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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저녁 식사 시간



   
   십자가 밑에 그대의 자리 있네
   십자가 밑에 그대의 자리 있네
   수백 만 명이 왔어도 아직 자리가 있으니
   오, 십자가 밑에 그대 자리도 있다네

   (아래는 음절에 맞춘 의역)
  
   거기 십자가 밑에
   너도 나올 수 있네
   수많은 사람들 나왔지만
   아직도 너를 기다려


'십자가 밑에 자리 있네'(Room at the Cross)라는 찬송가의 후렴 부분입니다. 가사 그대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의 십자가 아래 초청하여 구원과 거듭남으로 이끌고,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낸 찬송가입니다. 숱한 전도집회에서 결신/초청의 노래로도 자주 쓰여 왔지요.
저도 이 노래를 부르며 아직도 십자가 아래 자리가 있다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펑펑 눈물을 쏟은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언제 어느 결에 들은 얘기가 어렴풋이 기억 나 관련 자료를 찾아 봤지만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조금씩은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소중한 자료가 될 터입니다.


이 찬송가의 배경엔 아주 슬픈, 그리고 아주 기쁜 사연이 얽혀 있지요. 이 작품은 공식 상 아이라 F. 스탠필(Ira Forest Stanphill, 1914~1993)의 작품으로 돼 있습니다만..사실은 그의 첫 아내 젤마(Zelma)와의 부부 합작이었죠. 갓 사역에 나선 젊은 스탠필 부부가 사이좋게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5년 출판됐을 당시는 가사와 곡이 모두 "젤마 스탠필 작"으로 돼 있었습니다(윗 사진 참조). 아마도 스탠필이 아내 이름으로 내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탠필의 공식 창작 연대표엔 1946년 본인의 작품으로 돼 있습니다. 이런 차이에는 숨은 배경이 있습니다.    

아이라 스탠필은 20세기 미국의 가장 유명한 찬송가/복음성가 작가들 중 한 명입니다. 스탠필 외에도 토머스 도어시, 스튜어트 햄블렌, 앨버트 브럼리 등이 있지요. 찬송가/복음성가만 400여 곡, 피아노 곡까지 모두 500곡이 넘는 분량의 노래를 가사나 곡, 또는 양쪽 모두를 썼습니다. 17세 때 첫 작품을 쓰기 시작해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 썼으니까.

단연 인기도가 높은 작품으로는 그밖에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내일 일을 난 모르네'와 '언덕 위의 저택', '주님은 내 행복', '눈물로 내 눈을 씻으셨네', '날 따르라' 등이 있지요. 다 주옥같은 작품들이지요. www.cyberhymnal.org 에서 연대별 주요 작품 목록을 보실 수 있습니다.


스탠필의 초기 삶

아이라 스탠필은 1914년 2월 14일, 뉴멕시코 주 커리 카운티의 벨뷰에서 아주 다복한 집안의 3남 중 둘째아들로 태어납니다. 부모인 앤드류 크리텐던 스탠필 1세와 플로라 엥글러는 19세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내린 개발지 '홈스테드령'(HA)에 따라 아칸소에서 마차를 타고 이주해온 부부였습니다. 또 둘 다, 아이라가 다니던 학교의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스탠필 부모들은 자식들을 사랑과 훈계로 아주 잘 길렀습니다. 아이라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일찍이 사역소명을 느낀 데도 부모들의 힘이 컸지요. 아이라가 여덟 살 때 가족은 캔저스 주 커피빌로 이주했고, 아이라는 거기서 14년을 거주합니다. 음악 재능이 탁월했던 그는 열 살 때 이미 피아노/오르간/우쿨렐레/아코디온 등을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커피빌 중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십대 중반이 지나면서 노래와 작곡을 할 뿐더러 부흥집회, 기도회 등에서 적극 음악사역에 참여했습니다. 1930~1934년엔 KGGF 방송국 매일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으니까 청소년 때부터 다재다능했던 모양입니다. 그후 미주리 주 칠리콭의 주니어 대학을 졸업했고 22살이던 1936년에는 하나님의성회 목회자가 됩니다.      


신혼과 행복

스탠필은 미주리 스프링필드에서 처음 만난 아름다운 처녀, 젤마 로레인 로슨과 결혼을 합니다. 얼마 간은 무척 행복한 세월이었지요. 신혼의 즐거움이 복음성가 '주님은 내 행복'이란 명곡의 탄생으로 가히 체감됩니다.

어느 날 아이라가 바깥 집회 장소에서 쉬면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는 보도 내용이었습니다. 속으로 "행복은 그런 데서 오지 않아. 주님을 아는 데서 얻는 거야"라고 생각하다가 "맞아, 바로 그거야!" 하고 즉흥적으로 시구와 가락을 붙이면서 20세기 최고 복음송의 하나- '주님은 행복'이 태어납니다.

귀가 길 운전을 하면서도 내내 이 가락과 가사를 흥얼거리다 그야말로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집문을 들어섰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요? 뭐가 그렇게 기뻐요?"
  "좋은 노랠 하나 얻었소."
  "들려 줘요."

그는 곧장 피아노로 가서 불과 15~20분 안에 곡조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노래는 그의 교회 교우들에게 가르쳐 주자마자 '히트'를 해, 온 교인들이 열광적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제휴해 온 존더밴 출판사로 우송했더니 즉각 여러 형태의 곡으로 출판됐습니다. 경쾌하고 흥겨운 이 노래는 다른 나라로도 건너가 수많은 외국어로 번역됐고 찬송가나 찬양곡 모음 등에 실렸습니다.

텍서스 댈러스 침례교회의 한 청소년그룹은 유럽에 건너가서 소개하자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퍼져 갔습니다. 수 년 후 스탠필이 집회차 네팔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도 영국에서 온 그룹이 부르고 있었다지요.


    행복은 구주를 아는 것
    주님의 은총 누리는 것
    내 삶의 행실 바뀌는 것
    주님은 내 행복

    행복은 새로운 창조물
    주님과 내가 가까운 것
    그 분의 구원 누리는 것
    주님은 내 행복

    참된 기쁨, 혹 눈물이 흘러도
    나의 비밀은 내 속의 예수님!

    행복은 죄를 용서 받아
    살아 갈 가치 있는 생활
    천국을 향해 가는 여정
    주님은 내 행복
    주님은 내 행복
    주님은 내 행복!


신나기 짝이 없는 행복한 노래지요!


신혼의 불행

그러나 사실, 스탠필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삶의 엄청난 시련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역경과 인고의 아픔 속에 빚어져 찬연히 빛나는 진주알처럼.

스탠필은 아내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지만, 젤마는 웬일인지 '십자가 밑에' 이후 바깥 세상을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나이트클럽을 출입하더니 얼마 후 전속 싱어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바람까지 피웁니다. 특히 유감스러운 점은 그녀 자신이 목회자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

스탠필은 아내와 가정을 살리려고 필사적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당시는 부부가 로스앤젤레스에 머물 때였습니다. 그러나 첫 아들 '버취'가 태어났지만 그것도 잠시, 아내의 바깥 바람은 그치지 않았지요. 이번엔 그녀가 과거 한 집회에서 만났던 군인과 불륜 관계를 맺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악마가 파견한 졸개 악령이 젤마가 거울을 들여다 볼 때면 으레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이렇게 속삭인 모양입니다.

   "젤마..너, 자신이 봐도 참 예쁘지? 네 목소리도 좋잖아? 네 모습이 아깝지 않니? 저런 신자 남편 하고 평생을 산다고 생각해 봐. 답답하지? 그보다 훨씬 멋진 남자들도 많은데 말야. 세상은 넓단다. 너의 화려한 인물 갖고 얼마든지 바깥에서 활개 칠 수 있어!"

'~짱' 신자들에게 접근하는, 싸탄의 아주 고약한 상투적 술책이지요.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로스앤젤레스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스탠필은 부부지연의 명맥을 유지하려고 훌륭한 일터와 좋은 주택을 모두 뒤로 한 채 정반대 지역인 동부 연안으로 이주합니다.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취, 펜실베이니아 랭카스터 등의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아내는 한동안 나아지는 듯 했으나 얼마 후 다시 옛 버릇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스탠필은 생각하다 못해 결혼 전 부부가 맨 처음 만났던 미주리 스프링필드로 다시 이사를 가려고 나섭니다. 그 무렵 몇 군데 여름 부흥성회를 이끌기로 돼 있었는데 젤마는 빠져서 혼자 뒤에 남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하는 수 없어 아들 버취와 둘이서 떠났지요.


아픔 속 진주알

집회를 이끌고 있던 어느 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혼서류가 날아든 것입니다. 1948년 10월 7일 미주리 주 그린 카운티 순회법원에서 내린 이혼 판결문에는 "그녀(젤마)가 잘못 없는 쪽. 원고 쪽이 (아들) 레이몬드 아이라(4세)를 맡기로 하다"라고 돼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창작열과 연주열도 다 사라지고 부부생활은 물론 집회/사역, 삶 자체 등 온갖 것에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더구나 곁에 새근새근 잠든 어린 자식의 미래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 했지요. 찬송가 작가, 설교자, 아빠로서 자신의 가치에 대한 깊은 의혹에 싸였습니다.  

스탠필은 과거 결혼 전후에, 앞으로 가정을 이루면 자신도, 부모님께 받았던 그런 사랑으로 훌륭하게 자녀를 양육할 결심을 하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아내와 평생 동반 서약을 했던 것. 그러나 이제 아내가 일방적으로 언약을 깨버리고 떠나자 과연 바람직한 부모사랑을 아들에게 맛보여 줄 수 있을 지 암울해져 눈 앞이 캄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찬송가 작가였습니다. 버취와 미래를 우려하던 나머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시작합니다. 이웃 집 뒤뜰에서 친구와 형 '레이'(제퍼슨) 등과 함께 뛰놀다가 문득 귀에 들려 온 어머니의 정다운 목소리가 떠 오릅니다. 

   "아이라! 레이! 집으로 와, 저녁 시간이야."

계시록 19:9 말씀도 함께 떠 올랐습니다. "복되어라, 어린양의 결혼만찬에 초청받은 사람들!"이란 구절입니다. 그의 눈엔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맘 속에 뜨는 영감을 펜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노래가 '저녁 시간'. 이 노래 역시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애창되면서 수많은 가슴을 터취하는 명작이 되지요. 1949년 미주리 오시올라에서 천막집회를 열 당시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머물던 호텔 방에서 하나님께 간곡히 애원합니다. 다섯 살 난 버취를 위한 아빠로서의 애타는 심경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룁니다. 그는 아들을 일으켜 껴 안고 "버취, 널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현 상태 대로 과연 자신이 받으며 자랐던 그런 사랑을 어떻게 베풀 수 있을 지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5년의 세월이 지난 뒤 또 다른 충격이 부딪쳐 왔습니다. 젤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였지요. 이제 버취의 삶에는 아빠든 누구든 메워 주지 않으면 안 될 커다란 공백이 생겼습니다. 이런 충격과 고통을 극복해 나가면서 지은 또 다른 명작이 바로 '내일 일을 난 모르네'입니다.  


되찾은 행복

그러나 머지 않아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 속에서 한 젊은 여인과 재혼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할러웨이 가문의 글로리아(본명: 글로리아 호이트 할러웨이)이지요. 글로리아는 남편의 모든 지난 날을 보듬듯 위로해 줄 뿐더러 버취를 자기 친아들처럼 사랑해 줍니다. 그녀 역시 음악과 매니지먼트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여러 모로 남편의 사역을 돕습니다.

어느 날 저녁. 새 아내가 저녁상을 준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지요. 오랫동안 아내의 따스한 대접을 받아 보지 못한 그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대하는 주부의 솜씨였습니다. 맛있는 냄새가 온 방을 가득 채우자 더는 견딜 수 없어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습니다.

글로리아가 정성껏 요리한 접시를 모두 상 위에 올려 놓자 스탠필은 눈이 휘둥그레져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 흔듭니다. 이름대로 얼마나 영광스러운 아내를 얻었는지 감탄하고 있었지요. 이 무드를 알아채지 못한 아내는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뒷뜰로 나가는 기색이었습니다.

석양 빛에 비껴선 아내가 문득 외치는 목청이 들려 왔습니다.

   "버취, 집으로 와! 저녁 시간이야."

순간..스탠필의 온 얼굴엔 미소와 눈물이 함께 고여 갔습니다. '저녁 시간'! 자신이 재혼 얼마 전 절망 속에서 외쳤던 부르짖음이 결정체가 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찬란히 거듭난 바로 그 영감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글로리아는 남편의 기대에 전혀 어긋나지 않게 동역자로서 훌륭하게 반려자 구실을 했습니다. 둘 사이에 딸 캐티, 주디도 태어났습니다.  

훗날 스탠필은 인디애나주 하일즈 앤더슨 대학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또 1981년엔 '가스펠뮤직 영예의 전당'의 일원으로 추대됩니다. 83년엔 '천국의 이쪽'이라는 자서전도 펴 냈습니다.



1993년 2월. 스탠필은 오래 살던 텍서스 포트월트를 떠나 캔저스 오벌랜드 파크로 이사를 갔습니다. 일 년도 채 못된 12월 30일. 세상을 떠나 그의 영원한 찬송의 대상이신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장지는 인근 좐슨 카운티 기념묘원이었습니다. (사진은 그의 묘패)   


그의 측근들은 2003년 9월 9일 자로, 그를 추억하는 기념 앨범을 펴 냅니다. 'Mansion over the Hilltop: a Tribute to the Legendary Ira Stanphill' 이지요. 고인의 최고 명곡 10여곡이 실렸는데 다양한 가수들/악단의 연주로 돼 있습니다. 고인의 아내 글로리아 스탠필이 부 프로듀서로 활약했지요.
다음 사이트에서 샘플을 들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cissurl.com/4/hb8

http://scissurl.com/4/hb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