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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양육으로부터의 탈출?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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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일 학년 때 유난히 아이마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하고 묻던 선생님이 계셨다.
너도나도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많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한 친구의 대답-“현모양처요!”가 우리를 모두 웃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 아이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과 익살스런 대답이 귓가에 맴돈다.

현대는 여성의 사회생활이 당연시 되어 있다.
집에서 있으면서 일하지 않는 여성을 무능하게 보는 시선 또한 무시 못 한다.

하루는 24 시간이다. 더 길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career 를 키우는 것, 아니면 더 나은 삶을 위해 돈을 버는 것. 아니면 철저한 주부로 집에서 가족을 물심양면으로 돌보는 것 중 어느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 셋을 다 이루어 내야 하는가?  선택의 자유가 있기는 한가?

미국의 이민사회는 또 다른 양상을 띤다.
남자 혼자 벌어서는 부족하고 부부가 같이 뛰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아니면 여자 혼자서 생계를 꾸려 나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대인의 삶이 이렇게 고달프다.
이민자의 삶은 더 고달플 수 있다.
다 수긍이 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뒷받침 해 주는 현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삶에는 반드시 소외되는 가족의 일원이 있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다..
어떤 이는 되묻는다. 할머니에게 맡겨진 아이를 한 달씩 일하느라 자주 보러 가지도 않는 어느 엄마의 반문:

“그래서 우리 애, 뭐 잘 못 된 거 있어요?”

아이에게 전혀 영향이 없다면 천만다행이지만 혹시 그녀만의 착각은 아닐지.

한동안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초등학교 3 -4 학년 아이들이었다. 학교 끝나고 학원에 데려오면 대개는 저녁 7시까지 있는다. 숙제를 봐 주고 모르는 것을 재차 설명해 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나이에 일해야 하는 엄마 때문에, 아무도 없는 빈 집에 갈 수 없는 수많은 아이들.
대부분 조그만 따스한 손길에도 찰싹 달라 붙는다.

“선생님이 좋아요!”

수시로 듣던 말이다. 나는 가르치고 보수를 받는 사람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잠시나마 엄마 같은 온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대상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까지 밖에서 가공식품으로 다 해결하는 아이들.
무엇을 사 먹어야 할지 다 꿰뚫고 있는 아이들.
돈 주고 뭘 혼자 사 먹어 본 적이 없는 아마 돈 계산도 서투렀을 우리 아이에 비하면 엄청 영리한 아이들이다.

학교에서 주는 공문을 내게 내밀며 “선생님 이거 해석해 주세요. 우리 엄마 보여 주게요.”

영어가 어려운 부모까지 헤아려 미리 행동하는 총명한 초등학교 4학년 아이. 한국의 부모와 떨어져서 한국에 돌아 갈 때을 위해 국어와 수학 문제집까지 풀어야 되는 아이는 심심하면 엄마 아빠 얘기를 자주 내게 하곤 한다.
아직도 고사리손인 여린 아이들이 무척 안쓰러웠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진퇴양난이지 싶다.

누가 감히 일하지 말고 집에서 아이만 돌보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으며, 생계를 위해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가슴 아파 하며 하는 수 없이 일터로 향하는 그들을 나무라고 판단할 수 있나?
 
그런가 하면 아이들의 양육을 위해 잘 나가던 직장을 포기하고 집에 있게 된 어느 엄마의 "10년 집에서 살림만 하고 나니 이제 잘 할 줄 아는 것은 밥 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는 말이 푸념도, 신세 한탄도 아닌 냉철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고백 같이 들린다.
그동안 급변하는 사회와 단절된 듯 해 자신감 마저 상실된 많은 주부들이 공통으로 갖는 생각일 성 싶다.

사람은 nurture 되어야 한다. 의식주는 기본이지만 사랑으로 관심으로 또 보호 되어야 한다. 엇비슷하게나마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 위해선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체험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

아이의 성장 발육 과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 뿐인 그 한 아이. 유닠하게 창조된 그 한 아이에게 주는 관심과 캐어는 가지고 태어난 재능과 가능성을 뛰어 넘어 많은 것을 이루게 한다.

아이는 세상의 악과 위험으로부터 보호 되어야 한다. 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분별력을 위해 부모는 아이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세상에 속한 이들을 이해는 하나,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보호 받아야 한다. 그냥 벌판의 야생화처럼 내버려져도 되는 것이 사람을 양육하는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의 발걸음이 죄 짓는 곳으로 향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보호해야 한다.
설사 일시적으로 우리의 노력과 관심이 예상치 않은 결과를 가져 온다 해도.

성장하는 시기는 아직 가치관과 신앙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해 불안전한 시기다. 세상이 주는 메시지로 인해 혼란스러운 아이들을 인내로 지켜 봐 주는 부모의 입김과 자리는 그 어느 것 보다 영향력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조건 다 포기해야 하나? 나의 꿈은 다 산산조각이 되어도 아이 중심으로 살아야 하나? 많이들 방황한다. 이것도 저것도 포기할 수 없어. 그러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다 소홀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특히 아직 젊은 엄마들, 이미 집에서 전업주부로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여성이나 아직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갈등하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생각이다.
즉, 집에 있으면서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옵션이 있는 경우에만 해당이 될 성 싶다.

나는 그런 상황일수록 믿음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너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말인 듯도 싶다. 아니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생각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별 재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영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렇지만 우리는 어차피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아니지 않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두드리면 열리고 찾으면 찾아진다.
그리고 구하면 주신다.
창조주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은 아이디어 뱅크시다.

나 자신을 위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나의 재능과 경험 교육을 바탕으로 나만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디어는 반드시 있다. 수입의 근원이 될 만한 아이디어는 찾으면 찾아진다. 그 유명한 Martha Steward 도 쿠키를 만들어 이웃에게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하지 않나?

집에서 있기로 작정한 많은 젊은 엄마들이 육아 일로 지친 나머지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앞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녀들을 심신이 건강하고 영적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애씀이 사회에서 받는 인정과 물질로 환산되지 않는다고 집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을 후회하며 탓하진 않나? 우리가 무엇인가 선택할 때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하면 이미 잃은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나고 보면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될 수가 있다.

아직 젊음과 건강이 꿈이 있을 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믿음으로 사는 훈련을 하는 시기로 삼으면, 훗날 아이가 자라서 부모 품을 떠날 무렵에는 공허감 보단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여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지 않겠나?
미래를 향하여 웃음 지을 수 있는 강인함과 믿음이 있는 성숙한 여성으로 말이다.

잠언 3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