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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검은 빛의 슬픔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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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미혼모인 셰럴은 흑인이다. 그리고 welfare로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가 생후 한 달이 채 될까 말까 한 딸 오쌧을 데리고 교회에 첫 발을 내딛던 날 숱한 시선들이 한꺼번에 둘에게 몰릴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양 몰골이 형편 없고 까칠한 얼굴은 이미 사는 데 지친 모습들. 앙상한 뼈대 같은 모습에다,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눈의 초점은 겨우 꺼지지 않고 지탱하는 바람 앞의 촛불 같아 보였다. 세상에 마지 못해 사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면 바로 그녀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생 welfare 수혜자로 살 수는 없다고 깨달은 그녀는 자신과 딸의 장래를 위해 Columbia University 대학원의 농아교육학과에 입학한다-이런 결단을 내리기까지도 험난한 길이었지만, 공부를 시작한 후 아기를 여기저기 맡기며 공부를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다고 울며 전화한다. 그리곤 스스로 마음을 바꾸기도 몇 차례 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 용기를 주고 급하면 아이를 봐 주기도 했다. 이런 극적인 역경 가운데 몇 년이 지나고 마침내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게 된다. 내게 보내 온 그녀의 졸업사진에 넘치는 환한 미소와 반짝반짝 빛나는 흑진주 같은 눈이 무척 인상적이다.

쉐럴은 더 이상은 웰페어 수혜자가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 가는 자랑스러운 여성이다. 그녀는 이렇게 주변의 많은 이들의 사랑과 도움으로 새로운 삶의 페이지를 열고 살아 가는 열심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그녀가 내뱉는 말에 지금까지 모르던 그녀의 단면을 보게 된다.

“나는 예수님이 흑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믿고 싶어요…”

“어?…” 나는 말을 잃었다.

만약 말하는 사람이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니 아무도 안 듣는다면 숨도 고르지 않고, “ 아니 뭐...뭐라고?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지! 성경에 분명히 쓰여 있거든?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고… 길에 다니는 유대인들 못 봤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아마도 이런 유의 속사포가 내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녀의 엉뚱한 말에 분명히 내 표정과 눈에 당황한 내색이 역력했겠지만 나의 거침 없는 속사포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나는 그녀의 피부색을 의식한 것이다.

쉐럴과 같은 색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미국에는 소수인종으로 살아간다.
'주류'가 아닌 이들은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오랜 세월 동안 받아 왔다.
그 가운데는 부모를 잘 만나 교육 받고 사회의 엘리트로 당당하게 사는 이들도 있고 열악한 환경을 딛고 일어선 많은 성공한 케이스가 여기저기 지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평범하게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도 저도 아닌 사회에 누가 되는 부류도 상당하다. 

쉐럴과 같이 대학 교육까지 받았으나 미혼모가 되는 동시에 welfare 수혜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피부색은 같으나 이들의 삶의 양식이 각기 다르다.

단적으로 그들 모두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그들의 ‘피해의식’을 떠 올린다.

영원히 해답 없는 인종차별의 피해자인 이들은 받은 차별로 말미암아 또 자신들도 자기들과 다른 인종들을 차별하며 살아간다. 그리곤 과거에 자신들의 조상이 받은 차별의 보상까지 요구한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평생 따라 다니는 아픔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일까 상상해 본 적은 있다.

시아버님 교회에 내가 아는 어느 흑인 장로님이 계시다. 그는 한국인 아내를 둔 흑인 남성이다. 사회적으로도 능력 있고 인정 받는 사람이다. 교회를 내 집처럼 돌보는 사람이다. 그의 유난히 검은 피부와는 달리 반짝이는 눈과 그의 선한 미소가 사람을 끈다. 그의 한국인 아내 역시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다. 

이들도 그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필이면 그 많은 사람들 중 흑인을 남편으로 택한 그의 아내가 주변과 식구와 친지로부터 받은 '왕따'와 차별, 멸시와 냉대가 그녀의 가슴을 많이 멍들게 한 것 같다. 그들 부부를 부끄러워 해 가족 행사에 그들 부부가 오는 것을 반기지 않던 친지들. 자기를 선택한 대가로 친지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아내가 받는 상처를 옆에서 보는  남편으로의 삶은 어떘을까?

그녀는 이런 차별과 수모를 전혀 예상 못하진 않았을 텐데...과연 그의 어떤 매력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을까? 모든 결혼이 다 사랑 없는 무모한 장난만은 아니듯 이들은 서로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과연 주위에서 부끄러워 하듯 이분에게는 전혀 흠모하고 사모할 만한 인간적인 매력의 소치도 없단 말인가? 

아니면 한국인의 우월주의 사상인가? 단순히 색깔이 다르다는 것. 피부색이 다른 것이 나는 그보다 더 낳은 사람으로, 그는 나보다 더 못한 사람으로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수 있나 보다. 
아니면 다른 것은 무조건 거부하고 저항하는 이질감과 협소함인가?
피부색깔이라는 담을 헐고 한 개인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는 없을까?

내 눈에는 그는 충분히 멋있는 한 가정의 책임감 있는 가장이요 좋은 남편이요 자상한 아빠다. 교회에서도 존경 받는 신앙인이다. 그의 아내가 그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만큼 그는 충분히 멋있고 매력 있는 남성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의 피부색을 건너 뛰지 못한다. 

이렇게 편견이란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허물어 지지 않는 영원히 존재하는 벽인가 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이들의 눈에 그냥 "상종해서는 안 될" 흑인으로 남는다.

얼마나 큰 아픔이기에 쉐럴은 예수님을 자신의 피부를 통해서 볼까?
어쩜 예수님만은 차별 받는 그들의 또 그녀의 편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까? 

예수님은 이토록 가식적이고 터무니없는 세상이 만들어 놓은 굴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 오셨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종이 되심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는데 쉐럴은 아직도 몸은 자유로우나 생각은 종노릇 하는 삶 속에서 발버둥 치나? 

“…세상에 의인은 단 하나도 없다.” 라는 말씀이 우리 모두의 속성을 말해준다.
군림하려는 자나 종속 당하는 자나 하나님 앞에는 모두 죄인이다.
죄인의 생각과 기준 그리고 개념은 절대로 의롭지 못하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를 보면서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내린 죄악성을 우리는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눈에 안 보인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서로의 피해자이다. 우리의 죄악이 뿜어 대는 그 독성의 피해자이다. 우리도 각자 다른 피해의식을 가지고 병든 채 살아 간다. 

그녀의 이런저런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으며...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 났는데, 그러면 나는 예수님이 나와 같은 동양인인 황색 인종으로 태어나셨다고 믿을까?” 웃으면서 나는 그녀에게 되묻는다. 

그리고, 쉐럴의 마음에도 치료하는 말씀의 빛이 임하기를 기도한다.

또, 얇디 얇은 피부의 색으로 말미암아 소외 당하고 아파 하는 많은 이들이 나음 입기를 소망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