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세이보처럼 (뉴하우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에 살 때다.
우리는 미군부대 안 관사에 살았다.
대부분 훈련이나 타국으로 파송되는 남편들의 부재 중에 이웃이 서로 돕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어린아기가 있는 경우 참으로 힘겹다. 설상가상으로  키우는 애완견이 있는 경우 매일 데리고 나가 걸리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윗층에 사는 아기 엄마의 경우가 그랬다. 갓난 어린아기, 그리고 또 다른 식구인 '세이보'(Sabot)가 있었다. 세이보는 아주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래브러도 리츠리버(Labrador retriever) 종의 개다. 우리 아이에게도 아빠의 부재 중 많은 위안을 준 세이보라 우리 식구에게도 사랑 받는 듬직한 사이즈의 녀석이다. 어느 날 좀 더 일찍 집에 돌아오게 된 남편은 무슨 맘을 먹었는지 한동안 운동 부족이던 세이보를 걸리고 싶어했다. 주인은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른다.

아주 씩씩하고 신나는 걸음으로 관사를 빠져 나간 둘은 예상 밖에 얼마 안 있어 금방 되돌아 온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남편이 들려 준 세이보의 사연은 이랬다.

신나게 층계를 내려가 낯 익은 거리와 잔디를 지나 부대의 검문소 밖으로 데리고 나가 오래 걸리려던 남편의 의도와는 달리 세이보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 듯 했다.
담도 바리케이드도 없는 경계선이지만, 검문소가 서 있다.

나가는 것은 자유. 그러나 아무나 들어 올 수 없는 곳에 우리는 살고 있었다.
계속 이어져서 부대 밖의 동네와 연결 되는 인도를 남편과 같이 걷던 세이보는 정확히 검문소가 있는 길 선상에 주저 앉아 더 이상 걷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런저런 감언이설에도 옴짝달싹 않는 세이보를 남편은 다시 데리고 들어 올 수 밖에 없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 저 너머가 낯선 곳임을 세이보는 잘 발달된 후각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기 주인이 아닌 어쩌다 부딪치는 이웃을 믿고 따라 나설 곳은 더더욱 아니었나 보다.

이것은 우리에게 세이보의 영리함에 감탄하는 이야기거리이기도 했지만 훗날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다.

나의 영적 감각은 얼마나 민감한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얼마나 분명한가? 세이보처럼 막무가내로 타협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고 버틸 수 있는 선한 고집이 있는지 말이다.

경계해야 할 사상과 아이디어와 인물에 민감한지?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안이며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믿음인데, 아무나 이끄는 대로 그가 유명 인사면 그냥 믿고 따라 갈 것인지?

은근히 좀 더 고상하게 지식인답게 이도 저도 다 포용하는 너그러운 모습의 참 종교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는 않나? 

요즘 같이 잘 포장된 기독교가 만연한 이 때, 새로운 것이 다 좋고 옳은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와 예수님의 이름을 단지 빌린 것에 불과한 상품은 아닌지?
나는 분별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진정한 나의 구세주요 주인인지?
아니면 처절히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분만으로는 부족해서 새로운 흠모할 만한 것에 눈을 돌리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말씀과 경건의 훈련으로 민감한 영적 감각의 소유자이고 싶다.
가서는 안 되는 위험구역이면 완강히 버티고 싶다. 세이보처럼.

Psalm(시편) 8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