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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송정미 '축복송'의 심층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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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CCM 싱어라면 이젠 아마도 송정미라고 해야 할 듯.
과거 이 계열에서 이름 났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물의를 일으켜 왔지만 송정미는 그런 잡음도 없다.
성가를 부르던 한국의 세미 클래시컬 스타일은 기껏 조영남-박종호 라인인데, 현재까지는 송정미가 일종의 '완결판'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창작을 겸하니 음악인으로선 꼭 필요한 입체성도 지녔겠다..한국 CCM의 실험시대를 거쳐 진정한 전성시대를 일궈 왔다고 볼 수 있다.
 
생김새와 움직임이 세칭 '글래머' 스타일인 그녀의, 어느 모로나 무게 있고 중후한 매너/목청도 그렇지만 다양한 음색과 창의성은 추종 불허인, 그녀만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앨범도 다작 아닌 '과작' 스타일이어서 다년간의 충분한 준비를 거쳐 영감을 한껏 담아내고, 낼 때마다 이런저런 차원을 달리한다. 늘 자신만의 것을 애써 추구해 온 결과라고 봐야겠다.
 
요즘은 그녀를 돕는 기도동역 공동체가 있어 회원만도 3천 여 명이 넘는단다. 그런 점은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한국 언론을 빌려 보니, 바로 며칠 전인 지난 해 '성탄절'엔 숙명아트센터에서 '별이 쏟아지다'란 주제로 '크리스머스 인 러브' 콘서트 공연을 했다.

'하얀 성탄절', '날 달나라까지 날려 줘요', '문 리버' 등 귀에 익은 영화음악, 재즈 등 세속 노래와 캐럴을 포함, 아빠가 딸에게 들려 주는 아기별 동화, '북 치는 소년' 가사 해설도 곁들인 내용 등은 신자들은 물론 세상 사람들의, '성탄절'을 향한 아스라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을 한껏 대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이 합창단, 남편 곽수광 목사와 어린 딸도 출연했다고 한다.

지지난해(2006년) 송정미의 미국 단기 유학 직전. '송정미와 축복송'이란 칼럼을 아멘넷에 올려, 제목 덕분인지 상당한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이번엔 내용을 약간 업데이트 시켜 다시 이곳 TLT에 올린다.

송정미에게 바라는 희망사항이 하나 있다. 만일 크리스천 뮤지션으로 계속 성숙하고 싶거들랑 성령님의 영감과 지시에 좀 더 민감하라는 것. 아름다운 곡이라고 해서 다 아름답진 않다. 바꿔 말해, 우리 귀에 좋다고 하나님께도 다 좋은 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속음악과 거룩한 음악 사이에 경계를 허물어 간다. 나중엔 세상적인 것이 거룩한 것인지, 거룩한 것이 세상적인 것인지 둘 사이를 허물 없이 아우를 수 있는 성격인지 도무지 선을 모르게 변해 가고 있다. '전도차원'에서 그렇게들 한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그렇다면 '전도'란 이름으로 뭔들 못하랴는 생각도 든다.

송정미의 앨범을 듣노라면, 일부는 영감이 있는 듯 한데 일부는 별로다. 창의성은 뛰어난데 영감이 현저히 떨어지는 가사와 곡이 있다. 관상 냄새가 물씬 나는 카톨맄적 노래도 있고, 심지어 뉴에이지적 분위기도 있다. 좀 아슬아슬하다. 진정 바라기는 송정미가 이런 시대사조적인 영적 혼합성을 탈피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색스럽고 감칠 맛 나는 창의성보다 더욱 성경적인 노래, 보다 영적인 음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필자만의 바람일 터.

그러려면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한 음악인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인지는 모르나 진정 하나님을 위한 사역자라면 무시해선 안 될 부분이기에 하는 소리다. 예를 들면, '하얀 크리스마스' 같은 것은, 곡은 극히 아름다우나 프리메이슨 명사 음악인의 순수 세속작품이다. 그렇게 따지면 부를 곡이 얼마나 되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싸탄에게 가깝던 메이슨의 곡을 구태여 신자가 아껴 불러줘야 할 까닭이 뭔지 묻고 싶다.

지금까지는 객담에 가깝고..이제 본론을 펼쳐 보련다.

'축복송'의 시와 음악

송정미의 대표작이라면 아무래도 '축복송'. 그녀의 콘서트 때마다 빠지지 않는 앵콜송이다. 지금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노래다. 다양한 언어로 번안돼 불리기도 한다. 그녀의 삶 속에 최악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영롱하게 태어난 아픔 속의 진주, 김현승의 시-'눈물' 같은 곡이다. 그래선지 속깊이 파고 드는 영감이 있다. 필자도 1990년대 초기에 이 노래를 처음 익혀 부르며 눈물깨나 뿌렸다. 

10여 성상이 지난 뒤 다시 이 노래를 음미하면서 나름대로 분석/평가를 해 보게 된다. 충분을 넘어 충만하기까지 한 영감에 걸맞게, 좀 더 극명한 진리의 이미지에 접근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의 작은 표출이랄까.

찬양곡의 '영감'이라는 것은 가사나 시가 성경본문이 아닌 이상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왜 이런 소리를 하냐면, 예컨대 한국 찬송가를 살펴보면 이유야 어떻든 가사가 초기에 비해 현저히 많이 바뀐 게 사실이다. 찬송가를 새로 편집하고 출판할 때마다 서서히 가사가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이다. 대체로 더 좋아진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혹 작시자들 자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에 관해선 글 끝 부분에서 찬송가의 단적인 예를 들고자 한다.

우선 '축복송'의 시를 비평적으로 음미해 보자. 형편 상 악보는 올리지 못하고 곡의 마디별로 가사를 붙여본다. ['|' 표는 마디 구분을 뜻하는 세로줄.]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축복송' 1절)

이 노래는 곡이나 가사가 모두 아픔의 잔 물결을 어르듯 달래듯(soothing) 헤어 나가는 품이, 이른 바 '치유 효과'가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기타반주로 부르기 좋게(송정미는 기타의 달인이다!) 작곡됐고, 음을 진행시키고 처리하는 솜씨가 퍽 세련되다. 적어도 가락의 흐름에 있어 촌스럽거나 거북살스런 부분, 군더더기 따위가 전혀 없다!

문제는 그 가락에 붙은 가사. 시가 먼저였는지 곡이 먼저였는지는 모르나, 가락에 비해 가사의 음악적 센스가 부족한 부분들이 엿뵌다. 물론 노래에 이미 익어있는 사람들은 별로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바쁜 독자를 위해 '축복송'의 약점을 쉽게 간추리자면, 한 노래에서 중요하고도 고조되는 부분들인 각 악구(프레이즈)의 마디 첫머리나 고음, 주강박/부강박 등에서 시와 음악의 결합을 최대한 살리진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성경에 바탕을 둔 객관적 진리를 중시하는 기독교 노래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 한국 찬송가 역사에 견주자면, '개편찬송가' 이전시대 경향의 보편적인 약점이랄 수 있다. 가락의 마디 앞부분, 주강박/부강박/고음 등엔 특별한 예외/불가능한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반드시 시/가사의 앞머리/어간/뿌리 등이 와야 옳다.

극단적이지만, 한국의 옛 가곡 중 최악의 사례 하나를 들자면 김동진의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위 보기에서,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부르기도 극난한 어미 "-은"을 고음/장박 처리 한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내 마음'엔 그런 넌센스가 차고도 넘친다. 멜로디는 유장/유려한데 원 자료인 시가 거기 안 따라 준다는 얘기다. 심하게 표현하면, 시가 노래에 말짱 이용 당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도 '축복송'에서 이런 약점이 약점답게 잘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다른 CCM송처럼 가락이 강박보다는 약박 중심인 데다 시의 음악적 처리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곡자의 수준이 만만치 않음을 느끼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축복송은 인공미가 아닌 즉흥미/자연미/영감미가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축복송'에서, "어려[움과]"의 경우 아래 B음에서 G음까지 6도 음정을 아르페지오로 상승 진행해 올라간 높은 음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형용사의) 명사형 어미+접속어미인 "-움과"라는 두 글자가 왔다는 점. "-움과" 부분은 이 악구 안에선 최고음일 뿐더러, 당김음(syncopation)인 첫 음과 둘째 음이 짧고/길게 강조됐기에 어느 모로 보나 첫 큰악구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작시/작곡자의 속 심경을 가장 잘 드러낸 직설적인 낱말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부위에 오기엔 거의 무의미한 두 어미의 조합 '-움과'가 올려졌다는 데 다소의 심각성(?)이 있다. 비교적 연결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그렇다.

위에서 비쳤듯, 특이한 경우 외엔 일반적으로 주강박, 4분의4, 8분의6박자 등에서의 부강박과 고음에 낱말의 앞부분/주요부분 또는 어간이 떨어지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라틴어계나 영어권에서 공통되다. 한국도 '개편찬송가' 때부터 그런 보편적 성향을 따라온 게 사실이다.

물론 작곡가의 즉흥적/시적 흥취로나 대중의 반응으로나 원시가 더 잘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미래적 시각으로 볼 때 원시가 이 원보대로 장수할까? 다음 세대 때 혹 이 노래가 찬송가로 승격될 경우, 과연 원보대로 남아줄지 의문시 된다. 찬송가처럼 어느 편집위원이 가사를 "손보게" 되지 않을까.

위 난점에 대한 필자 나름의 해법은 두 가지.

     큰-|어려움, 아픔 있지|만
     큰-|아픔, 어려움 있어|도

위엣 것은 "어려움" 부분을 8분+4분+8분음의 싱코페이션으로 나눠 풀어본 것이다. (영감을 받은) 원작의 리듬이 일부 바뀌었고 어감은 어떨지 모르지만 강박/최고음에 어간이 떨어짐으로써 별 문제가 없다. 2절과 비교할 때 리듬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원보의 "어려움과"는 8분 음표 4개 묶음 안에서 가사의 뜻이 통하고 음성모음에서 양성모음으로 바뀌는 과정의 강세가 "파워풀"하여 입으로 부르는 느낌이 좋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필자의 대안은 8분음군만으로는 "큰-어려-"가 되어 뒤의 "-움"으로 해결되기까지는 뜻이 금방 안 통하고 다소 어둡다는 약점이 있다.
위엣 약점을 해결한 것이 그 아랫 것. 어순만 바꾼 것인데, 마디 첫음에 양성모음이 왔다는 장점에다 2절 같은 부분에 대한 대안을 참조하면 1, 2절 모두 리듬을 살릴 수 있는 방편도 된다.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도 위와 같은 문제점이 겹쳤다. 어떤 의미에서 시적 흥취로 볼 때, "바라보는"의 "바라-"가 E에서 G로, 단3도 상승 진행하면서 눈을 들어 바라봄의 감각이 그림처럼 살려졌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럼으로써 '바라보는'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중간글자 '-라-'가 [아까처럼] 이 악구의 최고음인 동시에 마디의 강박 지점에 왔다는 것. 그 다음 "너[의] 영혼"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특히 여기서 "너의 영혼"의 '너의'도 마디 첫박이자 이 악구의 두 번 째 고음에 '-의'가 왔기에 썩 바람직한 처리가 못된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가사를 약간 보완하면서 뒤로 일 보씩 이동하는 것이다. 아래가 필자의 제안이다.

     주님을|바라보는|네 영혼-|

위의 경우, |바라보는|의 "-보는"은 점4분음+8분음보다 두 개의 4분음으로 바꾸는 것도 더 나을 수 있다. 혹 이 마디 끝의 8분음의 긴장이 사라져서 아쉽다면..

     주님을|바라보는 네|영-혼-|

으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혼'이 초기의 어감만 못할 것이다.   

한 가지 더 느끼는 것은 이 영감 넘친 곡의, 특히 1절에 "너의"라는 속격(소유격) 대명사가 너무 잦다는 점. 이 짧은 가사의 첫 절에서만 '너의'가 4번 나타나며 그 중 '너의 영혼'이 무려 3회나 된다. 이것은 과히 시적이지 못하다.

그 다음, 이 아름다운 시에서 결정적으로 문제시 되는 곳은 아래 구절이다.

     너의 영혼 우리 볼 때

2절에서도 똑같이 되풀이되는 위 구절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너의 영혼(을) 우리(가) 볼 때
     너의 영혼(이) 우리(를) 볼 때

위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작곡가에게 물어 보기 전에는 필자로선 도저히 알 길이 없다. 문맥으로도 구분이 안 간다. 독자는 위의 둘 중 어느 것이라 생각되나? 아마도 그 뒤에 나오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랑스러운지"(2절)로 보아 문맥상 "너의 영혼을 우리가 볼 때"가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은 어떤가?

    "너의 영혼이 우리를 볼 때 (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완전한 문장이다! 그러니 위의 둘 중 어느 것인지 가름하기가 극난하다. 물론 거기에 더 신비한 매력이 있지 않나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세속 가요라면 몰라도 특히 진리를 다루는 기독교의 노래의 시/가사는 논리가 명확해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영혼' 보다는 '네 영혼(이)' 또는 '네 영혼(을)'이 더 낫지 않을까? 글자 수도 지키고 뜻도 좀 더 분명히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는 "너의 영혼"보다 "너의 모습"이 더 낫다. 

지은이는 이 시에서 자신을 '너'라는 객체로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교회인가? 노래중노래(아가)에 나타나는 것 같은 그런 얼핏 막연한(?) '우리'인가? (아가엔 '우리'가 14번 나온다). 어렴풋이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축복송'의 이 부분은 아가 구절을 연상시키는 부분이다(아가 4:10, 7:1, 6).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위 둘 중 시적 흥취로는 위가 낫고, 멜로디적 감각으로는 아래가 더 낫다.

"너의 영혼 통해"와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등의 악구들은 이른 바 동형반복의 '상승/하강'으로 이뤄졌다. 똑같은 패턴의 리듬/음진행이 위치만 아래위로 이동한 것이다. 곡의 첫머리부터 동형반복이 계속 이뤄지면 금방 지루해지지만, 곡 뒤 쪽의 매우 적절한 부분에서 이루어졌기에 작곡가의 솜씨가 다시 한번 빛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의 마디별 가사를 한 악구씩 비교해 보자.

     |너의 영[혼] 통|해|
       2        2       2 

     |큰 영광 [받]으|실|
       1    2         3   

     |하나님[을] 찬|양|
           4            2  

같은 제3박(부강박/최고음/장박)에 한 낱말의 뒷부분 또는 앞부분이 왔다. 그런데 같은 6개씩의 글자이지만 악구별 순서를 따라 글자 길이가 2 2 2, 1 2 3, 4 2로 돼 있다. 이것은 시의 즉흥적 정서 상 어쩔 수 없는 차이인데, 영혼의 후미인 "-혼"과 "받으실"의 선두인 "받-"과 단순한 목적격 어미 '-을'의 느낌은 퍽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악구의 맨 뒤 음(8분음+점2분음)이 그 바로 앞 음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기에 결국 별 문제는 없지만. 그 뒤에 나오는 가사 "하나님[을] 찬양"도 비록 4+2지만 효과는 "너의 영혼 통해"와 마찬가지다. 역시 고음/제3박/장박에 "-을-"이 떨어졌다. 물론 이래선 안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쩔 수 없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2절 가사

신약성경 페트로a (벧전) 2:9에 기초한 2절 가사는 위 1절에 준하여 보면 된다. 이 가사는 송정미가 1절에 곧장 이어 붙였기보다 1절을 완성한 얼마 후 또는 상당기간 후 붙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문법적으로 문제가 있다. "너는 택한 족속"은 단수 대명사+복수개념이니 문법상, 어감상으로 모두 말이 안된다. 성경에서는 복수 "너희(들)"가 "택한 족속"이다. 따라서 단수 '너'로 할 것이 아니라 복수로 풀면 훨씬 더 낫다. 어차피 우리는 공동체가 아닌가.

이에 따라..

     너는 택|한 족속이|요
     너희들|은 택한 족|속

위 보다는 아래가 문장 감각적으로 더 낫다는 얘기다.

다음 부분들도 아래 쪽이 더 낫다.  

     왕같|은 제사장이|며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 된 |백-성 
     하나님|소유인 그|백-성 

위에서 '백성'은 이 곡 전체에서 드물게 무난히 처리된 부분의 하나다! 물론 원보에 이미 입과 귀가 익은 독자들은 "무슨 소리냐? 작자 맘이지 당신이 뭐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작자 맘이다! 문제는 시와 음악의 결합에 있어 있는 그대로의 미래성과 영구성이 충분하냐는 것이다. 훗날 그 누군가에 의해 고쳐질 가능성이 없겠는가.

이상을 종합하여, 송정미의 원보와 [외람되지만] 필자 나름의 '대안'을 다시 한번 비교해 본다.

     원보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담대하|게 주를 바|라보는 너|의 영혼-|~|
     너의 영|혼 우리 볼|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영혼 통|해|큰 영광 받으|실|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나라 하나님|의 소유된|백-성
     너의 영|혼 우리 볼|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하략) 
                         
     (실험적) 대안
     
     때-때|로 네 앞길|엔 큰-|아픔 어려움 있어|도
     담대하|게 주님을|바라보는|네 영혼-|~|
     네 영의|눈(?) 우리 볼|때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    
     네 영혼 *통하|여|큰 영광 받으|실|주 하나님 찬|양 오 할-렐루|야
    
     너희들|은 택한 세|대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나라 하나님|소유인 그|백-성
     네 영의|눈(?) 우리 볼|때 그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네 영혼 *통하|여|큰 영광 받으|실|주 하나님 찬|양 오 할-렐루|야
     
        * "통하여" 대신 "인하여"도 가능(?) 

진짜 사견을 사족으로 덧붙이는데,'축복송'이란 제목보다는 가사 첫 구절인 '때로는 너의 앞에'가 훨씬 낫다. '축복송'이란 노래는 찬양대의 예배송(송영)의 일부인 축도송/축복송으로부터 너무나 많고, 어떤 기자는 이민섭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송정미의 '축복송'으로 알고 있을 정도니까. 어떤 범주의 타이틀 같은 것보다 더 구체적인 감이 잡히는 제목이 나을 것 같다. 물론 그야 작가 마음이다.

      찬송가의 예

시와 음악의 결속에 대하여, 찬송가의 예를 하나 더 든다. 더 읽을 여유 있는 독자는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구(통일) 찬송가 453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위 곡의 원 가사는 이랬다. ['성가'/장수철/1959년/생명의말씀사에서 인용]

     여호와 선-하신 목자 되시-고 나는 그 기르시는 어린 양
     푸른 방초-동산 잔잔한 시-내 쉴 만한 곳에 인도하시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따라 새- 꼴로 먹이시는 주 그 품에 기리(길이) 안겨 살겠네

이 곡은 현 월드비전(옛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의 초대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고 장수철 박사(1917~1966)가 1956년 시카고 어메리컨 음대 재학 시절 시23편에 붙인 합창곡(여기선 가사 1절만 인용)이다. 훗날 그 부인 최봉춘 여사에 의해 현 가사에 가깝게 개작되고, 개편 찬송가 편집위원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추가 편시/편곡돼 현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원 곡은 후렴 전반부의 베이스 보표에 반주곡이 붙어있다]. 

원 가사와 현 가사 사이엔 상당한 차이점과 장단점이 있다. 작곡가가 붙였던 원시의 강점/장점이라면, 직접 가사를 붙였기에 가사에 리듬이 착착 붙는 흡착감 내지 결속감이 대체로 뛰어나다는 것이다. 첫 가사 '여호와'부터가 두 8분음표와 한 4분음표로 이어져 한달음에 귀에 들어온다.

그에 비해 현 가사는 '여호와' 부분은 '주는 나'로 분류되어 얼핏 내용이 안 잡히는가 하면 두 8분음표 묶음이나 기타 이어지는 4개 8분음표 묶음 등도 (최소한 1절 만큼은) 왠지 옛 가사만큼 리듬에 대한 붙임성이 별로 없다. 특히 '철따라'는 설명체인 '철을 따라' 보다 훨씬 감칠 맛이 난다. 물론 현 회중에게 옛 가사대로 부르라면 무척 거북해 할 것이다. 그러나 초기엔 아무 문제 없이 불려졌다. 차이가 뭘까.

당초 작곡가는 도입 부분 불완전마디 엎비트의 첫 8분음묶음+4분음에 [3절까지] 세 글자 씩의 낱말들을 맞추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원보 가사 전체를 훑어보면 알지만, 이 원칙은 금방 깨어진다(2절 둘째 줄 앞). 절대 원칙에 따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원 가사를 개작한 현 가사를 보면, 전반적인 시적 분위기도 더 나을 뿐더러 음악적으로도 현저한 장점이 있다. 4분의4박자 음악에서 주강박인 마디 안 첫 박과 부강박인 제3 박에 주로 낱말의 어간이 왔다. 이것은 앞에서도 비쳤듯, 액센트가 있는 음절이 주/부 강박에 오는 라틴어 계열 언어, 특히 영어권에서는 거의 철칙처럼 지켜지는 것이다. 

장수철의 원보를 마디별로 나눠 보면(아래 보기 참조), 일반적인 4분의4박자, 한 마디의 첫 박인 주강박, 제3박/부강박에 떨어진 어간 내지 뿌리가 얼마 안 되는(6 군데) 반면, 어미 또는 한 낱말에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강박에 떨어진 예(8)가 더 많다. (악구/phrase 끝 장박에 붙은 가사는 제외). 즉 일반 가창곡에서 전혀 또는 거의 없어야 할 사례가 너무 많다는 얘기다.   

     여호|[와], 선-하신 목자|되시-고 나는|그 기르[시]는 어린|양 
     푸른|방초-동산 잔잔|[한] 시-내 쉴만|[한] 곳에 인도하시|네
     여호|[와]-는 나의|목자 나는 |그-의 어-|[린] 양
     철따|[라] 새 꼴로 먹이|[시]는 주 그 품|에 기리 안겨 살겠|네

        * [ ]속은 가사가 문제시되는 주강박/고음/부강박 위치.

개작된 현 가사(아래 보기)를 보면, 문제점이 뚜렷이 개선됐다. 아니 우리가 논의해온 문제점들이 없어졌다.

     주는|나를- 기르시는|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양
     푸른|풀밭-맑은 시냇|물가-로 나를|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나-의 좋은|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따라- 꼴을 먹여|주시-니 내게|부족함 전혀 없어|라
  
즉 8분음표 묶음과 가사 사이의 붙임성은 원보만 못하되, 어간 또는 낱말의 주요 부분이 주/부 강박에 떨어진 점에서는 새 가사가 원보보다 몇 배나 낫다. 특히 다음 부분을 비교해 보면, 제3박(부강박)의 높은 음(E)에 원보 가사의 경우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대어미 [-시-]가 온 반면, 새 가사는 어간인 [귀-]가 와 훨씬 뜻깊게 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기르[시]는 어린|양
     |주님의 [귀]한 어린|양

아울러 시적/논리적/예술적으로도 원시보다는 개작이 더 낫다. 이 원칙은 모든 찬송가와 성가에도 적용돼야 바람직하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하기야 그런 견해에 맹렬히 반대하는 음악인도 보긴 봤다. 하지만 현행 찬송가를 봐라. 어느 쪽이 더 먹혀 드는가?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고쳐지고 '진화'돼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