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탕본문: 연대기B(역대하) 27:1-9, 왕들B(왕하) 15:32-36
우지야 왕이 교만하여 사제 대신 스스로 향제를 올려 바치려다가 주/야웨님의 저주를 받아 나환자가 되어 별궁에 따로 살아가면서, 아들 요탐(=야후탐/예호탐) 왕자가 사실상의 섭정을 했습니다.
요탐은 아버지가 없는 왕궁을 관리하고 나라를 돌보면서 비교적 선정을 베풉니다. 그러던 25세 때..정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사진: 요탐 왕의 어인(御印)
그러나 요탐 왕은 아버지의 나병 발병 사건 후 그의 여생동안 단 한 번도 주/야웨님의 성전에 들어가 경배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같은 저주를 받을까 봐 두려웠든지 아니면 거부감 탓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로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선이어라!"
다빋 시대의 성전음악인 지도자/선견자 아샆은 기쁨으로 위와 같이 고백했지만, 아버지의 악몽 같은 사건을 기억하는 요탐에겐 감히 그런 믿음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우지야가 저주 받던 날 이마에 생긴 하얀 반점을 멀리서 바라봤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날로부터 마음에 남다른 두려움이 생겼고 한 편으로는 주/야웨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가까이 가거나 거기서 주/야웨님께 경배한다는 데 깊은 회의감을 지니게 됐습니다. 성전 출입이 그에겐 일종의 '징크스'였습니다. 그의 마음엔 한동안 밝은 기쁨보다는 우울하고 어두운 맘이 자리잡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선지..요탐 왕은 선대에 비해 비교적 짧은 통치기간을 누립니다.
물론 아버지 우지야의 교만 죄 탓도 있을 터입니다.
8대 요아쉬 40년
9대 아마지야 29년
10대 우지야(아자리야) 52년
11대 요탐 16년 (+ 섭정 26년?)
그의 아들 아하즈 왕도 마찬가지(16년)였지요.
요탐 왕은 과거 아버지의 혁혁한 치세를 생생히 기억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젊어서(16세) 왕이 되어 경건한 통치자로 시작, 숙적인 펠리쉩 정벌 등 과감하고 혁명적인 위업과 영토 확장, 국방과 산업 강화, 해외에 널리 위세를 떨친 시절을 보고 들어 상세히 알고 있을 터입니다. 유다 전성기를 회복한 드문 명군이었던 아버지에 대하여 대단한 자긍심도 지녔을 것입니다. 아버지 우지야야 말로 젊은 그의 '영웅' 내지 '아이돌'이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아버지의 영예가 갑자기 하루 아침에 땅바닥에 떨어지자 그는 낙망과 환멸을 느낍니다. 더욱이 그 위풍당당한 영웅이던 아버지가 하필 (당시로선) 치욕스럽게도 병 중에 가장 저주의 상징이다시피 한 나병입니까?
하나님의 복도, 나라의 영광도 위세도 모두 사라지고 퇴색해 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자신도 아버지 못지 않은 위엄과 위세를 길러 보려던 꿈이 한꺼번에 폭삭 가라앉고 자신이 "사시랑이"가 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사제 대신 향제를 드린다는 게 그토록 대죄인가? 그 전에 훌륭한 일도 많이 이루지 않았는가..그 걸로 아버지가 면죄 받지는 못하는가?'
아마도 이런 의문이 자리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요탐 왕이 이런 의혹과 환멸감 속에 주/야웨님을 멀리 하며 살아갈 동안 백성들은 악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새 왕이 성전을 드나들지 않는다는 뉴스가 나돌자, 마치 신호탄이라도 올려진 양 "옳거니" 하고, 더욱 더 성전 경배보다는 금지된 산당 제사를 선호했습니다. 산당 제사는 아버지 우지야 왕 때도 폐지하지 않아 활성화됐던 것인데, 요탐이 성전을 멀리하자 더욱 더 백성들의 빌미가 되기 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통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대언자 예샤야후(이사야)를 보내십니다. 예샤야후는 예샤야후서 6장에 따르면, 우지야 왕이 죽던 그 해 정식으로 사역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전부터 일종의 사역을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예샤야후가 우러러 보니, 하늘 성전 보좌에 높이 앉으신 만군의 주/야웨 하나님은 세랖들의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성삼위 하나님을 기리는 소리를 들으시며 계셨고, 이 광경을 바라 본 예샤야후는 회개하고 세랖이 하늘 하늘 성전 번제단에서 가져 온 핀 숯불로 그의 입술에 대니 그의 죄악이 용서 받고 제하여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내가 누굴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텐가?"고 물으시자, 예샤야후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의 대답이지요. 하나님은 유다가 포로시대를 맞아 황폐할 때까지 예샤야후를 쓰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거룩한 씨 곧 남은 그루터기 위에는 계시를 온전히 깨달을 자가 없다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샤야후는 요탐 왕 때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입니다.
이 경고를 받아선지는 확실히 모르나, 요탐 왕에겐 한때나마 변화가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의 윗문을 건축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찌온 성의 일부인 오펠 성벽을 대폭 강화했고요. 유다의 여러 고지대에 성들을 건설하고 적이 몰래 틈타기 쉬운 숲속에도 튼튼한 요새와 망대들을 건축했습니다.
요탐이 대언자 예샤야후의 말에 귀를 기울인 듯 하나님 앞에서 제 궤도-올바른 길-로 들어서자, 하나님은 그를 도우셔서 암몬 족의 왕과 한 판 대결을 벌여 승리하게 하십니다. 자고로 유다와 이스라엘 왕의 싸움의 승리 여부는 하나님의 도움이 관건이며, 요탐 왕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암몬 족은 선왕인 우지야 당시 굴복하여 조공을 바친 바 있으나, 우지야가 죽고 나자 젊은 신왕 요탐을 얕보고 조공을 중단했든지 아니면 유다 근경으로 쳐들어 왔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암몬은 다시 유다에 굴복하고 조공을 바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유다에 패배한 그 해, 암몬 족은 은덩이 100 키카르(단위명. = 탈렌트. 1키카르는 약 3,000 성전 쉐켈), 밀과 보리 각각 10,000 코르(1 코르는 약 10 에파 또는 약250-260 리터)씩을 바치기 시작하여 3년간 계속했습니다.
성경은 여기서 요탐이 바른 길로 갔기에 하나님이 그를 도우셔서 점점 강성하게 하셨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요탐의 통치기간은 16년으로 마감합니다. 25세에 등극했으니 약 41세의 비교적 단명한 삶을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탐 왕은 왜 단명했을까요? 앞에서 설명한 원인들 탓이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특히 선대에 이어 산당 제사를 방치한 것은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었습니다.
아울러 요탐은 아들 아하즈를 선한 왕자로 기르지를 못했습니다. 아하즈는 사악한 왕의 하나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북 왕국 이스라엘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요탐, 아하즈 역시 메시아의 선조였습니다.
야로브암 2세의 인장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와 빠른 쇠퇴
추가 바탕본문: 왕들B 14:23-29, 15:8-28
당시 북쪽 이스라엘의 정황은 어땠을까요?
이스라엘은 메시아 왕대와는 직접 무관하나 한때나마 하나님의 은총으로 전성기를 맞았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극적으로 대변한 대언자 호세아가 활약하던 시기여서 잠시나마 주목할 만 합니다.
남쪽에서 우지야-요탐 왕대가 이어지는 동안 이스라엘은 또 다시 여러 번 왕들이 바뀝니다.
우선 예후의 증손자인 야로브암 2세 치세 하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요탐 왕의 조부인 아마지야 왕의 집정기 제 15년에 쇼므론(사마리아)에서 왕위에 오른 야로브암은 41년이라는 긴 통치기간 동안 악을 행하여 자기 이름과 같은 초대왕 야로브암 1세처럼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를 도우시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엔 매인 자도 놓인 자도, 도울 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기 통치기를 누린 북국 왕은 이제 그로서 마지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이제 더는 그냥 두실 수 없어 심판을 가하십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마치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 든 남편 같은 조건 없는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으나(호세아서 참조), 이에 응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버려 두시고 외세를 통해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
이에 따라 유다 왕 우지야의 통치 제 38년, 야로브암 2세의 아들 제카리야가 왕이 됐지만, 불과 6개월간 통치하다 샬룸의 반역으로 백성 앞에서 살해 당합니다. 아버지의 긴 통치기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지요.
이로써 예후 왕조는 불과 4대로 그 짧은 막을 내립니다. 오래 전 예후의 생시에 하나님이 하신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지요(왕들B 10:30) .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이 끝나지 않습니다. 샬룸 역시 왕위에 오른 지 불과 한 달만에 옛 수도 티르자에서 쇼므론까지 올라온 메나헴에게 죽습니다.
메나헴 왕은 10년간 통치하다 죽자 아들 페카히야가 왕이 됐으나 여전히 야로브암처럼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다가 즉위 2년만에 그의 장관인 레말리야의 아들 페카에게 모반을 당해 죽고, 페카가 왕이 되어 20년간 다스립니다.
페카가 왕위에 오른 때는 유다 우지야 왕의 제 52년이었습니다. 즉 페카가 왕이 된 둘째 해에 유다에서 요탐 왕이 즉위한 것입니다. 페카 왕은 요탐을 하나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호시탐탐 침략 때를 노리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남국을 지켜 주셨으나, 요탐이 죽고 그 아들 아하즈가 뒤를 이은 때, 페카가 유다를 침입해 대대적인 공략을 벌입니다.
실로 난전난세(亂戰亂世)의 형국이었지요
김삼의 글은,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함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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