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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한밤의대화1 (요한복음묵상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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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묵상12

바탕본문: 요한복음서 3:1-4

김삼읽기힌트 : 김삼의 글은..성경 인명/지명/권명을 비롯한 모든 외래어를 그 나라 언어에 가깝게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추구합니다. 혹 한글식 표기법이 생경스럽더라도 이 점을 미리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밤중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신 적이 가끔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되며..하루 일과를 대화로 시작하는 것은 거의 흔하지 않은 일일 터입니다. 더욱이 주님은 밤중과 새벽에 아버지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전반부엔 그런 주님이 한 대상과 깊은 밤에 대화를 나눈 내용이 전개됩니다. 니코데모라는 파리세(Pharisee), 산헤드린 공회원 즉 지배급 관원이자 민중의 교사와의 대화였지요. 이 대화는 대상도 대상이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성을 갖습니다.
이 대화를 몇 부분으로 나눠 심층적으로 음미해 보렵니다. 

    '야행성' 나들이

이 니코데모는 왜 하필 밤에 주님을 찾아 왔을까요?
밤은 어둠이 내려진 시각이므로, 우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즉 니코데모는 사람들을 의식한 것입니다. 그는 당대 유대의 종교국회라고 할 산헤드린의 공의회 의원 즉 당대의 공직자/공무원, 종교 교사였고 더군다나 파리세 당파 소속이었기에 유대 종교인들이 거의 '이단자'로 여기는 예수님을 대낮에 만난다는 게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이 꺼려졌고 퍽 신경이 쓰였던 모양입니다. 

니코데모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니케'(정복자)와 '데모스'(민중)의 합성어로 "민중의 정복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관리였다는 점에서는 어울리는 이름인지는 모르나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 하는 그의 이런 야행성 나들이는 민중을 정복한(?) 그의 이름과는 좀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군요. 
[그러나 훗날엔 그가 분명히 예수님의 한 제자로서 복음으로 민중을 설득한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예수님과의 한밤의 대화, 예수님의 가르침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고 따라서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한밤의 대화 후 그의 심경에 많은 변화를 겪은 것이 거의 사실이며 여기 대해선 이 시리즈 끝부분에서 재론하렵니다.]
 
또는 두 번 째로..니코데모를 야행성/기피성 인사라고 무조건 단죄하기보다 그가 좀 더 깊은 심층적 대화를 나누려고 일부러 주님의 한가하고 조용한 시각을 택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니코데모가 밤에 찾아온 데 대해 모종의 단죄를 하셨다는 일점의 실마리도 우리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밤중의 대화가 더 진지하고 집중된 분위기를 자아낼 수도 있었을 터입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낮과 밤의 차이를 따지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방문했을까?

당대의 지도자/통치계급에 속한 존귀한 니코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았을까요?

첫째로,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예루샬렘에서 행하신 이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음이 틀림 없습니다(2:23-25). 더 나아가 니코데모는 그해 유월절 기간 중 예수님이 단행하신 성전 정화 사건 등을 눈과 귀로 보고 들었을 가능성도 많습니다(2:13-21).
그래서 니코데모는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호감을 가질 뿐더러 그분의 이름을 믿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2:23). 그 가운데서도 그는 고위급 인사였기에 많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사였다고 할 수 있지요.

[기자/사도 요한이 해설로서 곁들인 2:23-25 내용은 3장의 앞부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성경 장절은 본래 없었다가 후대에 추가된 점으로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생시에 고위급 인사인 니코데모에게도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코데모의 속을 꿰뚫어 보시고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약 3년이 지난 훗날 주님이 죽으시고 나자 아무도 함부로 쉽게 개입할 수 없는 주요 사형수의 장례에 거부 아리마테 요셒과 함께 유대 관리인 니코데모가 직접 참여해 그 손으로 직접 주님의 수의 속에 향품을 챙겨 넣는 등 주님의 몸에 '관여'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요복 19:38-42)! 이것은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 깊은 역전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니코데모는 또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한다는 파리세 그뤂 앞에서 항변하면서 힘있게 예수님을 변증합니다(7:50). 그는 훗날 예루샬렘에서 성령님의 강림을 함께 체험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혹시 그러지 않더라도 최소한 부활 후 주님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결국 니코데모는 궁극적으로 주님이 성령님으로 오셔서 거처를 삼아 몸을 의탁하시게 된 한 사람이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자의 몸은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이지요.]

     니코데모의 근접과 한계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라삐'라고 부르며 예수님을 한 스승으로 받들어 존중심을 표명했습니다. 니코데모 자신이 한 라삐였음을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홀가분한 존중이 아니었음을 느낍니다. 더욱이 그는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라삐"라고 각별한 수식어를 답니다. 그는 아마도 그렇게 근접하여 이 라삐를 인정해 드리는 동시 인정 받아 보려는 보상심리 또는 단순히 순수한 이심전심을 겨냥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니코데모는 아직 요한이 단 해설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자..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먼저 건넨 첫 마디를 살펴 봅시다.

"라삐. 우리는 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스승이신 줄을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님이 행하시는 이 표징을 아무나 할 수 없을 터입니다."

첫째로, 니코데모의 표징관 내지 이적관 즉 초자연적 표징/이적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인 유대사상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니코데모가 여기서 쓴 "우리"라는 1인칭 복수대명사는 전체 유대인들일 수도 있고 그가 대표하는 유대 종교계 지도인사들을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니코데모는 예수님에 관한 당대 종교인사들의 이적관과 인식을 같이 하는 선분에서 예수님을 대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이 보편적인 유대 이적/표징관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참 이적을 행한다는 점에선 맞습니다.
2. 그러나 싸탄도 초자연적인 역사를 흉내 낸다는 점입니다(테살B 2:9, 요계 13:13,14). 그래서 분별이라는 별도의 기능과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점. 그러나 유대인들과 대다수 교인들은 대체로 이것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
3. 이적이 아니면 안 믿는 유대인들의 특성을 니코데모도 초월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4. (니코데모에겐 실제 해당 사안이 아니겠지만) 이적마저도 실제로 안 믿는 유대인들도 많다는 점 등입니다.

니코데모의 중심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주님은 예상 밖의 답변을 하십니다.
아마도 니코데모는 자신의 첫 발언과 존중 표명을 통해 대뜸 주님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응하시고 의탁적 제스처를 해 오실 줄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니코데모를 비롯한 사람의 속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2:24b,25. 참조: 1:47).

    거듭나지 않으면..

여기서 주님은 평소 주님의 대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독특한 표면적 '동문서답'식 반문을 하십니다. 주님은 결코 그리스의 소피스트 철학적 궤변론을 펼치시진 않습니다. 그러시긴커녕 집게손가락으로 진리를 향해 손짓하듯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표지판을 내던져 꽂으십니다. 그것은 마치 니코데모의 흐린 영적 시야와 무딘 가슴팍에 내려 꽂히는 화살 내지 표창 같은 것입니다만..니코데모는 사실 주님의 질문의 요지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화살이 자신에게 꽂힌지 어쩐지를 모른 채 어벙벙하게 갈피를 못 잡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그대에게 말하오. 사람이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소."

이것은 참으로 니코데모에겐 아연하고 "생뚱맞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다니! 그런 것도 있었나? 아마도 힌두교/불교 등 타종교인들은 아..물론 그렇지, 환생이나 윤회를 말씀하시나 보다..역시 예수는 도통한 위대한 구루/스와미이시다! 할 겁니다. 그러나 천만예요!

주님은 여기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하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중생 개념은 이미 구약 때부터 간접적/부분적으로 비쳐진 개념이지요. 

"그대(샤울)에게는 주/야웨님의 영이 힘있게 내리실 테니 그대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게 되고, 딴 사람으로 바뀔 것이오."(구약 슈무엘A=삼상 10:6)

"..그가 슈무엘을 떠나 몸을 돌릴 무렵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바꾸셨고 그날 그 표징들도 다 이루어졌다."(슘A 10:9)

분명히 하나님은 샤울을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세우시기 앞서 샤울의 마음이 새롭게 바뀌길 원하셨고 슈무엘을 통해 이 사실을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중생개념의 구약적/원시적 그림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당시엔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 속에 내주하시지 않으셨으므로 아무래도 변화의 지속성에 한계가 따랐고, 인간의 마음 먹기에 따라 다시 돌변할 수 있었습니다. 샤울이 바로 그랬는데, 그는 이처럼 좋았던 초기의 변화와는 달리 불순종을 저지른 뒤 훗날 사실상의 차기 왕위 계승자인 다윗을 질투하면서 악령에 사로 잡혀 몇 번이나 살인기도를 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구약 대언자를 통해서도 인간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고하셨습니다(에제키엘 11:19, 36:26 참조). 그런데 이 예언은 성령강림절에야 비로소 이뤄집니다.

즉 구약 때부터 그림자로 비쳐져 온 중생 개념이, 참된 의미의 신약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성령시대/교회시대가 시작된 오순절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니코데모가 참 라삐라면, 이 정도의 개념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었어야 했을 터입니다. 그러나 실로 그는 금시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몇 말씀을 하신 잠시 후, 그에게 물으십니다.

"그대는 이스라엘의 한 스승이면서도 이런 일들을 깨닫지 못하오?"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