
이런 고발 방식은 세속적이지 결코 성경적이 아니므로 해당 교회의 주도세력은 참 교회가 아님을 자증해 준다고 봅니다. 참고: 코A 6:1-7.
 다음넷 권리침해신교센터가 교회 또는 교회의 치리기구라는 말을 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종교는 평등하고 '하나'라는 뉴에이지 운동(NAM) 사상이 판을 치는 요즘..새삼 머리에 떠오르는 명사가 있다. 세계 최대급 교회인 Y 교회의 C 원로목사(이하 편의상 직함 생략).  

[ 복음의 순수성을 즐기는 필자이건만 '순복음'이란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 (세계?) '순복음'의 대부 격인 C목사가 정작 이 낱말에 걸맞게 과히 순수하지도 순결하지도 않거니와-순수/순결과 그와는 너무 거리감이 있고 과분한 형용사다!- 성경의 전체 복음 속에 순복음교인들만을 위한 '순복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영어의 "Full Gospel"은 순복음보다는 '온복음'에 더 가깝다. '순복음'이 정말 순수복음을 의도한 것이었다면..C 목사 자신이 순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순복음 사람들이 정말 순복음을 지키는 순복음인답게 살고 싶거들랑 한시바삐 C 목사와는 차별화 선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말고. 왜 그런지는 이 글을 보면 느끼게 된다.]    
  
다음은 지난 2004년 5월 12일 동국대 경영대학원 최고위과정 이수자인 불자들에게 행한 C 목사의 특강 내용을 대강 분석해 본 것. (특강 전문은 지금도 웹 여기저기서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전략)..저는 소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인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교파와 주의 종들이 비난하는 가운데서도 강력하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종교를 가르치거나 기독교를 전한 게 아니라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전인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반면, 그는 나름의 전인구원은 둘째 치고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절대유일 소망의 메시지를 강조하지 않고 은근히 타협하고 있다. 아무리 전인구원을 전한들 알맹이가 빠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냐 하면 인생을 사는 데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과 태도를 가지면 놀라운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파괴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가지면 그 사람 자체도 그렇고, 그 사람과 교제 하는 사람조차도 그렇지 않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노만 빈센트 빌 박사의 Positive Thinking이라는 책을 지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C 목사는 뉴에이지적인 노먼 빈슨 필(프리메이슨 SR 33단)의 긍정철학 사상을 적극 설파하고 있다. 안 그래도 그는 그의 '4차원설' 등에서 필의 영향을 극명히 드러내 왔다. 이것과 더불어 '3박자 축복론'은 성경적 테마를 자기 어젠다에 활용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소망과 꿈을 가지자는 데서 모든 사람들이 모티베이션을 얻은 것입니다.

소망과 꿈? 여기 그의 장기가 있다. Y 교회가 그래서 커진 것이다. 문제는 그에게서 우리는 소망과 꿈 때문에 진리를 희생시킬 수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  

종교는 불교나 기독교나 마호메트 교나 평등합니다. 저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목사로 있으니까 선불교랑 같은 것이 너무 많아요.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도 예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마라 예수님은 네 마음에 있다 저 죽어서 서방정토세계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천당이 이루어져야지 죽고 난 다음에 천당을 바라지 마라, 또 계율과 율법을 가지고 하면 전부 죄 밖에 드러나지 않는데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엔 그 다음엔 자동적으로 믿음에 따라서 마음이 뜨거워지면 율법과 계율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선불교 같은 것이 너무나 많다고 주장한다. 어처구니 없지 않는가? "맘이 부처"라는 말을 "예수님이 마음에 있다"는 말과 동질시/동일시 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에 따라 뜨거워지면 자동적으로 율법과 계울을 지키게 된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과 성령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해야 옳다. 즉 진리와 사랑으로다. 그런데 이 특강 전문에 따르면 C 목사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 특강에서) 그는 또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고 두 번 말했다. 
우리, 정확하게 바로 말하자: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므로 기본 인권에서는 어떤 종교인이나 평등하다. 중동 회교국들이나 인도, 인도네시아, 스릴랑카나 프랑스에서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신앙 때문에) 평생 억울하고 모진 박해가 아니라 공평/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함이 그 떄문이다. 순교는 허용된 상황이어야지 '절대주권' 아래 무조건 순교돼선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 C 목사가 의도하는 내심이 문제인 것이다.
성경은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기독교는 유일절대의 생명의 길이지 사실 '종교'가 아니다. 만약 그가 현 기독교를 '종교'로 믿고 이런 말을 했다면 카톨맄이나 신교의 종교적 제도교회엔 해당하는 말이다. 그래서 C 목사가 신자이기보다 종교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제가 원효사상을 좋아하는 것은 '나무아미타타불' 네 글자를 외움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에 계율을 지켰으니 계율도 지키고 신앙생활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통하는 점이 많아요.

그의 용어-terminology-를 눈여겨 보라. 그는 원효사상과 '오직믿음구원'을 적스타포즈 시키려 애를 쓴다. '네(4) 글자'란..내심 '나미아불'(타타불까지 네 글자도 아니다)과 '이신득의'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뜻인가? 그는 이 특강에서 두 번 그랬다. 종교다원성 냄새가 물씬(!) 나는 대목이다. '나무아미타타불' 네 글자를 외움으로써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복음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저는 불교 TV를 굉장히 좋아해요, 왜냐하면 불교를 내 친정집 같이 생각이 되기 때문에 그 강의를 들으면 괸장히 마음 속에 유익을 많이 얻어요. 그래서 불교강의를 들으면 어떤 때는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알아 듣기가 굉장히 힘들게 강의하는 어른들도 있었어요. 복잡하게 철학적으로 계율적으로 하시는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안타까운 적이 있었어요. 내가 듣기로도 이렇게 복잡한데 일반 중생이..이걸 깨달은 저는 정병조 교수님의 전 시리즈를 다 들었습니다. 책으로, 텔레비전으로 다 들었는데 그 분 강의를 내가 왜 좋아하냐면 쉽게 해요. 제가 왜 불교 강의를 열심히 듣냐면 불교 강의를 들음으로 비추어 볼 때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더 깨달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박수)

C 목사는 불교TV를 보통도 아니고 '굉장히' 좋아하고 즐긴다. 그는 불교를 '친정집' 같이 생각하고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강의를 들으면 굉장히 마음 속에 유익을 많이 얻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중생' 등 불교 용어 지식과 사용을 예수 믿고 내다버린 게 아니라 즐긴다.
아부적(?) 고백은 고사하고라도.. 분명히 C 목사는 다년간 불교에 심취해 왔다. 어느 정도냐..
불교가 복잡하게 철학적/계율적으로 강의하면 '안타까울' 정도로!
불교를 쉽게 가르치는 정병조 교수의 강의 시리즈를 책과 TV로 몽땅 섭렵할 정도로! 

위에서 재인용해 보면.. "제가 왜 불교 강의를 열심히 듣냐면 불교 강의를 들음으로 비추어 볼 때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더 깨달을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가 불교강의를 열심히 들으며 열렬히 찬탄하는(?) 이유는..불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더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불교가 그의 기독교 신앙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다. 성경만 읽어도 모자랄 판에 평생 불교까지 섭렵하니 그는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자가 된 것이다.


다음은 (특강 후 불자들과의 질의응답 중) 그의 답변을 간추린 것..

- 정신문화의 기본은 종교이다.  
- 우리 한국을 알려면 불교와 유교를 모르고는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 그러나 지금 한국 문화는 난장판 문화입니다..(중략) 지배 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불교나 기독교가 더 열심히 전도해서 우리 한국의 불교나 기독교의 지배종교가 지배한다면 지배문화를 만들어서 그 문화 속에 윤리,도덕이 서고 인생관과 철학이 서고 생활가치가 설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지배종교가 없어서 아무리 정부에서 어떤 시책을 세워도 국민이 잘 받아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가 왕성해야겠고 기독교가 왕성해야되겠고 불교와 기독교간에 긴밀한 대화를 해야겠습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불교와 유교를 모르면 한국을 절대 알 수가 없는가? 한국을 "안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C 목사 방식으로 아는 것? '절대'라는 말의 '뻥' 도수를 셈 해 보라. 그냥 튀어나온 말인지는 모르나 어찌 보면 아첨적 과장이 아니겠는가?
위 발언에 따르면 C 본인의 내면 문화는 '난장판 문화'이다. 지배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C라는 인물이 얼마나 혼동돼 있고 오착돼 있는지 제 스스로 웅변해 주고 있다. 
우선 그는 불교나 기독교가 지배종교로 서길 바라고 있다. 지배종교로서 '지배'하려면 서로 양립할 수 없고 불교나 기독교 중 하나가 피지배종교여야 한다. 거기 피통 터지는 난장판이 또 인다. 최소한 표면상 불교나 (형식적) 기독교계가 서로 지배종교(?)가 되려고 피통 터지는 싸움을 벌여 온 게 어제오늘이 아니거늘 C 목사는 지레 짐짓 유야무야 거짓 평화 제스처로 넘어간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가 다 '왕성'해서 둘 다 지배종교로 양립해야 된다고 어불성설의 아첨을 떨어댄다. 그리고 지배종교를 통해 윤리 도덕과 인생관과 철학, 생활가치가 선단다. 즉 그의 인생관은 성경적이 아닌 다원종교적 세계관이다!
솔직히 말하면..(주님을 믿게 된 옛 스님들도 하는 말이지만) 불교는 우상종교다. C 목사가 말하는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참 기독교는 양립할 '종교'가 아니다. 엄연히 절대유일의 구원생명 진리다!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다!  
우리는 '지배종교'일 필요가 없다. 다만 생명을 살리는 복음만 전하면 된다.

애당초 C 목사가 불교 고위급 특강에 응한 게 잘못임을 절감하게 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그가 안 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그가 감으로써 우리는 그의 정체를 확연히 알게 됐다. (검증의 필요성으로 볼 때 천만다행이다.) 

..상대의 차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대화를 통해서 서로 화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저는 하나님이 긴 생명을 주신다면 해외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더 많은 토론, 대화 문화를 형성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에  한 박사님((불교인사: 필자 주)도 기독교 모임에 모실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부처님의 자비, 하나님의 사랑..말이 자비고 사랑이지 실천에서 보면 자비나 사랑이나 똑 같은 맥락에 하나로 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대화를 통해 대화와 협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C 목사는 특강에 대한 답례로(?) 불자인 '한 박사'를 기독교 모임에 기꺼이 초청하겠단다. 서로 주고 받음의 아름다운 화해의 정경인가? 아니면 종교적 타협의 현장인가? 참 아량스럽고 너그러운 제스처다. 여기서 C 목사는 부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동등시 한다(?). [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무한 평가절하되니 난 억울하다! 내 하나님의 아가페가 이 수준 밖엔 안되는가? 아니면 C 목사가 가증한 우상의 찬하자인가?] 
C 목사의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화해 제스처 이면엔 종교다원주의와 뉴에이지를 향한 폭 넓은 관용과 열림의 훤한 공허가 도사려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이런 종교간 '화해'에 더 힘쓰겠단다. 그런 화해라면 이왕에 많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해 왔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자 C 목사가 뭘 하든 간에) 우리는 오직 예수 크리스토를 통한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해를 위해 임명 받은 하늘나라 대사들이다. 화려한 '화해' 제스처를 쓸 필요도 없이.

"불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로서 장자종교입니다. 불교가 만약에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독선주의로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란 질문에 대하여 조목사의 답변: 목사님들이 그 종교의 특수성과 그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독존적으로 생각하므로 많은 분쟁이 생길 요인이 있기 때문에 제가 은퇴를 하고 나서는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이해와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종교는 평등합니다. (참석자들 박수)

우리가 성경대로의 복음만 전하면, C 목사는 "특수성과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유아독존적으로 나아가는 분쟁의 요인"으로 여길 소지가 많다. 그런 설교자/전도자들은 C 목사 앞에선 얼씬거리지도 마라. 은퇴한 세계최대급 교회의 전목회자 C는 이제..조만간 세계종교 간 대화의 앞잡이로 나설지 모른다. 기대하시라! 

종교는 평등합니다..

See(보는가)? 전술한 대로 그는 재삼 종교가 평등하다고 강조하는데 그의 내심은 다르다. 그 다음 주일 자신의 교회서 변명한 것을 보면 가히 거짓말에 가깝다.) 

"(기독교에서는)..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말을 기독교외 예수님, 하나님 외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생각해도 되겠는가?"란 참석자(불자)의 질문에 대하여..C 목사: 불교는 불교의 구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불자가 바른 복음을 인용하고 있는 역설적 순간을 대한다. 그러나 C 목사는 이 칼날 기습(?)에 대하여 사뭇 비겁한 답변을 한다. 평등하고 공평하니 사이좋게 갈라 먹자는 뜻? 기독교 메시지의 유일절대 생명성을 완전 초탈한 듯 보인다.

그 (메시지의) 한계를 불교도 뛰어 넘을 수 없고 기독교를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차별성을 인정을 하고 대화를 하자는 것입니다.

즉 (역설적으로) 기독교 진리의 유일절대성이라도 희생시키고 타협하자는 것. 그런데 '차별성' 보다는 '차이'라고 해야 어법에 맞다. 

그리고 우리가 불교가 주장하는 것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없어요.

See? 그는 (우상종교에 불과한) 불교를 결코 비판적/비평적 태도로 보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가 보는 불교는 절대 비판불가한 불교(不敎)다.
그러나 사도 파울은 이천년전 그리스 아테네의 우상종교를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다!
C 목사의 영어명이 Paul이다. 파울의 이름을 여지없이 짓밟고 더럽히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뿐인가.. 

불교는 불교대로 존중을 하고, 인정을 하고, 기독교는 기독교대로의 구원의 방식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라는 평등한 공통분모에서 차별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 가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집안에서도 우리 집안 식구들 중에도 아직도 불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아무런 저항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서로 차별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C 목사는 기독교를 불교와 같은 '공통분모' 선상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 없이 대하자는 주의이므로 불교에 대해 아무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뒷전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불교신자들에게 전도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말이 된다. (C 목사가 어떻게 신자들 앞에 '해명'을 하든 간에) 논리적으로는, 세상 앞에서는 불교를 기독교와 거의 동등한 진리로 생각한다는 뜻이 돼 버린다. 안 그런가?

우리 동생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겠다고 확신을 믿기 때문에 존중하고 인정하고, 나는 기독교 목사니까 기독교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내 것만 절대 진리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너는 죽이고 나는 살겠다-그렇게 되면 상생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잘 보라! 그는 기독교의 절대진리성을 정면 부인하고 있다. 불교도인 동생한테 전도할 아무 의무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는 게 그의 내심이고 진심이다. 아니라면 특강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든가. 교인들을 속이고 있든지 불자들을 속이고 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종교적인 위치에서 볼 때 마음은 우리의 뇌 실체 속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뇌라는 것은 마음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이 특강에서) 그가 말하는 '마음'은 영/혼 사이에 구분이 없는 마음이다. 그가 교계에서 평소 가르치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마음은 뇌 실체 속에 있다
뇌는 마음이 사용하는 도구다

이 진술의 논리적인 모순과 엉성함을 보는가?

저는 목회를 하면서 신비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는데, 우리 교회 부목사로 계셨던 김상호 목사님이 심장마비가 걸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망 진단을 받았습니다. 삼일장을 지냈는데, 관 속에 집에 넣으려고 의식을 하는데 살아났습니다. 완전히 죽어서 우리가 염을 하고 그랬는데, 3일 만에 살아나서 영계를 체험한 것을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싸 해 뵈지만 위 끝말은 불자들이 듣기 좋으라고 한, 속 들여다 뵈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완전분리'된 게 아니라 C 목사의 몸과 마음(정신/혼/심리)은 서로 자주 야합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영과 혼이 서로 쪼개질 수 있다는 건 방언 하나로 충분히 입증된다. 그러나 그는 평소 가르치던 것을 여기선 입장과 체면상 생략한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적인 종교생활을 할 때를 보면 깊이 명상을 할 때나 두뇌를 의지하지 않고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무한한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도 명상을 통해 그런 신비체험을 가끔 하곤 하는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 4차원의 세계, 영원한 세계...그런 세계에 들어가서 무한한 평안을 느끼곤 합니다. 이러한 체험은 두뇌의 조직 속에서는 도저히 만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나의 실체가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바로 윗 부분이 그를 관상영성가 내지 뉴에이저로 믿게 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모든 것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섭렵한 것이 도움이 된 것처럼 계유불성이란 것은 벌레 한 마리도 부처의 심정으로 성경은 하나님은 만물 안에 계시며 만물을 초월한다고 했습니다. 만물 안에 계시면 풀 속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벌레 한 마리에도 신성이 계시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연훼손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C 목사의 뉴에이지/범신론 사상은 점입가경이다. 그는 풀 속에도 벌레 한 마리에도 "신성이 계시기에"(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절대 자연훼손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C 목사=범신론자] 등식을 자증하는 고백이다.

C 목사는 살아오면서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를 밟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을지 모를 (또는 적당히 밟아 자주 살생했을지 모를?) 알뜰한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긍정철학적 기독교인으로 살아 왔다는 말이 된다.

굳이 김삼을 탓할 필요 없이..그는 제 말로 스스로, 뉴에이저임을 자증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참 회개 없이는- 순(수)복음을 통한 천국 길은 멀고도 먼 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