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저자 옥성호 씨의 속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와 관련, 크리스찬투데이(미주 한인 언론)가 최근 (1월30일자) 보도한 인터뷰 내용을 읽었다. 비평을 위해 기사 일부를 인용함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시리즈 격으로 붙인 제목 '..부족한 기독교'는 주로 안티들이 좋아할 스타일의 이름이요 제목이다. 문제성 있는 일부 기독교 인사들이 아닌 전체 기독교에 마이너스일 수 있는 부정적인 제목이다.
그 점에서 기독교 비판 측과 변증 측 양쪽의 주의를 끌기 위한 포석이 아닌가도 싶다. 그런데 저자 역시 부족한 기독교 권역에서 벗어나 있기가 어렵잖은가? 그렇다면 부족한 제목, 부족한 책이기 쉬울 것 같다. '부족한 기독교'를 지적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충족한 저자가 되진 않겠기에.
기독교를 오도하는 사람들의 기독교는 '부족한 기독교'인지 모르나 기독교 자체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성경 자체가 부족하지 않다. 성경 속의 기독교, 성경적인 기독교는 충족한 기독교이며 그런 기독교를 추구하는 사람은 부족하지 않다. 거듭난 올바른 신자들의 충족한 교회도 있다. 다음 말씀대로다:
야웨님은 나의 목자. 난 아무 부족함도 없다네!
기독교의 목자는 야웨-예수 크리스토님이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기독교,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는 충족한 기독교다.
물론 저자가 이것을 모를 리가 없겠으나 '-부족한 기독교'를 연거푸 부각시키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책을 볼 기회가 아직 없어 책 전체의 장단점을 일일이 가려 가며 비평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터뷰만으로도 충분히 감이 잡힌다. 오히려 그가 쓴 글보다 제3자와의 대담을 통해 저자의 견해와 수준이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성의가 없다 할 지 모르나 그런 성의여야 성의다운 성의라면 비평서를 한 권 써도 "부족한 성의"일 것 같다.
저자의 장점과 명석함도 인정한다.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겠나.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필자 자신은 뭐겠는가..그러나 언론이 그 점을 충분히 떠들고 있는데 필자까지 일일이 장점을 늘어 놓는다면, 지면이 모자랄 것이다. 장점들은 언론 보도에 대체로 공감하면서 여기선 생략한다.
1.
옥성호 씨는 크고 작은 모순을 자주 노출한다. 예컨대 마케팅에 물든 일부 교계 인사들을 지적하는 것은 좋은데..교계 마케팅 또는 마케팅 방식을 모두 죄악시 하는 이원론적 면모이다. 오히려 대담 호스트인 기자가 '이원성' 위험을 지적했지만.
옥 씨는 베스트셀러로 뜬 소감에서 "목회자들과 더 많은 성도들이 읽고 복음의 본질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란 말로써 은근히 저서를 셀링하고 있다. 그것만도 모자란지 조만간 출판돼 나올 근간까지 미리 소개하고 있다. 말의 동기야 어떻든 그건 일종의 '마케팅'이 아닌가. 충분히 마케팅 개념에 속한다!
이와 함께 그는 그 책을 다들 사 봄으로써 '복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를 주문하고 있는데.. 복음의 본질이라면 꼭 그 책을 사서 읽으면서 고민할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복음의 본질 파악은 성경을 읽는 게 지름길이다! 다들 아는 말을 구태여 하는 이유는 저자 자신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본질을 사뭇 비켜가고 있는 탓.
그는 "반대할 것도 찬성할 것도 없는 간증집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국 기독교 출판계에 이 책을 통해 "나름의 공헌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기독교 출판계의 책들이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관점도 가능하겠으나 간증집들이 복음 전파에 나름대로 공헌하는 점은 없는지. 그런 식으로라면 더더욱 비평할 것도 없는 부족하지도 충족하지도 않은 기독교를 '부족한 기독교'로 몰아 가는 게 아니겠는가?
옥 씨 같은 태도를 갖는다면, 사실 부족한 기독교 안에서 우리가 매 주일 과히 "반대할 것도 찬성할 것도 없는" 설교를 들어 가며 그렇고 그런 신앙생활을 영유하고 있는 셈이다. '부족한 기독교'론에서 충족한 기독교 내지 복음의 본질을 얼마나 찾을 수 있겠기에 그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지 않은가? 성경은 부족한 복음론이 아닐 터이므로. '..부족한 기독교'라는 제목부터가 찬성할 것 보다는 반대할 대상이라는 생각이다.
2.
저자는 교회가 마케팅으로 복음을 상품화하는 이유가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간추렸는데 과연 언제나 그런가?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든 교계의 마케팅을 하며 복음을 상품화하는가? 복음을 상품화하는 것은 언제나 어디까지나 복음의 가치와 능력에 무지불식한 탓일까? 오히려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알기에 복음을 상품화하는 예는 전혀 없는가?
가령..성경책의 상품화는 어떨까. 성경 상품화가 복음의 상품화는 "아니다"고 주장하지 마라. 오늘날 존더밴사 같은 데서는 성경책을 고도로 다양화하고 상품화하여 야들야들한 인조가죽 책장에다 젊은이들이 "환장할 만큼" 야한 핑크빛을 포함한 온갖 화려한 색깔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일본식 '망가 성경'까지 만들어 살 맛 나게, 구매욕을 충동시키고 있다.
NIV 성경을 만든 존더밴사의 소유주가 산하 계열사를 통해 '싸탄 바이블'이나 런던의 에로 신문을 팔아 먹고 한 편으로는 팍스 방송 종교 프로그램을 통해 기독교를 팔아 먹고 또 한 편으로는 에로 방송을 통해 음란물을 파는 언론재벌 류퍼트 머닼이고..맄 워런이 머닼의 '목회자'라고 자임한 점은 일단 여기서 제쳐 놓고라도.. [필자의 글 '목적에 이끌린 위선?' 참조]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다! "성경책 표지는 거무튀튀하고 칙칙한 어둔 색깔로만 만들어야 하느니라"는 말씀이 성경 무슨 권 몇 장 몇 절에 쓰여 있기라도 했던가. 더 나아가 성경책 속도 얼마든지 감칠 맛 나게 만들 수 있다. 성경 원문 자체를 가감하라는 게 아니라 폰트 모양도 바꾸고 정확하고 효과적인 관주도 넣고..업데이트 된 최신 고고학 발견도 곁들이고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성경을 대할 수 있고 진리에 접할 수 있다면야.
정작 존더밴의 문제는 성경의 상품화가 아니라 알맹이 즉 진리의 변개에 있다. 존더밴의 NIV 특히 그 후속판인 TNIV는 너무나 많이 진리를 가감/왜곡/호도했다. 그러나 성경 마케팅 아이디어 자체는 좋다.
이런 기본적인 논리와 현실에서만도 벌써 옥성호의 말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마케팅/상품화가 다 나쁘다면 성경책의 마케팅/상품화도 나쁜 것이고..그렇다면 저자는 표지가 시커멓고 재미없는 성경만 봐야 자기 주장에 충실할 수 있을 터이다.
옥성호 씨는 또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지적하고 싶은 결정적인 마케팅의 폐해를 단적으로 들라"는 CT 기자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굳이 마케팅이라고 딱지를 붙일 수는 없겠지만 유명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보고 연구할 시간을 너무 딴 곳에 많이 쓰는 것 같다. 스스로 사회의 대단한 지도자라도 된 듯 착각하는 분(목회자)들이 많다."
위 답변 내용 자체는 대강 일반의 공감반응인지는 몰라도..유명 목회자들이 연구할 시간을 딴 데 너무 쓰는 것, 스스로 대단한 지도자로 착각하는 것이 복음의 상품화와 무슨 상관인가? '결정적인 마케팅의 폐해'는커녕 기본적인 범주나 해당 사항도 못 된다.
아니 뭐 억지로라면 구태여 꼭 연계시키지 못할 거야 없겠으나 유명 목회자들의 개인적 폐해를 '결정적인 마케팅 폐해'로 몰아 가는 논리는 졸속이고 동문서답 수준이다. 인터뷰 내용이 미리 이메일 등으로 합의된 질의 응답이 아니라면 임기웅변성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어리숙하고 부족한 답변이다.
3.
다음은 대담 진행자의 말이다:
"..마케팅이나 심리학은 부정하고 세속적일..뿐 진리와는 전혀 상관 없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마음에 걸리는 부분입니다."
사실 마케팅은 방법론일 뿐이고 진리는 본질이고 알맹이 아닌가. 방법론과 본질론의 범주를 착각하면 안 된다. 물론 저자만이 아니라 그동안 교계 일각에서 지적해온 마케팅 위주의 교회들에게 문제는 있다. 고대 성전 뜰의 장사아치들 같은 문제점이 없지 않다는 말.
그렇다고 해서 교계에서 마케팅을 배제할 순 없다. 마케팅은 창세 이후 지구인들의 생존 방식의 하나이고 그 자체는 악이 아니다. 잘못된 마케팅이 악일지언정. 성경의 히브리인들은 마케팅을 안했는가..자급자족만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심리학은 좀 다르다. 현대 심리학은 칼 융, 직문트 프로이드 등이 발달시켰는데 이 사람들 자신이 굉장한 문제 인사들이었다. 심리학은 사람들의 생활에 일부 도움(?)이 될지언정 그 자체가 진리도 아닐 뿐더러 진리를 밝혀 주는 데도 너무나 부족한 도구이다. 오히려 현대 심리학의 발달로 기독교가 본 손해가 이만저만하지가 않다.
진행자가 인쇄술과 성경보급을 거론하자 저자 옥 씨는 "마케팅과 심리학을 인쇄술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며 "세상에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 교회와 섞일 수 없는 것들의 일부가 마케팅과 심리학"이라고 했다. 이 역시 좀 엉뚱한 논리요 기본 범주의 혼동이다. 아니 지금 누가 인쇄술과 마케팅을 비교하자는 것인가? 더 읽기 좋고 보기 좋은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을 논하고 있지 않은가! 이 역시 어벙벙한 논리 전개다.
그 다음..옥 씨는 "심리학이 인간에 대해 내리는 진단과 처방은 기독교의 가르침 자체와 정면 배치된다"고 했는데 늘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기에 오늘날 심리적 관상 영성과 성경적 경건을 자주 혼동한다. 프쉬케적 영성과 프뉴마적 경건을 혼동한다는 말이다.
옥 씨가 심리학만으로 기독교의 문제점을 모두 싸 잡아 봤다면 미흡하다. 심리학과 깊은 연계가 있는 관상영성까지도 다 포함해 봐야 한다.
사실 관상영성의 심리학적 문제는 수 년전 우리네 교계에서 필자가 가장 먼저 지적하기 시작했던 사항이다. 그리고..저자의 부친이기도 한 옥한흠 목사와 그와 연계된 주변 사람들 (예: 강남 4인방) 등 목회자들이 적극 보급해온 목적영성/관상영성은 더 없이 큰 문제다! [필자의 관련 글들 참조].
옥 씨는 자신이 심리학/마케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고 하면서도 그것들이 쓰여질 영역이 교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묘한 혼란감을 금치 못한다. 심리학은 교회 쪽 폐해가 크니까 그렇다고 치고..만일 마케팅이 쓰일 영역이 교회가 아니라면 마케팅과 저자가 말하는 교회, 교계가 완전 분리라도 돼야 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집어 말하는 이유는..사실 지금 마케팅이 횡행하고 있는 곳의 하나가 교계이고 교계 서점가이기 때문이다.
찬송가만 해도, 한국 교계는 마케팅과 거대한 떼돈 만들기에 주력해 왔다. 도대체 찬송가 '통일'이 왜 필요한 것인가. 해외 찬송가들..가령 미국만 해도 찬송가는 교파마다 서로 다르다. 아니 성경해석과 고백하는 내용이 교파마다 다른데 어떻게 찬송가가 같을 수 있는가? 칼뱅주의 찬송가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찬송가가 모두 같을 수나 있나?
성경이야 가감 못할 절대 진리니까 통일이 바람직하고 가능하다 해도 찬송가 가사는 변개 못할 절대 진리, 계시가 아니다. 모두 시인들이 쓴 창작품들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성경도 '단권 통일'이 안 된다. 수많은 성경 번역이 나왔음에도 불구, 아직 엉터리 번역은 얼마든지 발견된다.
찬송가는 교파/교단 공용 곡들만 같으면 된다. 수 백 장 두께의 찬송가 책 에서 이해 관계, 정서교감 불가, 교리 이슈 등으로 이래저래 안 불리는 곡이 찬송가가 불리는 찬송가보다 훨씬 더 많다. 필자만 해도 현행 찬송가의 절반 이상은 별로 부르고 싶지 않다. 알고 보면 가사가 엉망하고도 진창이기 때문인데 그야말로 '내 맘'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찬송가라도 같은 곡의 번역만 통일하면 된다. 서로 다른 가사 문제로 마음이 갈린다면 대형집회 때는 거기 맞는 곡집을 따로 만들든가.
이렇게 볼 때 한국 찬송가공회의 갈등과 발버둥은 한국의 거대한 기독교 대중을 통털어 대상 삼는 마케팅 이슈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찬송가를 안 팔 수도 없다. 그래서 찬송가의 경우 범교단적 '통일' 마케팅이 아니라 교파별, 찬송가별 마케팅이 향후 필요하다는 게 필자의 주견.
그러나 한국 교단 지도자들은 서로 담합하여 '통일' 찬송가를 통해 거금을 만들려고 마냥 발버둥친다. 표면상으로는 찬송가 통일을 무슨 남/북한 통일처럼 내세우면서.
이 '통일'이 미국 교계로선 이해가 안 가는 점이다. 번역도 원문에서 영 달라지는 것이 '통일'을 위해 민감한 교리적 차이는 강가 조약돌처럼 그냥 두리뭉술 다 깎아 문대기 때문.
교계 서점가를 보자. 옥 씨의 부친을 비롯한 많은 교계 명사들이 마케팅을 통해 명사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을 터이다. 말과 글과 정치로 자신을 파는 것도 마케팅 기술에 속한다.
다름 아닌 옥 씨의 책 두 권도 마케팅이 아니면 팔릴 수가 없다! 마케팅을 교회와 (완전) 분리해야 한다는 식의 이원론이라면, 도대체 옥 씨 자신이 지금 베스트셀러 저자로 설 수나 있나. 책은 왜 쓰며 왜 파는가? 왜 출판사에 맡기며 왜 시장-서점가에 내 놓는가? 교계와 기독교서점가를 분리라도 하자는 말인가? 옥 씨는 세속출판사와만 손 잡는가? 이런 논리와 범주 상의 기본적인 혼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부족한 대담을 수많은 독자들 앞에서 하고 있으니 아연할 노릇이다. 현실과 위치조차 잊고 있는 발상이다.
4.
다음으로 CT 기자는 저자가 마케팅 교회의 모델로 빌 하이블즈의 윌로크맄, 맄 워런의 새들뱈교회를 분석 평가한 사례를 들면서 그 목회자들의 저서에만 의존해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여기서는 저자보다 기자의 이 관점을 흥미롭게 여기면서 묻고 싶다. 그 목회자들의 저서만 주로 의존해 평가하는 평가는 어떤 것도 무리인가? 오히려 필자가 지적하고픈 사안은 한국 교계가 원서 (이 경우 영서) 아닌 번역서만으로 그 저자/목회자들을 일변도 호평만 하는 것이 더 무리가 아니냐는 점이다.
아무튼 위 물음에 대해 옥 씨는 오히려 실제로 그 교회에 들어가 한 가운데 있으면 더 잘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나무 아닌 숲을 봐야 한다는 말과도 같겠다. [필자가 평소 늘 강조해 온 바] 인사이더보다 아웉사이더의 입장이 더 나을 수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 그 속에 들어 앉아 있는다고 해서 언제나 인사이더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소로서야 인사이더랄지 몰라도 마음은 얼마든지 아웉사이더일 수 있다. 댓글 등으로 느끼지만 그 교회들을 방문하거나 현재 교인으로 머물면서 바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옥 씨가 저렇게 주장하니 역지사지로 필자로선 일편 고맙기도 하다. 전술했듯 옥씨의 책 속에 직접 들어 가 보면 더 잘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논리가 된다. 옥씨의 책을 직접 사 보지 않고 이런 비평을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합리화 내지 자위가 된다. 그래서 그의 책을 사 읽고 그런 연후에야 비평해야 한다는 견해를 약화시키는 결과가 된다.
옥 씨는 그러면서 문제의 마케팅 교회들을 직접 방문하고 느낀 것은 일부러 "전혀 배제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객관적인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주관적 감정과 선입관이 개입될 수 있는 방법보다 자료에 근거한 글쓰기가 더 공정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객관적인 자료'란 뭘까? 남의 책들? 인터넷에 널린 자료들? 사실 성경 외의 모든 자료들은 다 주관성이 포함돼 있다. 필자의 이 비평문도 독자들 보기에 따라 주관성이 개재된 것으로도 뵐 것이다. 객관/주관 여부를 따지는 것은..그의 논리의 상당량이 자주 객관성이 결여돼 있음이 발견되는 탓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공정성' 면에서 부족한 책으로 느껴진다. 필자의 비평문이 주관성 뿐이고 직접 책을 읽지 않았으니 객관성이 결여됐다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 위에서 저자인 옥 씨의 논리만으로도 필자는 충분히 공정성 내지 객관성을 확보한 셈이니.
5.
CT가 저자에게 효과적인 전도법 사례들을 나열하면서 그런 전도방식이 꼭 '마케팅'이냐고 물었더니, 옥 씨는 그 전도법들을 다 알진 못하지만 각종 전도법들이 복음의 내용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는지 우려한다고 평가했다. 또 각종 전도법들이 복음을 '희화화' 한다고 말했다.
전도법 일부는 그렇다고 필자도 동의한다. 그런데 마냥 그렇게만 보면 아무 전도법도 있을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전도법을 통해 구원 받은 게 사실 아닌가? 그런 전도법이 없었으면 아직 구원을 못 받았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저자인 옥 씨 자신은 애초에 어떤 가장 절대순수한 방식으로 전도를 받았는지 아니면 목회자 가족 집안에서 또는 아버지의 교회에서 자동적으로 믿게 됐고 구원 받았는지 묻고 싶다. 옥 씨의 구원 과정이나 관점에서의 순수한 전도법만 전도인가? 또 저자의 같은 교회 친구들도 다 전도 마케팅을 초월한 순수한 전도만 받아 구원 받았는지도 아울러 묻고 싶다. 지금 한국교회의 교인들 중 마케팅을 완전 배제한 순수한 전도만 받아 교인된 사람들이 몇 %인지도 묻고 싶다.
물론 대표적인 전도 마케팅인 빌리 그래엄 전도대회의 일부 양식과 배경을 비롯한 많은 전도법들이 잘못돼 있음은 사실이다. [그래엄과 그의 '전도대회'의 문제점은 필자의 관련 글 참조] 그렇다고 전도 마케팅 또는 마케팅 전도가 다 잘못된 것인가? 노! 그렇지 않다. 여기서 저자의 주요 문제 하나가 자신의 제목에 충실하려고(?) 한 획일주의인 듯 싶다.
사도 파울은 다툼으로 하는 전도조차 일부 효용성을 인정했다. 획일주의를 피해야 한다.
대담 진행자가 국제제자훈련원의 실 대표인 저자의 부친이 현재 하고 있는 기법 등을 포함한 제자훈련이 마케팅일 순 없냐고 물으면서 사랑의교회 대각성집회는 어떠냐고 은근히 찍었다. 이 경우 기자의 물음이 맞다.
그런데 여태 부정적 일변도이던 옥씨가 긍정 일변도(?)적 반증을 통해 부친의 교회이니까 옹호하는 듯한 인상이 뚜렷하다. 분명히 대각성집회는 마케팅적 요소가 얼마든지 개입되고 포함될 수 있다. 마케팅이란 게 뭔가? 마케팅은 경제적 의미에서만 마케팅이 아니다. 심리적 의식론과 방법론 등에 있어 얼마든지 마케팅적일 수가 있다.
사실 최근 사랑의교회가 해 온 제자훈련이란 것의 주된 골자는 목적영성에서 나온 것으로..뉴에이지 마케팅의 '귀재' 피터 드러커에게 20년간 줄기찬 멘토링을 받은 교계 마케팅의 천재 맄 워런의 걸작품(?)이다. 그렇다면 옥 씨가 논하려고 시도한 그런 제자훈련의 순수성 내지 객관성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대각성집회도 "나름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계기를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 저자의 부족한 대답의 부족한 부분을 기자의 물음이 채워 줄 수도 있었다. 기자가 지적하려 했듯 대각성집회는 마케팅이 개입되기가 쉽고 마케팅에서 완전독립하기가 어렵다. 이 경우 마케팅 면이 아니라 목적영성이 배후에 개재된 것이 더 큰 이슈인 것이다. 옥씨는 적어도 바로 여기서는 부친의 제자훈련원과 사랑의교회 등의 더 큰 문제에 대해선 정작 입을 다물고 있다.
6.
기자가 조울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의 속편 '잘 되는 나'에 대해 견해를 묻자 옥 씨는 오스틴이 말하는 "잘 됨"과 성경이 말하는 "잘 됨"의 정의가 "많이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부분적으로 맞을 수도 있는 말이다.
여기서 필자도 짚고 넘어가고픈 것: (옥 씨가 생각하는) 성경이 말하는 잘 됨과 필자가 생각하는 성경이 말하는 잘 됨이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옥 씨의 배경이 신학적이고 그의 견해 대다수는 획일주의적이기에 그렇게 느껴진다.
잘 됨과 관련된 대표적인 성구는 다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님. 그대의 영혼이 잘 됨 같이 그대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시길 내가 간구합니다." (요서C=요삼 4절. 사역)
사도 요한이 친구 가이오 장로에게 쓴 글이다. 성경보다는 신학에 더 바탕을 둔 옥 씨니까 요한의 "범사에 잘 되는" 것이 오스틴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고 강조할 게 뻔하다. 오스틴은 흔히 빗대어 '번영복음' 전도자로 불리니까.
필자도 오스틴의 일부는 대단히 잘못돼 있다고 본다. 그의 '긍정주의'는 성경의 긍정적 정신보다는 노먼 빈슨 필의 뉴에이지적 긍정철학과 더 닮아 있다. 그리고 오스틴의 번영복음의 일부는 확실히 잘못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전혀 번영을 말하지 않는가?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 의인/신자의 번영을 말하고 있다! 오스틴이나 또는 은사계 사람들이 번영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 반사작용으로 신자들이 번영과 담을 쌓게 된다면 그게 성경적인가? 노!
왜 그런가? 번영주의가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 포인트는 성경 말씀의 약속, 언약의 진리를 빌린 것이다. 만약 번영주의 인사들의 행동 일부와 특히 부의 축적/사치 등이 잘못됐다고 해서 번영복음 내지 번영신학 전체가 다 잘못됐다고 한다면 그건 또 다른 반사적 획일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획일주의 인사들이 웹에 두루 널렸기에 하는 소리다.
7.
그 다음 CT는 저자가 성경보다는 칼뱅 개혁주의와 로이드 존즈, 잔 매카터 목사의 주장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주변의 평가와 함께 특히 존즈와 매카터가 은사/기적 종료론자임을 바로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옥 씨는 '성경보다'란 말이 "적절하지 못한 용어"라며 존즈와 매카터의 가르침이 "가장 성경에 충실하기에" 지지하는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바로 저자에게서 객관성이 가장 결핍된 대목이다.
존즈, 매카터의 가르침이 정말 '가장 충실'한지도 더없이 의혹스럽거니와 저자가 그렇게 굳게 믿는 객관적 척도가 뭔지 의아스러워진다. 결국 자연스럽게 칼뱅주의 내지 근 칼뱅주의, 칼뱅주의자들만이 성경에 가장 충실하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 또 그들이 성경에 충실하기에 '성경보다'가 '부적절'하다는 말은 은연 중 [존즈/매카터=성경], [칼뱅주의=성경] 공식의 발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옥 씨는 칼뱅주의적 개혁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뒤집어 보면, 옥 씨 입장은 칼뱅주의 내지 개혁주의가 아닌 쪽은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며 칼뱅주의권 바깥에 대한 일종의 차별화로 볼 수 있겠다.
물론 칼뱅주의권에서 반가워 할 말인지는 모르나 여기서 옥씨는 거의 우상숭배와 가깝게 칼뱅주의를 숭상한다는 약점이 여실히 엿뵌다. 칼뱅주의는 칼뱅식 성경해석과 그 후예들이 발전시켜 온 사고체제이다. 그런데 성경 아닌 어떤 신학이나 사고 시스템도 성경과 대등할 수 없다!
옥 씨 견해가 왜 짧은 생각인지를 좀 더 살펴 보자.
칼뱅주의도 보수로부터 진보까지 다양하다. 가령 현대 '긍정주의'의 시조라 할 만한 명사인 노먼 빈슨 필(프리메이슨 33단, 메이슨신전 그랜드채플린)은 칼뱅주의를 강조해 온 네덜란드계 미 개혁교단 목회자였다.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그의 수제자 라벝 슐러도 현재 같은 칼뱅주의 교단에 몸 담고 있다. 세계적인 주요 진보세력인 미국장로교(PCUSA)도 기본적으로 칼뱅주의다.
옥 씨의 말은 칼뱅주의의 보수부터 진보까지가 다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인가? 지상에서 성경을 가장 잘 반영하는 쪽은 칼뱅주의와 개혁주의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진가?
칼뱅주의가 실제로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필자의 여러 글에서 지적해 온 바와 같다. 물론 아르미니우스주의도 단점과 약점은 많다. 그러나 칼뱅주의 못지 않은 장점들이 아르미니우스 주의에 있다. 그래서 필자는 칼뱅주의와 웨슬리/아르미니우스 주의의 조화를 추구해 온 것이다.
칼뱅주의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는 태도는 아주 잘못이다. 성경이 판단 잣대여야지 신학이 궁극적인 판단 잣대가 아니다. 신학은 성경의 시녀여야지 성경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칼뱅주의 아니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태도는 되레 성경을 시녀로 꿇린 양상이다.
천국은 칼뱅주의자들을 위한 아랫목이 아니며..천국엔 칼뱅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각각 따로 모시는 구역제도나 소그룹제도가 없다.
그리고 도이벨트, 카이퍼, 러쉬두니 등 칼뱅주의권이 주권신학(dominion thology)을 강조했기에 오늘날 은사계를 비롯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까지도 신국화운동/주권신학운동/신사도운동/성시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도 성경을 가장 충실히 반영한 결과인가? 일부 칼뱅주의자들이 역시 나름의 신국론과 주권신학을 강조해온 카톨맄과 함께 호흡하고 있음도 "성경에 가장 충실한" 결과인가?
그리고, 매카터는 최강의 반은사주의자다. 현대의 어떤 초자연 은사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도 대표적인 칼뱅주의 입장일 것이다. 그런 입장이 요즘도..통하는가? 물론 반은사주의자들은 선호하겠지만. 다수가 선호한다고 해서 그게 진리인가? 매카터는 훌륭한 비판 정신도 없지 않지만 그의 비성경적 문제점은 너무나 많아 여기서 지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글로써 지적해 보련다.
이 점에서도 옥 씨는 상당히 획일주의적이다. 옥 씨의 견해는 자기 나름의 주관적 '객관성'은 갖췄을지언정 성경적인 면에서 균형적이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다.
8.
마지막으로..옥성호 씨는 현대 교회음악에 대해 적지 아니 비관론적이다.
"앞으로 교회가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드럼과 전자기타를 중심으로 교회에 파고 든 세상 음악과 인터넷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한국교회/미국교회 등의 현실을 볼 때 부분적으로 일리 있는 말이다. 실제로 문제가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역시 전체적으로는 획일주의적 논리다. 옥 씨의 주장은 그럼 오르간/피아노/관현악 중심의 음악은 언제나 세상 음악이 아니라는 말인가? 오페라 등 세속 클래식 음악계에 종사하면서 교회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고 하는 말인가!
그게 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말이다. 가사만 적당히 살짝 바꿨다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클래식으로도 얼마든지 세속음악으로서 교회에 파고 들 수 있게 돼 있다.
가령 세계적 명성을 뿌려 온 샬렅 처치가 부르는 음악은 대부분 클래시컬하다. 그런데 방만한 몸 가짐과 조기임신을 하는 등 그녀의 삶이야 아무러나 음악만 클래시컬하면 '비세속적'인가? 어떤가?
드럼과 전자기타를 세상 음악에서 떼 놓으면 되지 않는가. 드럼과 전자기타 자체야 악기일 뿐인데 무슨 죄인가? 드럼은 고대에 사용한 북과 별 다름 없다. 악기 자체는 인간의 적이 아니다. 반면 오르간/피아노로도 얼마든지 타락한 세속음악이 들어올 수 있다! 수많은 클래시컬 건반악기 음악이 작곡가가 사악하기까지 하다!
교회 드럼의 문제는 주로 적절히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드럼은 단일 악기로서는 데시블 수위가 매우 높기에 드럼셑 주위엔 반드시 투명방벽이 필요하다. 드럼 주자는 예술적 주법을 배우고 음량 위주의 강타 폭주(暴奏)를 피해야 한다. 그것이 큰 과제다. 대부분의 한국 드럼 주자들은 "두들겨 대는 맛"에 산다. 때로는 삶 속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교회에 와서 다 푸는 듯한 양상이다.
아울러 목회자/찬양인도자 등이 쓰는 마이크와 키보드 등에 연결된 스피커/앰프셑 등도 마찬가지다. 이런 확성 시스템들은 인간 청각이 편하게 수용하는 데시블 범위를 초과할 경우 청각장애, 청각마비 증세를 초래한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데시블 문제는 전형적 클래식 악기인 바이올린도 마찬가지다. 바이올린의 소리를 지나치게 확대하면 역시 청각장애가 온다. 그래서 특히 바이올린 주자 자신이 미래의 청각장애를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음악 연주자들은 성령님의 기름부음 아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칼뱅주의적 반은사관을 지닌 교회가 과연 현대에도 있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얼마나 인정은 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필자는 시끄럽고 난폭스런 현대음악 연주이든, 매우 반듯하고 테크닉과 표현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세련된 클래식적 교회음악 연주이든 간에 아무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예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기름부음은 인간의 기술적/예술적 노력이나 정서 전달 기여만으로 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의 역사다. 믿음을 통한 은사의 활용과 준비 기도, 헌신을 통해 온다. 샤울의 악령을 내쫓고 마음을 추슬러 준 것은 다윋의 기술만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 때문이었다. 엘리샤가 거문고 연주 끝에 예언을 한 것은 당대의 성령충만한 연주자와 대언자의 상호교감 위에 역사한 기름부음 때문이다.
성령님은 온유하신 크리스토를 증언하러 오신 분이기에 음악을 통한 성령님의 기름부음은 거의 언제나 온유하고 고요한 가운데 온다. 우리의 착각과는 달리 박수는 흥겨운 리듬을 맞추기 위한 것일 뿐 그 자체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전혀 무관하다.
오히려 인본적이기 쉬운 박수를 칠 때 기름부음이 떠나기 쉽다. 그런 점에서 교회음악은 특히 영감과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 고대와 초기교회의 신령한 노래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어디 그들이 쾅쾅, 좍좍 두들겼는가? 이 말은 드럼이 기름부음과 상관없다는 뜻은 아니다.
필자는 성령충만한 드럼 주자 한 분을 알고 있다. 그의 드럼 연주는 그야말로 세련되고 풍요로운 예술이며 기름부음이 자주 임하는 것을 곁에서 절감하곤 한다. 늘 헌신된 그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흐름에 매우 민감하다. 이처럼 악기 자체가 아닌 악기를 대하는 주자의 태도가 문제다.
음악에서도 획일주의는 피해야 한다. 문제는 악기 자체에 있지 않다. 클래식 연주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싸탄이 역사할 수 있다! 클래식적이라서 '거룩'하다면, 파바로티가 무슨 짓을 하든 '거룩'했어야 했다. 과연 그가 그랬는가? 온갖 추악하고 음란한 스토리를 다루는 오페라의 연주자들이 거룩한가? 그렇다고 오페라 연주자들이 다 거룩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말기를.
옥성호 씨는 부분적으로 관점이 옳다 하더라도 획일주의는 면해야 한다. 그러려면 신학 아닌 성경이 궁극적 잣대여야 한다. 칼뱅주의는 올바른 궁극적 잣대가 아니다.
이상과 같은 점들에서 우리는 되도록 낯 간지러운 위선을 피해야 한다. 성경이 아닌 다른 방법들을 궁극적인 잣대로 삼을 때 위선을 피할 길이 없다. 특히 은사론에서 교계 인사들은 많은 위선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만을 챙기고 나머지는 방치해 두는 방임주의형이 되는 것을 우리는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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