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모세오경

[창 26:14b-22] 평화의 사람 (이짜크의 삶의 도전과 번영4)

평화의 사람
- 이짜크의 삶의 도전과 번영(4)


바탕본문: 창세기 26'14b-22

 

영어에 '피스메이커'(peacemaker)라는 말이 있지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화해자 또는 "평화 나눔이" 정도로 옮기면 좋을 말입니다.

세상에도 피스메이커로 인정 받거나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세속적인 피스메이커는 성경적인 진짜 피스메이커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해 봅니다.

세상의 피스메이커는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중재하여 평온을 이룹니다.
예를 들면 유엔-국제연합이 있습니다. 그들의 로고에서도 평화를 상징한다는 종려가지를 사용하듯, 국제적인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평화란 것은 일부의 희생을 불사하고라도 적정선에서 공통분모를 찾아 타협하는 정치사회적 평화이지, 영혼까지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평화가 아니죠.

고대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것을 누렸습니다만, 그것은 황제의 군대가 군소 타국을 정복한 뒤 대국으로서 모든 복합민중이 얽히고 설켜 지내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평화엔 으레 정복이, 정복엔 전쟁이 늘 전제됐지요. 그리고 노예들은 여전히 노예로서 살아갔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평화는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내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히브리 족장, 이짜크(이삭)는 그런 평화의 예표라고 할까요..그런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기로, 이짜크란 이름 자체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만약 맨날 성을 내면서 주변에 불화를 조성하고, 분노와 츠러블, 두려움과 눈물만을 자아낸다면, 이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일 터입니다.

이짜크의 생애를 보면, 과연 이름답게 살아 간 사람입니다.
그는 온유와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받잡고 모리아 산에서 그를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그에게선 '젊은 날의 반항 정신' 따위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위 바탕본문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은 이짜크의 이런 평화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냅니다.


이짜크가, 자신이 한동안 우거하던 게라르-펠레쉩 땅에서 거부가 되자, 게라르 사람들은 그를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저 '넘'이 우리 땅에서 부자가 됐다..이젠 좀 도로 빼앗아야지."

게라르 사람들은 게걸스럽고, 옛말로 '거염'이 많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앓이를 하는 따위의 시기심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생존 시 그 종들이 애써 파 놓았던 우물들을 돌아 다니며 모조리 메워 버립니다.


자..이거 심각한 문제이죠. 큰 도전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열대성 기후의 광야 지대라 예로부터 물이 귀합니다. 더욱이 양들을 먹이는 유목민/목축업자/목양자들에겐 요르단 같은 강물이나, 이른 비와 늦은 비 등 우기 때의 '반짝' 냇물, 땅 속 깊은 우물 등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물론 가축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유목민의 수많은 양떼와 소떼들이겠습니까.
시 23편 말씀처럼 양떼에겐 잔잔한 물가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우물은 생존과 직결된 필수적 도구입니다.
유목민은 가는 곳마다 우물부터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런 광야 지대에서 우물을 더 파도 모자랄 텐데, 애써 파 놓은 우물을 모조리 메워 버리다니 얼마나 고약한 심보입니까! 과격한 사람이라면, 그런 짓거리를 한 사람들을 '능지처참'해도 시원치 않을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는 타국인 게라르 사람들이고, 혈기를 내어 다퉈 봐야 별 소득 없는 노릇입니다.  
비록 과거 이 지역의 명사요 유지인 아브라함이 종을 통해 팠어도, 지금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서 큰 소리를 쳐 봤자일 것입니다. 

그즈음 게라르 왕 아비멜렠은 이짜크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떠나 가오. 이젠 그대가 우리보다 강성해졌으니까."


이짜크는 두 말 않고 그곳을 떠나 국경 너머 게라르 골짜기로 향합니다.

하지만 즉각 물이 필요하기에, 새로 옮겨 온 골짜기에서도 옛 우물들을 다시 파 헤쳤습니다. 이 우물들 역시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게라르 사람들이 히브리 족의 목축업을 방해하려고 메웠던 것들입니다.
이짜크는 다시 판 우물들을 아브라함 당시 붙였던 이름으로 다시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물을 파헤치던 종들이 계곡에서 큰 샘줄기 즉 수원 하나를 발견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뿐..게라르 목자들이 나타나 시비를 걸면서, "이건 본래 우리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짜크는 그 우물을 '에셐'(다툼)이라고 불렀습니다.

기가 막힌 이짜크의 종들은 "뭐, 우물이 거기 뿐이겠냐?"며 주변에다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게라르 목자들이 나타나 시비를 걸며 역시 자기네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이짜크는 그 우물의 이름을 '시트나'(비난/적대)라고 짓고, 그 곳도 그냥 놔 두고 떠납니다.

물이 모자라 사람과 가축들이 목마르기에 종들은 서둘러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이번엔 게라르 목자들이 거리가 더 멀어 귀찮아졌는지, 벼룩도 낯짝이 있어선지, 찾아 오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말 없이 계속 양보하는 이짜크에게 게라르 목자들이 모종의 충격과 감동을 "먹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늘 민간 정보에 "빠삭한" 게라르 왕 아비멜렠이 말렸는지도 모릅니다.


이짜크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 우물을 '레호봍'(넓은 곳들)이라고 이름 짓고, "이젠 하나님이 우리의 땅을 넓히셨다. 우리가 땅에서 번성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번성한다는 말은..
be fruitful 즉..
열매 맺다, 수확하다, 번창하다, 형통하다, 왕성해지다, 씨 또는 자손을 얻다..
등의 뜻이 고루 담긴 말입니다.

먼 훗날 유대 지족 지도자 야베즈는 이짜크의 이 고백을 닮은 간구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오, 내게 복으로 복 주셔서 나의 영역을 넓히소서!" (연대기A=역대상 4'10a 사역)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이 땅을 몫으로 차지하리." (마태복음서 5'5)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번성케 하시고 영역을 넓히시리라는 고백/선언을 할 필요가 있지요.


이처럼, '웃음의 사람' 이짜크는 우겨대는 적들과 다투지 않고 너그러움과 참음, 양보의 미덕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이것이 이짜크의 삶의 성공의 비결의 하나였습니다.
나중에 아비멜렠은 "참으로 그에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과연 복 받은 사람이구나"라고 깨닫고, 화해를 청해 옵니다.

이짜크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절로, 제 발로 화해를 청해 오게끔 만드는 사람-그것이 참 피스메이커가 아닐까요.
그런 권능적인 참된 평화는 위로부터 내려 옵니다.

사실 이짜크의 이런 평화의 모습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그가 배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이 조카 롵의 종들과 다툴 때 편 들지 않고, 다툼을 바라지 않았기에 조용한 분리를 원하여, 롵에게 먼저 지역 선택의 우선권을 주어 롵이 선택한 비옥한 땅-소돔/고모라로 가게 놔 둡니다(13'5-13 참조).   

그렇다고 해서, 이짜크가 마냥 모든 걸 양보만 하고 전혀 챙길 것을 챙기지 않는, "물러 터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리가 분명하게, 따질 것을 따지는 면모도 보입니다(26'27). 이 역시, 아브라함에게서도 엿뵈는 모습이지요(21'25).


평화라는 큰 미덕엔 온유와 인내도 연계됩니다.
갈라티아서 5'22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서, 사랑/화평/인내/온정(자비)/온유 등이 모두 서로 결부됩니다.

 
우리는 관용과 양보, 인내를 하더라도, 한 가지 결코 양보할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게 있으니, 그건 곧 성경 진리 이슈입니다.
진리는 결코 타협할 성질이 아니지요!

진리를 타협하면, 그건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처럼 평화도 오직 진리 안에서 참될 뿐입니다.


성경은 유일한 참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님이 곧 평화의 군주(사르 샬롬: 곧 '평화의 우두머리')라고 선언합니다(예샤야후=이사야서 9'6). 오직 그 분이 주시는 평화/평강/평안만 참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샬롬(=그리스어 '에이레네')을 내가 그대들에게 남겨 두오.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것은 세상의 것과는 같지 않소. 그대들은 맘 속으로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오." (요한복음 14'27)

흥미롭게도 샬롬은 히브리어로 잘됨/번영과도 같은 뜻입니다.
즉 모든 좋은 것들은 주님의 샬롬으로부터 옵니다.


티엘티 독자들은
평화와 인내로써
삶의 영역을 넓혀 가며
번성해 나가기를~

주 예수님의 전능한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