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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칼뱅-아르미니우스 주의

성경은 무한속죄, 조건부 구원을 말한다

 


-칼뱅주의 주요 교리 비평 <1>

[시리즈를 시작함에 있어 먼저 몇 가지를 밝힌다. 필자는 장로교인이다. 따라서 칼뱅주의권에 속해 있다. 칼뱅주의는 칼뱅주의를 아는 사람이 비평해야 더 정확하겠기에 감히 나선다. 왜 꼭 칼뱅주의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냐, 제 얼굴에 침 뱉기 아니냐는 물음은 글을 읽어 나가다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사족이겠지만, 이 서론적 내용은 전문, 필자 자신의 오리지널이다. 딴 학자들의 글을 전혀 참조하지 않고 직접 성경 말씀 묵상과 성령님의 감화를 통해 써내렸다. 시리즈 다음 회에서는 다른 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참조하련다.]

칼뱅주의는 소위 '제한속죄설'(Limited Atonement)을 주장한다. 칼뱅주의 5대 교리 'TULIP'의 가운데 부분을 차지하면서 가장 핵심적이고도 가장 문제성이 심각한 교리다.
[참고로 칼뱅주의 5대 교리는 •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이니셜만 따 'TULIP'으로도 불리며 그래서 때로는 튜울맆 꽃으로도 상징된다.] 제한속죄설은 또 여타 4대 교리와 구조적/내적으로 상호연계돼 있다.

제한속죄설에 내포된 요소

칼뱅주의의 '제한속죄설'은 다음 사항들을 포함, 또는 잠정적으로 내포한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채찍형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피 흘리셨다.
예수님은 단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지 일부 사람들만 위해 수난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속죄는 단지 일부 사람들에게만 적용될 뿐이다.

아울러 칼뱅주의의 '제한속죄설'은 다음 사항들도 간접시사하는 듯 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속죄는 칼뱅주의와 이 제한속죄설을 믿고 제대로
이해하는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칼뱅주의를 굳게 믿는 사람들만 천국에 갈 수 있거나 갈 가능성이 더 많다는 얘기다.

{위는 칼뱅주의자들의 착각이다. 칼뱅주의 교리 자체는 칼뱅주의권 사람들이 생각하듯 성경진리 자체가 아니다. [칼뱅학설=성경]이라고 봄은 가히 이단설에 가깝다! 따라서 그들자신의 입장인 '주권신학'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은 어차피 칼뱅주의 그룹 가운데 얼마, 아르미니우스주의 그룹 가운데 얼마, 여타 그룹에서 얼마의 사람을 구원하실 터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

하지만 필자의 묵상에 따르면, 성경 말씀은 위의 가설/교리와는 거의 정반대 입장이다! 즉 무한속죄와 조건부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들이 너무도 많지만 우선 딱 한 구절만 올려 보자. [이 성구는 필자가 칼뱅주의의 문제점을 갖고 오래 고민하던 끝에 영감처럼 번개 같이 눈 앞에 튀어 나온 구절이다.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감화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또 그 분은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 그런데 우리들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죄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요한서신A 2:2 사역).

위 구절은 원문을 눈 씻고 봐도 그대로다. 잘못된 구절이 아니다. 요한은 위 구절 뒷 부분에서, 영어의 'not only..but also'와 같은 그리스어 관용구 '우..데 모논..알라 카이'를 씀으로써 화목제물이신 주님이 단지 (구원받을) 우리들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위한 분이었다고 단언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위 구절을 무척 싫어하고 꺼린다. 칼뱅주의 5대 교리의 하나인 제한속죄설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탓이다. 사도 요한에 대해 의구심을 갖기 십상이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위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능히 깨닫지도 못한다. 여기서 칼뱅주의자들이 혼동/착각하는 점은 무한속죄가 곧 보편구원을 뜻함이 아니며, 따라서 무한속죄는 조건부 구원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칼뱅주의자들이 그토록 추앙해 온 칼뱅 자신은 과연 위 구절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다음 편에서 상론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본론에 앞서 몇 마디 머릿글로 열고 있다.

성경말씀 앞에서 실족 말아야


주님은 침례/세례요한을 지칭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셨다. 요한이 하마트면 실족하여 예수님을 거의 오해할 뻔 했기 때문이다.

페트로는 경고한다.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억지로 풀다간 자칫 망한다고. 우린 성경말씀을 나의 양식으로 삼고 날마다 묵상하되, 그 말씀을 제멋대로 찧고 까부르고 장난쳐선 안된다. 성경 갖고 그냥 놀아선 안 된다는 얘기다.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과 영감으로 우리 속에 날이 새고 샛별이 뜨기까지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페트로B 1:19).

말씀 묵상 때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주의할 사항은 [성경말씀 자체와 성령의 감동을 벗어나] 함부로 사사로이 풀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이 아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에 똑 같은 성령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페B 1:20~21).

페트로는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잇는다.

"..우리의 사랑받는 형제 파울도 그에게 주어진 지혜를 따라 여러분에게 [글을] 썼고, 또 모든 편지에서도 이런 것들을 말했는데, 그 중엔 깨닫기 어려운 것도 더러 있으니 무식한 이들과 불안정한 사람들이 딴 성경처럼 그것들도 뒤틀어 풀다가 자멸하게 됩니다."(페B 3:15b~16)

이 경고는 우리 누구나 받아야 할 경고이며, 칼뱅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위대한 칼뱅도 흔히 실족하곤 한다. 너무 자주 혼동한다.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 절대숭앙하다 못해 자신을 절대주권자로 착각(?)했는지 스스로 판관 자리에서 간접 살인도 했다. 침례/세례 요한도 실족할 뻔 했는데 칼뱅이야 오죽하랴. 신학 사상과 교설은 성경 진리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고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
그런데도 학자들은 스승에게 배운 신학 사상과 온갖 교설들이 다 성경과 맞먹거나 버금가는 진리라고 굳게 믿는 특성이 있다. 그런 현상은 칼뱅주의자들이 칼뱅의 학설 내지 교설을 (5대) '교리'로 정립한 것으로 입증된다. 그것은 칼뱅을 단순히 존중해서가 아니라 성경 이상으로 받들어, 우상숭배를 한 결과다. 바로 그 점을 저쪽 세계의 칼뱅 선생께서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문제는 이 세상에 칼뱅주의 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칼뱅주의권 사람들도 있지만, 정반대 성격의 교리로 맞서온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칼뱅주의와 함께 신교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르니미우스주의권이 바로 그것이다.

골고루 내리는 햇빛과 비

주님은 침례/세례 요한 때부터 천국이 침공을 당해 왔다고 말씀하신다. 천국은 침공하는 이들이 먼저 뺏는다. 칼뱅주의자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든 간에, 시쳇말로 믿음으로 '땅 따 먹기'를 하는 자가 땅 '임자'라는 얘기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제공된 천국이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무한속죄와 조건부 적용, 조건부 구원의 원리는 낱말은 어려운 것 같은데 실은 퍽 간단하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 말씀을 하신다. 무한속죄와 조건부 적용은 이 성구에서 잘 이해된다.

"..그 분(아버지)은 그 분의 태양을 악인들과 선인들 위에 떠올리시고, 비를 의인들과 비 의인들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오."(마5:45b. 사역)

위 구절은 하나님이 온전하심을 햇빛/햇볕과 비로써 증거해 준다. 햇빛과 비는 일부러 양산이나 우산으로 가리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혜택이 간다. 주님의 보혈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보혈을 일부러 피하고 거부하지 않는 이상, 누구나 다 영향을 받는다. 소금과 빛의 은유도 같은 맥락으로 풀어 볼 수 있다(마4:15,16).

위 구절이 포함된 앞뒤 문맥(마5:43~48)을 보면, 원수와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형제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문안도 해야한다고 시사하시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온전하시듯 우리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주님이 단지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시고 속죄하셨다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과연 어디 있는가? 우리들만 위해 '제한속죄'를 하셨고 지금 하신다면, 이 구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모순되지 않는가.

제공과 반응의 역학구조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제공(offers)과 인간의 반응(reactions/response)이라는 쌍방향/양방 인터액션(interactions)의 역학 구도로 시종 일관한다. 무한속죄는 조건부 구원과 모순되지 않는다. 단지 제공과 반응의 차이일 뿐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무한속죄(Unlimited Atonement)와 동시에 조건부 구원(Conditional Salvation)을 말한다. 칼뱅주의자들은 무한속죄가 곧 보편구원에 연결된다고 우려하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성경은 노먼 빈슨 필,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의 생각처럼 무조건적 구원이나 보편구원, 또는 만인구원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무한속죄와 만인구원은 전혀 성격이 다른 문제다. 조건부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동시에 인간 의지의 자율성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절대주권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구속하시지 않는다. 즉 원하지도 않는 구원을 강제로 시켜주시진 않는다는 뜻이다.

칼뱅주의는 스스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 미캐닉스(mechanics)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글의 진도에 따라 차차 이해될 테지만, 칼뱅 자신이 무척 헷갈렸다(!). 아마도 칼뱅이 너무 높은 개혁 강단에서 주로 아래를 내려다 본 나머지 하나님의 시각에서 성경을 많이 본 모양이다. [주님 자신, 하나님의 시각만으로 머물지 않으시려고 낮게 땅으로 몸소 내려 오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즉 오픈돼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주권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 크리스토를 유일한 구주, 유일한 길, 진리, 생명으로 받아 들여야만 가능하다. 즉 독자가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독자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마찬가지로 크리스토의 속죄 역시 [위 요한서신A 2:2에서 보듯]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뜻에 따라 누구에게나 적용되게 온 세상 앞에 활짝 열려있다. 문제는 인간 편에서의 반응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속죄 받고 있진 않다. 독자가 죄 사함(속죄)을 받고 안 받고는 크리스토 앞에 나와 엎드려 믿음을 고백하느냐, 않느냐 라는 독자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무한속죄 교리는 조건부 구원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