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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영준이와 나의 자유 (뉴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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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교회 중등부 교사 시절 이야기다.

영준이는 부모의 이혼으로 미국에서 재혼해 사는 아버지와 같이 살려고 어린 동생과 함께 미국에 온 아이다. 주변에서 들려 준 이야기에 의하면 꽤 말썽을 부린다고 한다. 아이에 대한 많은 사전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닌데도 너도나도 얘기해 주기에 바쁘다. 

나도 부족한 사람인지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잘 안다. 선입관 때문이다. 모르면 그냥 보이는 만큼 느끼는 대로 자연스럽게 편하게 대하면 되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교사인 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필요 없는 색안경까지 턱 끼고 할까 봐 참 불편했다.

그 뿐인가. 도구라는 본분을 잊고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만 필요한 맞춤형 은혜가 있을 텐데 기다리고 인내하긴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정 문제의 해결사로 전락하는 유혹에 넘어 갈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너무 늦은 일. 다 엎질러진 물이다. 너무 많이 아는 나는 어떻게 이 아이를 돌볼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나이에 비해 헌칠한 키에다 깡마른 이 소년의 얼굴엔 기쁨 대신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기가 죽은 듯 축 처진 어깨이면서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이, 늘 자신을 방어하는 듯한 맘과 몸짓이다. .

슬퍼 보이는, 아니 슬픈 영준이.
나는 그의 슬픔과 우울의 원인을 추측해 보며, 그런 내 추측이 되도록 그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데 방해 요소가 아니길 바럤다. 

아이들은 참 영리하다. 그리고 예민하다. 안 보는 거 같으면서 다 보고 안 듣는 거 같으면서 다 듣는 아이들. 눈치가 빤해서 어른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미소, 가시 돋히거나 뼈 있는 말 등에도 퍽 민감하다.
그리고 그들은 잘 안다. 누가 인위적으로 상황을 바꾸려 드는 것을. 그러면서 그들은 반항하고 상처 받고 어른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랑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냥 오늘 기분이 나쁜가 보다 하고 툭 치며 농담도 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데...아니면 지가 먼저 내게 다가 오도록 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 나는 너무 많이 아는 것 때문에 가중된 책임감에 스스로 눌리는 듯 했다.

엄마한테 야단 맞으면 "그러면 왜 날 낳았어?" 하면서 되묻는다는 어린 동생에 대한 원한 섞인 말이 나를 놀라게 한다. “한국에 계신 친엄마랑 헤어진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하며 어린 동생의 서서히 잊혀 가는 기억마저 고통스러워 하는 아이의 푸념이다.

우리가 친해지긴 했나 보다.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그의 이야기. 나는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것 사 먹으며 같이 놀아 준다. 서브웨이를 타고 다니며 그를 슬프게 만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의 엄마에게 온 편지도 같이 읽는다.

이렇게 그의 아픔이 서서히 나의 아픔이 되어 갔으며 그가 이미 흘려 버린 많은 눈물이 이젠 나의 눈에 고이기 시작하던 어느 날.

먹을 것을 앞에 놓고 마주 앉은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제가요.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응? 하나님의 뜻? “

중학교 2학년 정도의 아이에게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내심 걱정이 된 나는 혹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려나 하는 의혹과 함께  “그래? 그게 뭔데?” 하고 반신반의하며 묻는다.

“성경에 나와 있어요.”

“성경에?” 

“예.”

아이가 성경을 찾아 데살로니카전서 5장 18절을 보여 준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서로 말이 더 이상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말씀의 빛이 우리 둘의 마음 속을 환하게 밝히는 것을 느끼고 알기에.

이렇게 영준이와 나의 아픔을 보혜사 (=위로자) 성령께서는 안도와 평안함으로 바꾸시고 또 고통의 굴레에서 자유로 우리를 이끌어 내시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시는 그의 어린 양으로 이렇게 이 아이는 계속 커 갔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푸른 들판 맑은 시냇 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좋은 목자 나는 그의 어린양
   철을 따라 꼴을 먹여 주시니 내게 부족함 전혀 없어라.

   찬송가 45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