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야 왕은 예루샬렘과 벌판 등에 망대를 여럿 세워 국방을 강화했다. 사진은 '다빋 망대'
바탕본문: 연대기B(역대하) 26:1-15, 왕들B(열왕기하) 15:1-4
준비된 명군(明君)
아마찌야의 뒤를 이은 왕은 우지야(Uzziah).
유다 왕국의 제10대 왕이지요. 1
그의 어머니는 '예콜리아'. 예루샬렘 사람이었습니다. 우지야는 아버지가 암살되던 무렵인 나이 16세 때 왕위에 오릅니다. 7세에 등극한 요아쉬 왕 다음으로 어린 셈이었지요.
우지야는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아 당당하게 즉위합니다.
우지야 왕대에 유다 왕국은 다시 전성기를 맞습니다.
52년이라는 최장수 통치기간을 누린 우지야는 대단히 용감하고도 과감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홍해의 엘롵(=엘랕) 항을 재건설하여 유다의 것으로 돌린 것. 엘롵은 홍해 아카바만의 북동부에 있는 항구로 본래 에돔의 도시였지만, 다빋 왕이 에돔을 정벌하면서 차지했습니다(슈무엘B=삼하 8:14). 이 항구는 미쯔라임(에짚트), 남 아라비아, 쪼르(튀로='두로', 푀니키아) 등을 연결하는 어귀였기에 국제상업 목적으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지금도 에일랕 항으로 존속해 있습니다.
슐로모 시대 때는 에찌온게베르 항과 함께 이 항에서 오피르 금을 들여오는 등 무역항으로 삼았지요(왕들A=왕상 9:26). 그러나 에돔에 다시 뺏겼다가 우지야가 에돔으로부터 되찾아 새로 항구도시로 건설합니다.
우지야가 부왕이 죽고 나서 이 과업을 수행한 것을 보면 매우 젊은 때 나라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지야라는 이름은 "주/야웨님은 나의 힘". 퍽 예언적이고 강력한 인상을 주는 이름이지요. 그는 또 '아자리야'(주/야웨님이 도우셨음)라고도 불렸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도 '주/야웨님으로 말미암아 강하다(또는 주/야웨님은 능하시다)'였던 것을 보면..어느 모로 보나 그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부왕 아마찌야의 어머니처럼, 우지야의 어머니도 예루샬렘 사람이었음을 특기한 것으로 보면, 두 여성 모두 경건한 영향을 자식들에게 끼친 것 같습니다. 특히 우지야가 젊은 나이에 용맹성이 두드러진 점 등은 15년간 간신히 생명이나 유지하면서 전전긍긍했던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받은 영향이기가 더 쉽습니다.
더욱이 연대기 기자가, 우지야가 나이 16세 때 즉위한 사실을 두 번이나 강조한 것으로 보면, 그는 참으로 유다의 회복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지야는 대언자 제카리야의 영적인 자문을 받을 동안, 영특한 군주로 잘 다스립니다. 과거에 나이 어린 요아쉬 왕이 고모부 예호야다가 생존해 있을 동안 선정을 베푼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연대기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환상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제카리야의 생시 동안 하나님을 찾았다. 또한 그(우지야)가 주/야웨님을 찾는 동안은 하나님이 그를 잘 되게 하셨다."
왕을 돕는 대언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합니다. 아울러 왕은 그 대언자의 말을 끝까지 잘 따라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우지야에겐 처음부터 중요한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당을 그냥 방치해 둔 점입니다. 역대 군주들이 산당을 방치해 둔 것은 왕들의 발목을 잡는, 또는 왕들의 '아킬레스 건'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예루샬렘 성전에서 드려야 할 경배를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멋대로 불법으로 드리면서 우상숭배의 유혹도 받곤 합니다.
그래서 산당 제사를 방치한 왕들은 으레 후반기 또는 종말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펠레쉩 등 주변국 정벌
우지야 왕은 젊은 나이에 용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서서 숙적인 펠레쉩(불레셋)부터 처단합니다. 같(Gath)/야브네/아쉬돋 등 펠레쉩 주요 도시의 성벽을 헐어 버리고 대신 아쉬돋 주변과 펠레쉩 영토 한 가운데다 여러 전략적 거점인 소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우지야 치하의 유다 군이 지중해를 끼고 있던 강국 펠레쉩을 오랜만에 정벌한 것은 실로 획기적이며 대단한 위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용기입니다.
아브라함 당대부터 오래 카나안 서부 쪽에 거주해온 펠레쉩은 카나안 정복 당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판관(사사) 삼손 때와 엘리 때, 샤울 왕 때 이스라엘과 크게 부딪친 적이 있었고, 일종의 전성기였던 골리앋 장군 당시 다빋 왕에 의하여 골리앋이 쓰러지고 골리앋의 거인 형제들도 다빋의 부하들에 의해 모두 죽자 급속히 쇠퇴합니다.
슐로모 때 펠레쉩은 조공을 바치던 존재였고 예호샤팥 왕 때도 은을 공물로 바쳤습니다. 예호샤팥 당시는 아라비아 족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호샤팥의 아들 예호람 때엔 펠레쉩이 수하를 벗어나 유다를 크게 해칩니다(연대B 22:16,17).
따라서 하나님은 우지야 왕대에야 비로소 펠레쉩에 대한 원수를 갚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지야는 또 구르바알에 살던 아라비아 족과 메후님(마온 족)도 쳐서 굴복시킵니다. 에돔 족의 일부로 추정되는 메후님은 과거 예호샤팥 왕 때도 모압-암몬 족과 연합군을 이뤄 유다를 괴롭히던 족속입니다(연대B 20:1). 이쯤 되자 암몬 족은 자진하여 우지야 왕에게 조공을 바치게 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연전연승 대승을 거두며 패배를 모르는 승전왕 우지야 왕의 명성은 이제 국제적으로 널리 퍼져서, 멀리 미쯔라임(에짚트) 변방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군주든 누구든 하나님이 도우셔야 참 승리를 얻을 수 있지요!
국내 개혁-망대 건립과 산업중흥
주변 국가에 겁을 주면서 혁혁한 위세를 떨친 우지야는 국내에도 눈길을 돌려 국방을 튼튼히 하고 산업을 일으킵니다.
과거 선왕 시절 북왕국 이스라엘의 요아쉬 왕이 무너뜨린 예루샬렘 성곽을 재건하되 성문 여기저기 망대를 세워 적군의 조기 발견 및 감시 활동을 기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도록 조치합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멀리 광야에도 망대들을 세워 국방에 도움되게 할 뿐더러, 여기저기 샘물을 파서 목축업자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우지야 당대에 저지대와 평원에 목축이 성했고 우지야 자신도 목장을 소유했을 터입니다.
우지야는 특히 농산업을 선호해서 농토는 물론 산지에도 농부들, 포도밭 영농자들을 파견하여 활발하게 경작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생계와 직결된 주요 산업이 튼튼해야 온 나라가 튼튼하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던 군주였습니다.
타국 정벌에도 과감했던 우지야가 왜 농업을 선호했을까요?
아마도 아버지 당시 예루샬렘이 북국에 패한 뒤 왕이 암살되기까지 15년간 근근히 생존하는 동안 어떤 이유로 왕가가 수도권 근교의 시골 가까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에서 흙 냄새를 맡으며 농부들과 호흡을 하면서 나라를 되살릴 마음을 다졌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실속과 첨단 무기를 갖춘 국군
우지야 왕대의 유다는 군대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실속 있는 강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30만 7,500명 되는 국군을 2,600명의 지휘관들이 거느렸는데 한결 같이 용맹스럽고 건장하고 전력이 풍부한 전사들이었습니다.
왕은 이들 모두에게 예외 없이 방패와 창, 투구와 갑옷, 활과 화살, 물매와 물맷돌 등 무기를 골고루 지급하도록 각별히 힘을 썼습니다. 전군 완전무장화를 실천한 셈이었습니다. 과거에 드물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통 정예부대화가 된 국군은 더욱 전세가 백배하여 왕에게 일사각오로 충성을 다짐했고 최선을 다해 나라를 지키고 적과 싸웠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유다 국군이 당대 최신 첨단 무기를 갖췄던 사실입니다.
즉 유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발명가들을 동원해서 예루샬렘에서 비밀병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한꺼번에 화살을 날리는 대형 활과 투석기였습니다.
우리 민족도 비밀병기라면 한 가닥 하던 신발명의 '짱'들이었습니다. 조선 시절 물소뿔과 박달나무를 접붙여 만든 '각궁'과 '통아'라는 대롱 속으로 쏘는 편전은 사정거리가 1,000보나 됐고 철갑을 뚫는 위력을 자랑했습니다. 또 '수노궁'(手弩弓)은 전갑(箭匣)이라는 탄창식 화살통이 달려 손잡이만 당겨도 화살이 장전/연발되고 전노기(箭弩機)까지 하면 한번에 여러 대의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신무기였습니다.
세종대왕도 대대적인 화기개량을 해서 한꺼번에 여러 발의 화살을 쏘아대는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고려말기 발명가 최무선의 주화를 세종 30년(1448년)에 개량한 신기전은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킽포로 평가되며, 19세기 세계의 어떤 로킽형 무기보다 더 무거운 중량을 1천보 멀리 날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종류도 성능에 따라 대신기전/중신기전/산화신기전과 또 한꺼번에 대형 화살을 차례로 발사하는 화차를 겸한 총통무기 등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우지야 왕대에 그 보다 수천년전에 이미 다연발 화살발사기를 제작한 거 같습니다. 아울러 후대에 로마 제국 군대도 사용했던 투석기(catapult)를 그것도 큰 돌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을 이미 당대에 보유했습니다.
하나님이 왕정에 직접 간섭하시던 신정 시대에 과연 있었을 만한 과학적 개가였습니다.
곧 이 모두가 하나님의 놀랍고 경이로운 도움 덕분이었습니다(26:15 끝).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지야는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에 빠져, 결국 불행한 후반부를 살게 됩니다.
김삼의 글은, 외래어는 되도록 원음에 가깝게 표기함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바랍니다.
- 학자에 따라 아탈리아 여왕을 빼고 9대로 보기도 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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