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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북극 급행'과 산타 교(敎)


김삼 ㆍ 2006/08/06 

 

화씨 105도까지 오르내리는 붙별 더위를 견디다 못해 급기야 일을 저질렀다.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니고 최근 북극을 다녀왔다. '북극급행'(Polar Express)을 타고 상상의 여행을 떠난 것. 막내가 도서관에서 재킷만도 시원해뵈는 애니메이션 DVD를 빌려왔기에 나란히 함께 감상했다. 이미 2004년 성탄시즌에 개봉된 작품으로 이름과 줄거리는 대강 들어 알고있는 터여서 별로 감상하고픈 대상이 아니었는데, 더위에 헐떡이던 차라 머리라도 식힐 겸 뒷북을 좀 쳤다.

필자는 철이 들고(성령의 은혜를 받고)부터 어떤 문화예술품이든지 꼭 인사이더가 아닌 아웃사이더로 보는 버릇이 들었다. 인사이더가 아니고야 어떻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나, 수박 겉 핥기가 아닌가 고 묻는다면, 인사이더로 푹 빠져 뒤늦게 헤어나지 못하는 것보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답하련다. 영화는 그냥 즐기는 것이라고? 그냥 즐기다보면 그냥 빠지게 된다. 편견이라고? 선입견이라고? 글쎄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양쪽 다 몇 번씩 실험 비교해 보면 가름할 수 있게 된다.

멜 깁슨의 '크리스토의 수난'도 그렇게 봤기에 [로스앤젤레스의 모 기독교방송이 참여를 위촉해온 관련 공동대담에서] 필자는 가장 객관적(?)인 평을 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의 수난'은 심각한 문제점을 지닌 영화다. 한마디로 정통 카톨릭 상품이라고 할 만 하다. 필자 자신뿐 아니라 식구들도 되도록 아웃사이더 중심의 관점을 갖도록 훈련시켜왔다. '북극급행'도 그랬다. 이 영화 역시 그렇게 감상하는 게 전적으로 옳았다는 뒷느낌이다. 바꿔 말하면 인사이더로서 봤다간 손해 보기 쉬웠다는 얘기다.

각설하고..크리스 밴 올스버그의 30쪽 남짓한 동화에다 눈거품을 잔뜩 불어넣어 왕창 부풀린 이 작품의 줄거리는 북극에 산다는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의심해온 한 소년이 성탄절 이브에 난데없이 나타난 북극행 급행열차를 타고 가서 산타를 만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는 얘기다. 독자들도 이미 감상했거나 감을 잡았을 것(지레짐작?)으로 보고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영화를 보며 한 줄기 눈물까지 흘렸다는 전형적 인사이더의 비평문을 읽고 싶으면 다음 사이트에 들러보라. http://inkheart.egloos.com/1273954

공상과학물에다 종교적 주제를 담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동시에 퍽 위험하다. 특히 산타를 축소복제한 듯한 엘프(소인족)들이 사는 산타본부가 있는 북극촌 선물공장지대에 도착한 뒤의 후반부는 카톨릭이나 프리메이슨리 정신을 선전/홍보하는 듯한 암시적(subliminal) 장면들이 돌출하기 때문에 감독/제작자의 배후가 궁금해진다.

신비의 환상처럼 나타난 거대한 증기기관차를 쳐다보는 장면부터 전반부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고, 유령 같은 얼굴과 분위기들이 꼬마들의 공포심을 자아낸다. 기차가 계속 달려가면서 빙원의 수풀과 북극 이리떼 등 고요한 주변환경과 대조되다가 쇄빙선처럼 자연빙판을 마구 깨어부수는 등..특수효과를 최대한 살린 트릴과 서스펜스는 계속 어린이들의 숨통을 조이거나 불안한 히스테리를 우려낸다.

롤러코스터를 이룬 기찻길이나 아슬아슬한 터널 통과, 나선형 케이크 같은 북극산을 빙빙 돌며 오르는 과정, 엘프들의 거대한 선물공장과 초고속 모노레일, 미끄럼질 치며 선물이 자동운송 되는 장거리 슬라이드 등 후반부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이 계속되는데, 신나긴커녕 황당하기 그지없고 장면마다 음산할듯 어둡고 [동작은 빠른데도 가볍지가 않고] 무겁다. 북극의 백야현상(?) 기분을 낸 탓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야경으로 일관된다.

어린이들이 멀리서 캐럴이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가 기차선로로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팔을 뻗친 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흡사 몽유병 환자들 같다. 여기저기 산타촌 건물 꼭대기에 자리잡은 피라밋들은 중요한 프리메이슨 상징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산타 썰매를 향한 출입문의 두 기둥 모양은 프리메이슨 신전 속 (솔로몬 성전을 본뜬) 보아즈/야긴 기둥을 연상시킨다.

이 영화의 절정은 물론 어린이들과 산타와의 조우. 똑같이 빨강 유니폼을 입은 수천수만의 선물제작창 엘프 '공돌이'들이 초대형 추리가 서있는 광장에 운집한 가운데 거대한 사슴들이 끄는 썰매, 거대한 선물꾸러미 앞에 선 거구의 산타와 만나는 장면은 (미안하지만) 왠지 중국 문화혁명 당시의 홍위병들, 옛 소련의 붉은광장, 평양에서의 무력시위가 연상되는 건 필자만인가.

산타의 존재를 의심해온 소년이 떨어진 썰매 방울을 들고 듣는 모습에, 다가온 산타의 귓속말 같은 것이 "믿어!"(Belive!)라는 속삭임이다. '믿어!'는 수상작인 영화 주제가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믿도록" 세뇌하고 주입시킨다. 믿긴 뭘 믿나? 정말 믿음을 북돋우는 영화라면 그 정답은 "예수님!"이어야 하는데, 해답 아닌 묵비의 답은 "Believe.." 즉 (산타를) 믿으란다. 예수 대신 산타 말이다.

여기 믿음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가 뒤엉긴 패러독스가 있다. 즉 아이들에게 철에 맞는 가짜 행복감을 자아내려고 "산타는 정말 있다"고 귀띔해주는 부모나 교사의 단순하고도 낯두꺼운(?) 거짓말거리가, 여기선 신앙의 대상으로 둔갑하는 역전의 논리 내지 궤변의 '진리'가 존재한다. 사이비/이단, 산타교의 현장이다.

지상에 실재하지 않는 붉은 엘프들은 '백인 피그미'족이 아니라 사실 영계의 악령들을 상징한다. 영구 복부비만형 뚱보 거인인 산타는 카톨릭이 간판처럼 내세우는 '성인' 니콜라스라는 "성스런" 냄새보다는 북극본부에서 엘프 대군을 거느리고 전세계 어린이들을 좌지우지하는 붉은 음모의 폭군으로 느껴진다.

영화 '크리스마스 스토리'(Christmas Story) 장면들 중 선물을 주는 미끄럼틀 꼭대기 위에서 주인공 소년 형제를 비롯한 어린이들에게 전혀 미소도 없이 단지 쌍도끼눈을 부릅뜨며 '호. 호. 호.!' 하고 웃어 잔뜩 겁 먹고 주눅 든 어린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게 하는, 그야말로 악마적인 산타의 모습이 이 작품의 산타와도 오벌랩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SANTA의 영어 철자를 하나만 순서를 바꿔보라, 'SATAN'(!)이 된다. 한글도 '산타'의 'ㄴ'받침이 살짝 뒷걸음질치면 '사탄'이다. 해마다 상업화돼가는 성탄절 광장 한가운데서 예수 크리스토 대신 왕노릇하는 이 뚱보 영감의 이름이 왜 하필 'SATAN'/사탄과 자칫 혼동되는 SANTA/산타인지 기분이 묘하다.

붉은 엘프 군대가 섬기는 거신, 어린이들이 누구나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 넓은" 선물 할아버지, 환호/작약/갈채/숭배의 대상인 산타를 조심하라. 그리고 거대한 추리도 조심하라. 이 초대형 추리 꼭대기 초대형 오각별(pentagram)은 영화 속에서 화면을 꽉 채우면서 여러 번 공중회전하여 역 펜터그램을 이룬다. 역 펜터그램? 그렇다! 사탄의 상징이다. 프리메이슨리/사탄교/마교(wicca)/신이교(Neopaganism)/동방별(OES)파 등의 공통된 심벌이다. 왜 별을 여러 번 뒤집겠나? 겉으로는 단순히 엘프들의 실수 같아도 알고 보면 장난이 아닌 것이다.

매년 성탄시즌이면 라커펠러센터의 거대한 크리스마스 추리에도 수십 만 개 등불이 켜진다. '북극급행'의 거대 추리와 라커펠러센터의 거대 추리 사이엔 보이지 않는 연결선분이 있다는 기분이 든다. 산타가 왜 "호. 호. 호.!" 하고 인위적/단말마적으로 끊어 웃는 특유한 웃음을 웃는지도 곰곰이 가늠해 보라. 이 웃음엔 주술적이고 이교적인 연원이 있다.

"네(핼렐/루키페르=루시퍼)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예샤야후=이사야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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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윤
2006-08-11 23:42
24.xxx.69  사실, 저도 아멘넷과 우연치 않은 기회에 연을 맺고 사소한 댓 글이라도 참여할 때마다 혹시 존경하는 목사님들 사이에서 성도님들 사이에서 혹시 누라도 될까바 썼다 지웠다도 반복하고, 꼭 하나님께 하루에서 길게는 사흘, 나흘이 넘게 여유를 갖고 기도를 드린 후에야 글을 올렸습니다. 그렇다고 결코 제 성격이 소심한 편은 아닙니다. O형이거든요. 그것이 저에겐 영적 분별력을 둔감시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였죠. 철저히 제 욕심과 제 지식만으로 글을 적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차라리 준비 없이 올릴 바에야 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낫죠. 그리고 현재의 신분은 신학생이 아닌 음대생 인지라 실기연습과 공부로 인해 그 마져도 못하게 될 땐, 그저 중보 기도로 대신했었죠. 그리고 워낙 좋은 댓글들이 많이 올라와 굳이 저는 참여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란 생각으로 마음을 굳혔었습니다. (이번 댓글에도 괜시리 후회가 생깁니다)

여하튼, 저도 아래 제임스님의 글월 처럼 비슷한 걱정을 항시 해왔었는데 참 기쁘네요. 서로에게 이런 방법으로도 위로를 받으며 격려를 받으며 다른 견해는 서로 지혜롭게 나누면서 온전케 되어진다는 것과 마음을 함께 한다는 것이요. 목객님도 그 중의 한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들 다시 화이팅이구요. 샬롬입니다.
그리고 김삼 목사님,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께요.
늘 무더위에 에어콘도 없이 애쓰시는데, 어제 시원하게 장대비가 내려주었네요. 천둥 소리도 목사님의 힘 찬 글월들 만큼 아주 우렁찼구요.

기도할께요. 어제 하루 종일 목사님 걱정 많이 했거든요. 저의 당돌한 성격 탓에 혹시 마음이 불편하시진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미운놈 떡 하나 더 주신다는 심정으로 번거로우시더라도 댓 글 한번 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임스
2006-08-10 10:25
66.xxx.100  저 또한 두렵습니다. 제가 올린 글들이,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또는 판단하고 아니면 저 잘났다고 떠드는 그러한 것들이 될까봐 그렇습니다. 아직은 너무도 부족한 제가 이렇게 떠드는 것은 단지 제가 하나님 말씀 대로 살고싶다는 저의 소망을 저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다만 여러 분들이 생각의 단초를 주시기에 거기에 댓글을 다는 것입니다. 모쪼록 정지윤님께서도 저의 뜻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자라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임스
2006-08-10 08:18
66.xxx.100  제가 정지윤님과 토론하려는 것은 아니니 이글만 올리겠습니다. 양해해주시길….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고자 할 것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세상일로 인해 잠시 제쳐두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과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과제가 아니라 기도하고 싶고 성경말씀 읽고 싶은 열정이 계속 끊임없이 솟아올라서 자기도 모르게 성경책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텔레비젼 보다가도 연속극이 재미없게 느껴지고 성경말씀 읽고 싶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직장일 끝나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고로, 저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매일 언제라도 하나님 말씀을 볼 수 있으니까요….

진리의 말씀이 우선이냐,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냐 – 여기서는 영혼을 살리는 얘기가 아니고 자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었했습니다 – 따진다면서 님께서는 둘 중에 하나를 먼저로 놓는데,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선을 베풀 때도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자선/선행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한낱 자기 의를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뭔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영혼을 살릴 때도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없이 영혼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진리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무엇이 우선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지키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강조한다고 하시는데 그 말씀에는 이러한 기초가 많이 결여된 것 처럼 보여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무엇이 우리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어야 하며 목적이 되어야 하겠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저의 표본이며 하나님 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저의 목적이요 소망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 전한 사랑은,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보다 먼저 오면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만을 강조하다가 잘 못된 길로 가는 것을 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타협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요즘의 시대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신학 대학 시절에 그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사랑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아닙니다. 먼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올바를 때에만 이웃에 대한 사랑도 올바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순종입니다. 카인의 제사 보다 아벨의 제사가 인정받은 것은 아벨이 더 정성스럽게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아벨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400 여년을 종살이 한 것도 아브라함이 실수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사울왕이 왕좌에서 쫓겨난 것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순종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지윤님, 저 역시 하나님 말씀을 다 잘 이해하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제 작은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제대로 성경공부 시작한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가 아는 만큼의 범위에서라도 진리의 말씀에 의한 사랑을 실천하고 싶군요. 그리고 그래야만 영혼을 살리는 선행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지윤
2006-08-10 06:29
24.xxx.69  사실, 조금 전 제임스님께 답변을 달아드릴려고 컴퓨터 메모장에 글을 적고 있었습니다. 직접 이 곳에 적다보면 컴퓨터가 멈추어 제 글이 모두 날라갈 때가 있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김삼 목사님의 댓글이 올라와 있네요.
저도 화이팅 입니다. 그리고 저도 목사님이나 제임스님 못지않게 진리를 사랑하지만 그 진리도 '사랑' 없이는 그 힘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행'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하 내용은 제임스님께 드립니다.

제임스님 맞습니다. 성경은 여전히 저에게 날마다 새롭고,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 어렵습니다. 저도 어릴 적 부터, 성령 체험을 한 바 있고 김삼 목사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영적 분별력을 지녔다 한들, 기도와 성경공부는 하늘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계속 될듯 싶습니다. 영원한 과제이죠.

그리고, 제 댓글에 대해서 “유행”이란 단어를 사용하셨는데요. 시대는 날마다 변합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사상도 변하구요. 하지만, 지금껏 사랑과 선행이 인간의 이기적 욕구로 변질되었던 적은 있어도 저는 이것을 유행이라고 언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이 우선이냐, 사람의 생명이 우선이냐에 대한 문제는 제가 이미 성경을 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제임스님의 발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유아기적 발상입니다. 참고로 저는 닭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락에서 저에게 제기하신 문제는 이미 성경이 그 해답을 가져다주었으므로 시간 관계상 중략하고 지금껏 제임스님의 말씀처럼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시대적 정황으로 인해, 순교자의 길을 택한 역사적 사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즘 같은 종교 다원화 사회에서 일어나는 신앙적 문제와 비교하려 하시는지 저는 매우 궁금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총부리를 겨누는 그런 공산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조금은 달라졌겠죠. 아마 바울보다 더 많이 감옥 신세를 졌을 제 성격입니다. 어쨌거나 예수를 믿건, 소를 숭상하건 부처를 믿건 이 모든 것이 자유인 세상입니다. ‘생명’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감옥에 가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답해 보십시오. 오히려 기독교적 교리는 일부 목사님들보다 스님들이 더 잘 아는 세상이 되었는데 말이죠. 무엇이 우리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어야 하며 목적이 되어야 하겠느냐 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유일신 사상’ 이것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논리론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 잘 알지 않습니까. (전도는 우리가 할지라도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 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지조를 지키면서 우리의 할 일과, 또한 그들의 필요함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과 ‘선행’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속한 우리의 선행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엔 한계가 없지만 인간의 잣대로 평가절하한 성경의 ‘교리’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 오직 믿음으로 인한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에 따른 병고침, 기사와 이적은 제외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이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아 갈 수 있는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반면 하나님을 어렴풋이 알지만은 그 안에 믿음의 확신이 없는 자들에겐 ‘성경’을 선물로 주는 것보다 배고프고 굶주린 자들에겐 빵 하나, 옷 한벌이라도 더 줄 수 있는, 어떠한 조건 없는 ‘사랑’과 ‘선행’이 더욱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 1%의 기적(천부적 재능)도 중요하지만 99% 노력(후천적 재능)이 더 중요하듯이.

끝으로 서로 20여년을 다르게 살아 온 새내기 부부가 싸우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살아 온 배경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 한 친구들에게 서로 적어도 20년씩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살아보라고 가르칩니다. 그 후에 이혼해도 늦지 않다고 얘기해 줍니다. 남편의 입장에서 20년, 아내의 입장에서 20년, 도합 40년이란 결론이 나오죠. 그 장대한 시간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서로 존중해가며 인내한다란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러면서도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며 어쩌면, 하늘나라 가는 그 순간까지 티격태격 다툴 수도 있는 일입니다. 결국 이 의미는 ‘분열’은 합당치 않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테레사 수녀님을 섣불리 호도하는 말에 감히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그대로를 인정해 주며 사랑하고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솔로몬왕의 유명한 판결문에서도 우린 배울점이 많습니다. 진실로 한 핏줄이요. 내 형제요. 내 자식이란 생각이 들면 어떻게 수 많은 개신교가 여러 갈래로 분리될 수 있으며 서로를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카톨릭과의 문제도 마찬가지이구요. 진정한 참 어머니는 오히려 가짜 어머니에게 양보할 것이라는 순리를 솔로몬왕은 밝히 알았던 것입니다. 아이를 잃는 것보다 그 아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 어린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테레사 수녀님의 일화도 마찬가지 이구요.

신학 대학 시절,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두꺼운 성경책을 단 한마디로 축약해서 표현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여기저기서 많은 답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교수님이 원하시던 대답은 ‘사랑’이었습니다.  
     
 
 제임스
2006-08-09 17:22
66.xxx.100  제가 성결지윤님과 김목사님 사이에 끼어들려는 것은 아니고요, 단지 성결지윤님의 글을 보고 몇 자 적습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깜짝 놀랐던 것은, 신학 대학까지 나오신 분이 결국엔 성경을 잘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리의 말씀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역시 요즈음의 유행(?)을 따라 사랑과 선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인의 예를 들으셨으니 하나 더 묻지요.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400 여년 동안 종살이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또 하나님께서 왜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는지 아시는지요?

거의 1900 년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순교의 길을 택했었습니다. 기독교의 교리 보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 정말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생명보다 더 소중히 진리의 말씀을 지켰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 것인지….

제가 님의 말씀을 오해했다면 용서하시기를 바라고, 만일 아니라면 곰곰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결지윤
2006-08-09 10:00
24.xxx.69  답변 잘 읽었습니다.

괜시리 어르신 목사님과 논쟁 따윈 벌이고 싶지 않구요. 질문 몇 가지만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표현을 빌자면 제가 아직 영적 분별력도 목사님보단 부족한 것 같고 성경적 지식이나 모든 면에서 병아리 수준이라는 전제 하에.

첫째,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으셨을까요? 물론 제 생각도 선악과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언급한 시발점의 뜻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죄'가 되었지만, 그 열매 자체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습니다.

둘째, 산타를 믿는 그들에게 기독교적 논리로 억지스레 산타를 믿지 못하게 할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어떻게 증거하겠습니까. 영화에서처럼 동일하게 믿어! 한다고 믿겠습니까? 이것은 모순입니다.

모든 교리를 넘어서서 어떠한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는 그리스도안에 온전히 선 '사랑' 과 선행'함이 이 모든 것의 정답이라고 생각되어지는데,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셋째,  목사님의 글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만 목사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으니, 저도 한 수 거둡니다. 요즘 토론장에 한창 카톨릭과 기독교의 일치에 대해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사실 저는 테레사 수녀님을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보다는 꺼져가는
한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무조건적으로 피하지만
말고 이방인에게서도 배울점은 배우라 하셨습니다.
(눅 10 : 36 - 37)

이는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통로'이지만,
우리 믿는 자들의 사랑과 선행은 '구원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선 순위를 우리가 정하는 것은 아닐테지만, 이 모든 것에는 '순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결코 성경을 많이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 정통 기독교적 교리가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비밀이요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귀결에 이르렀는데요.

전 이따금씩 크리스챤 친구들에게 섣부른 '오해', '편견'은 금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말 성경에서처럼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게 아니라.  다만, 아벨의 제사를 더 눈여겨 보신것 뿐이죠. 우리 인간들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을 때, 그 선물에 정성이 없다하여 감히 뿌리치지 못하 듯. 반대로 정성 가득한 선물엔 눈물을 글썽거리기 까지 하죠. 문제는 가인의 '질투'가 화근을 자초한 것이죠. 

하지만 지금껏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랜 시일동안
한국 교회에서 이와 같은 잘못된 신앙적 지식을 보고 듣고 배워왔습니다.

이처럼 한 형제에서 출발한 카톨릭과 기독교가 다르듯, 제물의 종류와 그 형식은 달랐지만 문제는 아벨의 정성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였던 것이죠. 그 당시엔 어떠한 교리도, 성경도 없었을 텐데요.

이렇듯 많은 논란속에 그 빛을 바라신 테레사 수녀님이나 성 니콜라스 신부님의 선행의 결실도 기독교적 교리에 의해 가감되거나 섣불리 왜곡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되어 지는데요.

끝으로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전 테레사 수녀님께서 돌아가실 때, 뉴스에 보도도 되기 이전 교회에서 기도중에 그 분이 임종하셨다는 걸 직접 체험했으며 하늘나라에 가시는 그 분의 영혼에 기쁘게 화답해 드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놀라 당황하기도 했지만요. 

그러면, 저도 이단인지요? 아니면 악마의 궤계를 제가 분별치 못해서 그런건가요. 아니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더군다나 저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또한 카톨릭 신자셨는데, 두 분다 아주 편하게 가셨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으신 채.. (외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시간까지 정확히 말씀하시고 천국에 가셨으며, 외할머니께서는 하늘이 열리며 천사가 보이신다 하셨습니다) 

참고로 목사님께서 댓글의 초반에 자랑하시듯 써놓은 글을 보니 저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는데요. 저 또한 모태신앙으로 부모님께 물려 받은 신앙 유산도 크지만 어려선 장로 교회에서 신학 대학 시절엔 성결 교단에서 청년의 시절엔 감리 교회에서 사역하며 훈련 받았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구요.

그 결과, 무익하나마 제가 부득불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 분의 목적에 감사히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은사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맨하탄 음대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으며, 루시퍼가 망쳐 놓은 음악의 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열씸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plus 환경운동과 함께.

하지만, 극도로 절제하고 있으며 '정직'한 생활법칙과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울리는 꽹과리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 (실력은 그리 출중한 편은 아닙니다만..)

하나님은 아시겠죠.
답변 부탁드립니다.

p.s. 고린도후서 13장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저도 진실로 참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사님의 글에 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심사 숙고함은 들어있었으나 추측함도 곁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지혜는 희미하지 아니하고
밝고 명확하며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받침 하나를 바꿔 산타가 사탄이 되는 말장난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글을 많이 써도 그 글의 주인이 성령님이 아니시면 그 글은 불에 태워지는 종지 쪽지에 불과합니다. 부디 저의 당돌한 행동에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듣기에 좋은 말, 필자의 글에 동조하는 무리들만 있다면 앞으로 목사님의 글에 어떠한 발전함도 없을 것 아닙니까.

훈계 감사했습니다.  
     
 
 제임스
2006-08-08 14:52
65.xxx.100  주님께서 목사님의 영과 혼과 육을 더욱 더 강건하게 하시고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聖潔智允
2006-08-08 13:58
24.xxx.69  “It doesn't matter where the train is going.
What matters is deciding to get on.”

저는 이 문구 때문에 결정적으로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죠. 아름다운 BGM과 가사들.. 그리고 풍부한
볼거리들을 애써 외면한 채.

영화 스토리 전개상 핵심 포인트가 기차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고 무작정 믿고 기차에 타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엉뚱한 발상..  천국이든, 지옥이든 상관없다라고 들리더군요.

하지만,  전 김삼 목사님처럼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존재 만큼은 무턱대고 무시하고 싶진 않네요.

이런 법칙이 있죠.

"산타를 믿는다.
산타를 믿지 않는다.
산타가 된다."

그저, 아이에서 어른으로 그리고 부모의 마음으로..
아주 간단한 논리죠.

결국 '선물'과 '산타' 사이엔 부모님들의 사랑이 있습니다.  누가 그런 부모의 마음에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 영화 원작자의 마음에도 마찬가지이구요. 설령, 영화 제작자들 및 기타 상업술엔 돌을 던질지언정.

다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유정님의 예배 칼럼에서도 언급되었듯, 산타에 대한 흑백논리보다는 그 모델이 되었던 니콜라스 신부님의 선행을 가르치는 방법도 좋겠구요.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스로가 '구원자'의 부르심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물보다 더 강력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임에도 예언의 성취를 위해 세상적인 방법 또한 존중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3 : 15)

이렇듯 전 산타교는 믿지 않습니다만,  굳이 초반부터 아이들의 상상의 나래를 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도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로 더불어 에덴 동산에 함께 두신걸 보아도 알 수 있죠. 보암직도 했고 먹음직도 했던 그 나무의 열매가 죄악의 시발점이 되리란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셨을 텐데요.

몇해 전인가 교회 크리스마스 행사 때 뻔히 산타 할아버지가 가짜라는 것은 알았지만, 산타 할아버지인냥 빨간 털옷을 입고 아이들에게 선물 나눠주는 기쁨으로 무대 뒤에서 연신 땀을 닦던 한 청년이 떠오릅니다.

바꿔 말하면, 앞서 언급한 마태복음 말씀처럼 산타보다 더 큰 선물을 주실 능력이 되는 예수님이시지만 크리스마스 절기 때 세례 요한처럼 두꺼운 털옷을 입고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겨주는 그 일이 결코 경거 망동한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모든 일에, 기독교의 교리와 율법에 끼워 맞추기 좋아하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그 일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아니었는지요. 그들은 결코 이단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 보다 더 정확하게 성경 교리를 읽고 보고 듣고 했던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명분 하에 바른 길, 바른 진리만 외치는듯 보이던 그들에게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나님께선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느니라.." 그들의 교리신앙이 아닌 거짓되고 가증된 행위에 일격을 가한 말이죠.

이 땅에 산타의 존재를 믿는 어린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화의 저자 Chris Van Allsburg에 대해서 혹 잘 아십니까?

그 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확실한 정황과 근거도 없이 단순한 느낌과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무시무시한 논박을 가하는 것보다 산타의 복장을 하고 크리스마스 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해주는 것이 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데요.

물론, 개인적으로 톰 행크스 싫어합니다.
다빈치 코드도 그러했고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구요.

하지만 김삼 목사님의 예리한 분석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은.

다음부터 말씀을 인용하실 땐 약간 조심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과오 중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가감하면 벌을 받는다 하죠.

하지만 성경의 말씀은 약간씩 바뀔 수 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로..)
그리고 언어도 없는 미개 종족들에게 성경을 가감하지 않고 올바르게
전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참조>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이나 또는 우리에게 지금도 변함없이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모든 응답, 말씀과 예언을

자신의 형편데로, 또는 상대방의 형편을 자신의 잣대로 재어 가감하는 것은 큰 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샤야후서에 나와있는 북극 집회가 저 영화 제작자들이 생각했던 그 북극 집회가 아니면 우리만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욕보이는 결과까지 이르게 되죠.

그래서 조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김삼
2006-08-07 18:25
72.xxx.31  제임스님은 사귈수록 순수한 분이신 듯 느껴집니다. 여러 모로 때가 묻지 않은.. ^^
태어날 자녀를 기다리시는 나이군요. 하나님이 좋은 아들딸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이들은 비유컨대 빈 도화지 같아서 부모/어른이 그림을 그리는 대로 빚어져 갑니다. 부모가 책을 읽으면 아이도 책 읽는 자녀로 자랍니다. 기도하면 기도하고, 성경 보면 성경 보고, 감사하면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칭찬하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다 경험으로.. ^^  
     
 
 제임스
2006-08-07 16:44
65.xxx.100  아~ 그렇군요. 전 아직 자식이 없어서 여기저기 어깨 너머로 귀동냥을 하는 실정입니다. 성경에 자녀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있는데 아직 보지 못한 것은 제가 많이 부족한 탓입니다. 전 그냥 왠만한 '자녀'에 대한 말씀은 전부 저 자신에 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고 앞으로 있을 제 자식에 대한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거든요. 더 열심히 말씀 읽고 배우고 주님 사랑하면서 살아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드는군요. 구원받고도 말씀에 충실히 순종/복종하지 못하며 불쑥불쑥 솟아나는 본성을 절제하지 못하고, “아이고, 또 내가 왜 이러나~~~” 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소망을 가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아이들과 놀아주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하군요. 귀찮다고 무시할 일이 전혀 아닌 것 같군요. 또 하나 배웁니다.  
     
 
 제임스
2006-08-07 13:11
65.xxx.100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사항을 갖게 되었습니다. 탈무드를 시작으로 세상에 많은 지혜서들이 있고 그 지혜서들에는 대부분 자녀교육에 대한 내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합니다. 또 자녀교육에 관한 전문강사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자녀교육에 많은 관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성경에는 자녀교육에 대한 말씀이 거의 없습니다. 탈무드의 그 유명한 교훈 – 먹이를 잡아주지 말고 먹이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라는 그러한 교훈에 버금간다거나 더 뛰어난, 아니면 뭔가 “아! 그렇구나”라고 무릎을 탁 칠만한 뭔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력이 나빠서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에 중점을 두지 않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기억나는 게 거의 없습니다. 다만,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성경말씀을 잘 알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디모데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가르쳤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는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까요? 그리고 구약에도 보면, 부모가 이런저런 것들을 자식에게 – 자식들에만 중점을 두고서 – 특별히 가르쳤다, 라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자식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고 말입니다. 부모의 행동이나 말 그리고 생각을 보면서 부모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란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올바른 믿음 가운데 단일한 마음으로 살면 굳이 자식을 이렇게 저렇게 가르쳐야 할 필요가 없기에 성경에는 자식교육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부족하고 너무도 모자라는 저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제가 주님을 닮아 완전하게 되기를 소원한다고 기도합니다. 말에서나 행동에서나 생각에서나 마음에서나 정성에서나 모든 면에서 주님을 닮아가기를 참으로 소원한다고 기도합니다. 아직은 화도 잘 내고 오래 참지 못하고 긍휼도 베풀지 못하며 온유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살지 못하지만 언젠가 주님을 닮아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하며 겸손한 삶으로 나의 구원이신 주님께, 나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자매
2006-08-07 12:04
24.xxx.232  안녕하세요?

한여름의 싼타이야기라.....시원하네요.....^^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찬양작곡가이신 이유정 목사님이 CCM Love에 쓰신 칼럼하나가 생각납니다. 백화점에 갔다가, 아들이 싼타싼타 하는 모습에 느끼신 점을 쓰셨다는데요, 싼타의 유래와 기독교에서 싼타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에  대해서 쓰셨습니다.. 대표적 이유는, 싼타는 성탄절에 아기예수를 잊게 하는 완벽한 창조물이라는 것이었어요. 싼타의 모델이 되는 실존인물이 있었는데요, 선행을 많이 한 성 니콜라스라는 신부님이랍니다....흐음....
target=_blank>http://www.ccmlove.com/main/Link.php?GO=ccmer

가 출처입니다. 화면 왼쪽에 보면 이유정의 예배칼럼에 들어가시면 있어요...(혹시 이글을 보시는 분중에 필요하실 분이 있을까봐......)

Outsider의 입장의 관점에 대해,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좀 더 생각을 정리하여서, 조금 이따가 올릴께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