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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마 25:14-46] 우리의 믿음을 고민해 보자(김동열)


마태복음25장14절-46절말씀


뭔가 좀 이상하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이신칭의' 교리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요3:16)는 말씀을 안다면,
오늘 주님의 두 비유는 기독교의 기본중의 기본교리와 대치하는 듯 보인다.

달란트 비유에서, 충실한 종과 무익한 종의 구분 기준은 행위의 결과이다.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도 작은 소자를 섬겼는가의 여부이다.

그렇다면 말씀이 서로 상충되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대한 우리의 오해인가?

교회는 오랫동안 믿음과 행위를 구분해 왔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행위와 의식 중심의 구원관에
반기를 들고, 이신칭의의 교리를 강조했다.

물론, 믿음의 개념에 행위의 의미(약2:22)가 담겨 있다.
카톨릭의 행위 중심 구원 사상을 거부하면서,
믿음 중심의 구원관에 행위를 곁들이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에 혼돈과 약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문제였다.

자연스럽게 믿음과 행위의 싸움이 되었다.
‘이신칭의’ 교리는 ‘행위 구원’설을 반격하고 자체를 방어하는 과정
가운데 차츰 체계화되었다.
이후로, 이신칭의의 교리측에서 행위를 거론하는 것은 ‘인본주의’로
철저히 거부당해왔다.
동시에 성화와 영화로서의 구원은 약화되었다.

칭의적 관점에서의 믿음은 확고해졌지만,
칭의 이후 삶의 관점에서의 믿음은 도외시 되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오늘 본문말씀을 대하는 것은 거북하다.
실제로 이해할 수 없다.
이신칭의 교리와 정면 충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살아있는 믿음은 행위가 동반됨을 말한다.
살아있는 믿음은 반드시 열매가 열린다고 본다.
따라서 주님은 지당하시다.

열매가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셔서 말라버리게 하신다.
기름은 없이 등만 들고 있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신다.
이문(열매)이 없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어두운 바깥으로 내어 쫓으신다.

열매가 없는 이들은 믿음 자체가 없다고 보시는 것이다.

오늘 임금이 오른편쪽으로 세운 양들은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는 자들이다.
주님께서 믿음에 대한 관점을 명확하게 밝혀 주시는 기막힌 장면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주님께서 보시는 믿음의 관점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이것은 행함이 있기 때문에 믿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행함이 따르는 것이다.

주님께는 '머리로만의 믿음'은 없다.
'입으로만 외치는 믿음'도 없다.
원한다면, '죽은 믿음도 믿음이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에 관하여 말씀과 말씀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온전한 믿음을 설명한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사도 야고보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