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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연구/칼뱅-아르미니우스 주의

'제한'이란 딱지만 떼어도..

 


김삼

칼뱅주의자들과 칼뱅주의권 사람들은 '제한속죄'의 '제한'(Limited)이라는 딱지 때문에 여러 모로 안 봐도 될 손해, 아니 안 봐야 했을 손해를 많이 봐 왔다. 이를테면 일종의 위험한 노랑 간판 격이다. 'Limited'에는 '유한'이란 개념도 있는 탓에 예수님의 전능하고 위대한 속죄의 권능을 유한스럽게, 축소시키고 위축시키는 듯한 인상이 노골적으로 들기 때문이다. 뉘앙스가 그렇다.

없어도 되는 딱지인데, 체제와 전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붙어 있는 양 보인다. '제한속죄'란 개념은 구구하고 무성한 온갖 오해만 낳을 뿐, 절대 진리인 성경 구절의 설명엔 별 도움이 안 된다. 이해해 보려고 해도 개념 자체가 우선 모호하다. 독자도 칼뱅주의자인가? 무조건 반감만 갖지 말고, 우리 왜 그런지 정신 차린 맘으로 살펴 보자.

개혁교회사를 보면, 사실 칼뱅주의자들은 '제한속죄'의 개념만 갖고 있던 중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그룹들이 이른 바 5대 교리란 것을 들고 나오자, 초강력 대응책으로서 네덜란드 도르트 회의에서 상대적으로 '제한속죄'론을 배타적 개념으로 굳혀 버렸다.
그런데 제한속죄에 대한 후기 칼뱅주의자들의 견해는 천태만상이다. 말하자면, 제한속죄 개념 자체가 열려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정통 골수 칼뱅주의자들의 견해는 "제한속죄는 어디까지나 제한속죄, 끝!" 이다. '묻지 마'식 절대 제한속죄론이라 할 수 있겠다. 없는 것 같아도 그런 칼뱅주의자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사실 도르트 회의 사람들의 주 동기가 그랬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무조건 이단! 추방!" 이란 포석이었다.

그런가 하면, "예수 크리스토의 피는 만민을 속죄하기에 넉넉하나 그 적용은 제한돼 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결과적으로 제한속죄가 아니냐?" 라고 비교적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칼뱅주의권 사람도 있다. 위에서 앞 부분만 '무한속죄'란 용어로 바꿔 주기만 하면, 개념 상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간 '보편구원' 쪽으로 치닫는다고 우려하면서 이 역시 '제한' 쪽으로 꼬리를 묻는다.

그런데 무한속죄 [아니라면 만민에게 오픈된 속죄] 가 제한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은 신자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단지 그래서 꼭 '제한속죄'여야 한다면, 구태여 '제한'이란 개념 자체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위한 제한인가? 칼뱅주의자들만을 위한 제한인가? 선민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처럼 예정 안에서 선택된 자들의 빛을 드러내기 위한 제한인가?

'제한' 딱지는 오히려 끝없이 복잡다단한 오해만 야기시킬 뿐이다. 왜 칼뱅주의권은 그런 개념을 일부러 간판과 딱지로 만들어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가? 꼭 그래야만, 절대주권, 예정과 무조건 선택에 부합되는가? 그렇다면 자칫 사상누각이 돼 버릴 수 있다. [벽돌 하나만 빠져 버리면..우르르..?!] 제한속죄는 결국, 단지 체제 유지를 위한 명목 상의 '벽돌'인가? 아니면 딴 부분은 다 무너져도 절대 고수해야 할 생명 같은 모퉁이돌인가?

또, "예수 크리스토의 구속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기로 내정돼 있었고 주님은 그 계획대로 실천하셨다." -뭐, 이런 본질론적 파생설 비슷한 것도 있다. 이 역시 절대 주권 관점과 예정론 체제에 스스로를 묶는 유의 속죄론이겠다.

그 외에도, 제한속죄론 '딱지', 아니 이 위험한 '노랑 간판'에 대한 또 다른 다양한 관점과 복잡한 해설들이 갈래를 짓고 있다. 즉 보편타당하고 응축된 개념이 아니란 반증이다.
더 놀라운 것은 칼뱅 자신이 이 개념에 관해 스스로 헷갈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해서는 필자의 글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알고 보면, 장 칼뱅 자신이 '제한속죄'보다는 '무한속죄' 쪽으로 더 기운 사람이다. 칼뱅주의권 사람들이 알면, 놀라 나자빠질 얘기다. 필자도 이미 한번 나동그라질 뻔 했으니까. 그러나 이 엄청난 비밀(?)에 관해서는 요 다음번 글을 위해 아껴 두련다. 자인할 줄 아는 칼뱅의 그 용기가 존중스럽다.

필자는 처음부터 칼뱅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수많은 칼뱅주의권 교회에 고의적으로 손해를 끼치려고 필을 든 게 아니다. 칼뱅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니 칼뱅절대주의, 칼뱅우상주의, '칼뱅 짱!' 주의를 버리고 어디까지나 유일한 진리인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자는, 예수 크리스토의 진리에 대한 의존도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인간 의존적 영성은 어디까지나 심적/심리적/프쉬케적 영성이지, 성령이 원하시는 참된 의미의 영적/프뉴마적 경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칼뱅 교리가 절대 옳다고 우기며 칼뱅 또는 칼뱅 사상 체계를 높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헨리 나웬, 빌리 그래엄, 라벗 슐러, 릭 워렌을 무조건 또는 거의 무조건 신뢰해주는 것이나 진 배 없다. 그 반대로 예수 의존주의, 성경말씀 절대의존주의는 늘 안전하다. 성경의 실 저자이신 성령의 기름부음만 유지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칼뱅주의자들은 천국 대문 문지기 자리를 독차지(?)한 듯한 몸짓은 그만 둬야 한다. 그 역시도 '노랑 간판'처럼 배타적이고 위험하다. "너 믿는 건 나 믿는 것과 달라. 넌 이단이니 꺼져!" 이런 식의 태도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과 상관 없다. 바로 그런 것이 전형적인 흑백논리, 획일주의다. 그건 고지식이고, 기본적인 학문적 태도 조차도 못된다.

물론 성경 진리는 흑백이 분명하다. 그러나 칼뱅 교리가 어디 성경인가? 어떤가? 칼뱅 교리는 칼뱅의 사상 위에 기초한 학설이고 이론이고 신학체제이지, 그것 자체가 성경의 진리가 아니란 얘기다. 만일 그렇다고 우긴다면, 그야말로 [성경에 의하면] 이단/삼단이다! 안 그래도 칼뱅주의가 '이단'이라고 떠드는 목청이 교계 일각에 있어 왔다.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 있겠는가? 눈을 들어 칼뱅을 보지 말고 오직 예수 크리스토를 바라 보라. 칼뱅주의 기둥이 아닌 성경 말씀의 진리 등대를 올려다 보라.

우리는 거창하고 드높은 사상누각을 세우려고 머리를 쓰기 전, 상식 차원의 낮은 터에서부터 머리를 굴려야 좋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신학이지, 진리 자체가 아니다 라는. 학문의 전당은 이성의 전당이지, 진리의 전당은 아니다. 모름지기 진리의 전당이려면, 말씀을 최고 우위에 놓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말씀을 우위에 놓는다는 말은 말씀으로 모든 학설을 체질하고 여과시켜 버릴 것은 버린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