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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김동열의 날마다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이 걸으시는 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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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열의  매일묵상
 
마태복음 7장 13-20절 말씀

[몇 년 전 오하이오 주 법원의 흑인판사 윌리엄 멀로리는
술에 취해 흑인에게 욕설을 한 하이즈라는 남성에게 30일 복역형과 
6주간 교회예배 참석 중 하나를 고르도록 했고, 하이즈는 교회에
나가는 걸 선택했다고 한다.

멀로리 판사는 "그가 교회에 나가면 문화의식이 넓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흑인 택시 기사는 "교회는 아무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기대와 비판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이 두 가지 관점이 발견된다는 데 아픔이 있다.

한 번은 어느 목회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변하지 않을 사람은 10년, 20년 말씀을 전해도 도저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회경험으로 볼 때 여지까지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열심히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그렇게 놔 두고 새로운 사람들을 잘 훈련해서
성장시키는 것이 빠르다고 말한다.

실제적인 목회 속에서의 고뇌요 목회현실의 어려움이라고 이해는 했지만,
말씀을 선포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설교해야 하는 것이
안 됐다 싶었다.

왜 변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여 모든 것을 드러내고 수술한다.
그런데 왜 변하지 않을까?

교회가 진리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
세상 것도 취하고 주님도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다.
할 수 있으면 회중들이 듣기 싫어 하는 말씀들,
얼굴을 붉혀야 하는 말씀들은 살짝 제껴 놓는다.
죄에 대하여, 회개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와 진노에 대하여 등등.

전하지 않을 뿐이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유를 가지고 말이다.

많은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턱을 낮추는 방법은 세상의 문화와 방법을 동원하는 정도이다.
세상 것과 성경적인 것을 모두 융합시켜 복합적인 그라운드를 만들어 놓고
이 사람도 받아 들일 수 있고 저 사람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
마치 주님의 성육신하신 원리에서 나온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그 이상 주님의 이런 말씀이 설 자리가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 베드로가 막아 서고
주님을 붙잡고 말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2-24).

왜 변화가 없나?
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맺어야 할 열매가 없나?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진리인데 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데 왜 그 열매가 없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은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데
우리는 쉽고 넓은 길을 걷고 있으면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좁은 길을 걷자.
그 길이 협착하고 찾는 사람이 없어도 그 길을 걷자.
손해가 있고 때로는 넘어져 살이 찢겨 상처가 생겨도 그 길을 걷자.
그 길에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고 열매가 있다.

그 길을 우리 주님도 걷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