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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역사서

[삼상 14:1-23] 요나단의 모험적 신앙과 용기


바탕성경본문: (구약) 슈무엘A서(삼상) 14:1-23


요나탄(요나단)은 성경에서 참으로 아깝고 애석한 비극적인 인물의 하나이죠.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첫 왕세자였던 그는 분명 차기 왕감으로 흠잡을 데 없는 탁월한 재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샤울 왕의 중범죄로 인해 결국 둘도 없는 친구 다뷛(다윗)에게 미래의 왕위를 내어주고, 자신은 끝내 아버지의 군대와 함께 전사할 수밖에 없이 처절했던 일종의 희생양이었지요. 물론 아버지와 달리 자결하진 않습니다만. 

[요나탄에 관하여 다음 글도 참조하기 바람:  http://scissurl.com/3/5gl  ]

그런데도 요나탄은 다뷛을 끔찍히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꺼이 양보할 정도였습니다. 주된 까닭은 베틀레헴 시골 목동에 불과한 다뷛이 거인 골리아드를 이겨 쳐 죽일 때, 예호봐(여호와) 하나님이 다뷛과 함께 하신다는 명백한 사실을 발견하고서였죠. 요나탄은 자신이 입고 있던 왕자의 겉옷과 군복, 지녔던 검과 활과 띠(벨트)까지 선뜻 다뷛에게 건네주었고, 그날 둘은 서로 영원한 친구로서 우정을 굳게 맹약하였으며, 둘 다 남은 평생 그 약속을 지킵니다(참고: 슘A 18'1-4).  

요나탄은 아버지 샤울의 범죄 탓에 하나님이 이미 샤울 왕가를 버리시고 자기 대신 다뷛을 차기 왕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분노하여 다뷛을 질투/시기하고 막으려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뷛을 적극 옹호하고 지켜준 사실을 볼 때, 참으로 사람됨이 걸출하다는 느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요나탄은 마치 메시아의 앞길을 열고 준비했던 침례/세례 요한 같은 구실을 한 셈이죠. 국법으로는 엄연히 자신이 차기 왕 후보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이 다뷛을 택하셨음을 믿음으로 확신하고, "그대는 흥하고 난 쇠해야 하리!"라는 마음으로 다뷛을 적극 도와 목숨을 다해 위기로부터 지켜주고, 다음 왕으로 무사히 등극할 수 있게 내적으로 준비시켜 준 것이나 진 배 없는 놀랍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사리사욕보다 하나님의 뜻과 친구와의 약속, 우정을 더 중시했다는 얘기지요. 

영화나 텔레비전의 사극에서 흔히 뵈는 치열하고 추악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왕위쟁탈전에 비교할 때, 요나탄은 실로 얼마나 비범하고 신본적인지 느끼게 되지요. 역사 속에서 두 번 발견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고도 신앙 원칙에 투철한 성령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미 승승장구하는 다뷛을 보고 질시하거나 자신의 미래 등극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내세워 감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할 뜻이 전혀 없었던 그였습니다! 

세상적 관점에서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사람, 무능하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이고, 코 아래 갖다 놓아준 밥도 챙겨먹지 못하리만치 기회를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비칠지도 모르죠. 사실 아버지 샤울은 아들을 그렇게 보았을 터입니다(슘A 20'30). 
그러나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요나탄은 외려 용기 있는 사람, 적극적인 믿음과 행동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더욱이 과거에 연연하거나 현실에 급급하기 쉬운 보통사람이 아니라 미래적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혈육과 핏줄에 매이지 않았죠. 하나님과 친구 다뷛을 위해서는 부친의 분노와 칼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아버지와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최후까지 전장을 지켜, 모든 일에 투명한 공명정대성을 추구했습니다(슘A 31'1-6 참조).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픈 점은 두려움을 모르는 요나탄의 용감성과 강력한 믿음입니다. 슈무엘A서(삼상) 14장을 보면, 밐마스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이 펠레쉩(불레셋) 군과 대치하고 있던 어느 날, 요나탄은 자신의 무기를 맡은 젊은 부관만 데리고 단둘이 험한 바위산을 타고 올라가 펠레쉩 진영에 잠입하는데, 놀랍게도 적군들이 요나탄을 바라보는 족족 맥이 스르르 풀려 무기를 써 보지도 않고 쓰러져, 요나탄의 어린 부관의 칼날에 스스로 밥이 되어 줍니다. 그렇게 차례로 수십 명이 죽어갔습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아마도 우리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판벌 싸움에서, 필마단창으로 촉나라 군주 유현덕의 아들 아두 유선을 안고 적진을 뚫는 데 성공한 상산 조자룡 장군을 얼핏 연상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주지할 사실은 요나탄은 여기서 순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여 그분의 초자연적 도움으로 이 싸움을 승전으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해당 성경본문(슈무엘A서 14장)의 문맥으로 볼 때, 결코 요나탄과 그 부관-둘 자신만의 힘으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 천군천사들이 둘을 도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탄의 상황(환경) 초월적인 믿음입니다. 그의 부관은 이것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알고 믿어 왔기에, 요나탄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순종했습니다. 그 젊은 부관이 겁도 없이 서슴치 않고 요나탄을 뒤따라 적진으로 감히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요나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팔(히브리어 '제로바')과 손길을 느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승리 사건을 조자룡처럼 요나탄 자신의 영웅적인 용맹성과 '뱃심'으로 된 것이라고 보면 큰 착각이요 잘못입니다. 
그런 생각은 요나탄의 사람됨을 볼 때 전혀 오해입니다. 영웅심리나 공명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으로 대쉬했을 뿐이며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셔서 그분의 팔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 펠레쉩 군졸들이 아군끼리 서로 싸운 사실만으로도 알 수가 있죠.


우리가 특히 여기서 배울 점 한 가지는 요나탄의 신앙 예언 정신입니다. 그는 부관에게 적진으로 건너가자고 하면서, "필시 예호봐(여호와/야웨)님께서 일하실 것이다"고 선언합니다. 여기 '필시'(울레)란 표현은 자신 없는 애매한 의혹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발현을 기대하는(!) 믿음의 말입니다. 그가 평소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해 왔는지를 시사해 주는 대목이지요. 그는 또 예호봐님의 구원하심은 (수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절대 다수인 적군을 단 둘이서 상대하는 절대 과부족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러자 그의 부관은 무조건 믿음으로 따르겠노라고 합니다. 멋진 장면이죠. 한 사람의 믿음에 다른 사람의 믿음이 화합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의 화합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뜻을 모아 무엇이든 구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지요(마태복음서 18:19). 이 부관은 요나탄과 합심했고, 둘은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일당백적 정신은 만용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 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마도 요나탄은 옛 선조 예슈아(여호수아)의 이 말을 기억했을 법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명이 적 1,000을 쫓을 수 있으니, 예호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아 23'10)  


아무튼, 요나탄은 이어서 그의 모험적 신앙의 절정으로서 예호봐님의 표징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즉 펠레쉩이 "우리가 너희들에게 내려갈 테니 거기서 기다려" 하면 움직이지 말 것이고, 적이 "우리에게 올라와" 하면 하나님이 적을 둘의 손에 붙이신 것이니, 올라가면 이기리라는 예언입니다. 요나탄은 이것을 '표징'(오트)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전계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요나탄의 승리 예언임은 분명합니다. 패배 예언이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의 믿음의 선언은 흔히 예언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 단 1%의 의심이나 또는 탐욕이 개재되어서도 안되겠지요. 우리 중 다수는 거듭난 사람인데도, 요나탄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거나 그런 예언적 선언을 할 수 없다고 선뜻 단언하려는 것은 짧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요나탄보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구약인인 침례 요한보다 더 나은 언약(신약!)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요나탄이 한 것과 같은 믿음의 행동은 물론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기뻐하셔서 그 믿음에 상응하는 대가(원문 '미스타포도테스')를 그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6)!   

요나탄이 믿음으로 예언하고 예상한 대로, 펠레쉩 사람들은 멋모르고 "올라오라"고 하여 결국 표징이 나타났고, 요나탄과 부관은 담대히 올라가서 적군을 이삭 줍듯 해치워 나갔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천군천사를 통해 적군 사이에 큰 두려움과 떨림을 일으키셨는데, 땅도 진동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15절). 그 와중에서 펠레쉩들은 서로가 서로를 치는 일대 내전을 벌이다 마침내 이스라엘 땅에서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이 사건은 무엇을 뜻합니까? 한 두 명의 사람들이 마음을 뭉쳐 믿음으로 나서면,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일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이거, 놀라운 진리 아닌가요?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고 믿음의 사람 앞에서는 숫자의 많고 적음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구약에 자주 나타난 하나님의 전쟁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소수로 다수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기데온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고르고 뽑은 용사 300명만으로 수많은 미디안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숫자의 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에겐 그 숫자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숫자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흔합니다. 큰 교단의 '교세'나 대형교회의 파워를 하나님보다 더 중시하고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무라기들이 뭘 하랴?" 하면서 대형교회 목회자 앞에 굽신거리며 손을 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언필칭 입으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주로 대 교단 또는 대형교회를 통해 일하시거나 소형교회엔 하나님의 손길이 아예 없는 줄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대표기도 등에서 느껴지는 현상이기도 하지요. 

패러처치 등 기독교단체나 행사의 규모가 크고 거창할수록 하나님이 필히 계셔서 더 '큰 역사'를 하시는 줄 생각하는 '숫자신앙'이 오늘날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형교회 안에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알고 보면 소수에 불과합니다. 규모가 클수록 밀과 알곡의 분포율도 많으리라 생각하기 쉬워도, 크면 클수록 반대로 가라지와 쭉정이, 잡초들이 더 많기가 더 쉽습니다. 

주님은 수만 또는 수천 유대 군중이 아닌 단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 가운데서도 셋을 중시하셨으며, 주님의 말씀을 들은 수십 만 유대인들중 단 120명만이 모여 오순절 성령강림 때 첫 교회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사도 파울(바울)이 도와서 세운 교회의 대다수가 처음에 몇 명만으로 시작했습니다. 수를 자랑할 게 아닙니다! 수를 믿을 게 아닙니다!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개인에 따라 요나탄 아니 그 이상의 모험적 초월 신앙과 용기도 가질 수 있고, 그 이상의 일도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신앙위인들의 모범과 표본은 박물관 속의 밀랍인형처럼 구경-보고 듣기-만 하라고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본받고 그 이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요나탄의 모험적/초극적 신앙을 본받아야 좋습니다. 그 어떤 환경과 상황과 장애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당백/일당천으로 영적인 적과 맞서 싸울 수 있고,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무기는 하나님의 완전무장 곧 일곱 가지 온몸갑옷(전신갑주: 에페소서 6'11-18)이며, 예수님의 이름! 어린양의 보혈! 그리고 찬송과 간증, 금식, 영언과 은사 등입니다. 

이 싸움의 주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서 이미 이기신 싸움을 우리는 본받아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으로 전장에 나설 때 천군천사도 우리를 돕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요나탄과 그 부관 같은 믿음의 사람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