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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자살은 옵션?




대학 동기들 중 유일하게 자살한 친구의 얘기를 요 얼마 전 전해 들었다. 지체가 하나 없는 장애인이었지만,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겉보기엔 딴 유형의 장애인들에 비해 학창의 삶에 큰 지장은 없는 듯 했다.  물론 내적으로는 장애인들에게 공통된, 또는 개인적인 예외 없는 특수 갈등을 겪다 보니 성격이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런저런 갈등이 쌓여 '막다른 상황'까지 치달았을 수도 있다. 크리스천에다 사역자가 자살까지 한 것을 보니. 


그런데도-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지만-자살자는 어떤 핑계도 할 수 없다. 남에게 목숨을 앗기는 것도 섧다지만, 스스로 목숨을 앗는다는 것은 아름답고 용감하고 장한 게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자타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주변상황이 극한적이어도 스스로 목숨을 앗는 극한을 연출하는 극한상황까지 자신을 몰고 가선 안된다. 그러기에 남더러 "죽어라, 뒈져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나 진 배 없다. 


'자살할 용기'는 참 용기가 아니다. 오히려 자살욕구를 극복하고 삶에 당당히 부딪쳐 보는 것이 참 용기다. 그런 용기가 없다면, 자살을 기도했던 그 실험(?) 정신으로 실험적인 삶이라도 더 살아봄직 하다. 

"오죽하면 그랬으랴" 하고 자살자에게 동정은 가지만, 그렇다고 자살까지 동정할 순 없는 문제다. 자살한 남을 동정하다 못해 남의 자살까지 동정하다 보면 나도 자살을 동경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살은 막다른 상황에 부딪친 사람의 '마지막 선택'일 수가 없고, 그래선 안 된다. 그것은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옾션'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이나 타살이나 어차피 목숨 빼앗기, 사람 죽이기는 마찬가지 상황이다. 남이 나를 죽이기나 내가 나를 죽이기나 죽기는 매 한 가지라는 말이다. 

만약 자살이 옾션이라면 남이 남을 죽이는 상황도 '옵션'이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역사 속에는 그런 옾션을 저지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자타의 잘잘못을 잘 가릴 수 있어야 한다. 무턱대고 남을 잘 했다고 하는 자신부터가 다 잘 하는 게 아니다. 신약시대는 어떤 살인에도 당위성 같은 것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정당방위'를 위한 타살을 논하곤 하지만, 어떤 사도나 성도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을 죽인 예가 없다. 아울러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앗기 위해 순교에 나선 것도 아니다. 실제의 자살을 순교로 미화할 순 없는 노릇이다. 



구약 다뷔드(다윗) 왕 시대의 천재적인 전략가 아히토펠의 자살을 생각해 본다. 그는 새 '왕' 압샬롬을 위하여 온갖 계략을 제공했지만, 황당하게도 다뷔드를 돕는 사실상의 스파이나 다름없던 하나님의 사람 후샤이의 전략이 채택되고 자신의 기막힌 모략은 수포로 돌아감을 보자, 낙향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결국 압샬롬도 망한다. 

 

모든 상황이 마치 저주받은 듯 보인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아히토펠이 끝내 자살하기를 바라셨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뉘우칠 기회가 또 다시 주어진다. 저주 받았다고 판단되어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절대주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샤울 왕, 아히토펠이나 이스카리옽(가룟) 유다의 자살도 절대주권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의 목숨이라도 뺏기를 즐기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뉘우치고 살아주길 바라신다. 아니, 살아남아 제2의 기회를 찾아주기를 바라신다. 


막다른 골목은 자살을 위한 골목도, 자살을 자아내는/짜내는 골목도 아니다. 막다른 골목은 약자와 비겁자의 삶 회피의 골목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진정한 강자로 살아남는 골목으로 삼아야 한다. 이 말은 참 순교를 할 기회까지도 피하라는 뜻은 아니다. 순교는 의도가 숨겨진 은밀한 자살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 아래서의 피살이어야 한다.    



오늘날 문명국가일수록 자살자가 많아진다고 한다. 화려한 연예인들의 흔한 자살과도 통한다. 복권 당첨자의 대다수가 흥청망청 살다가 다시 비참해진다는 상황과도 부분적으로 일맥상통한다. 인기가 치솟고 돈도 많아지고, 자연히 씀새도 마구잡이가 되어가고 몸도 마구 굴린다. 주변상황이 워낙 너무 잘 돌아가다 보니, 혹 뭐가 하나 안 되면 모든 것이 안 되어 보이고, 급기야는 다 안 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되는 목숨을 스스로-자기 방식으로 챙기려 한다. 


알고 보면 이것은 인간 상대로 즐기는 마귀의 전형적인 장난이고 게임이다. 마귀가 가장 즐기는 게임이 "인간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 넣고 목숨 앗아 지옥 보내기"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그 대상이다. 예외가 없다. 그 게임에 희생되고 안 되고는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그 희생을 옾션으로 삼아선 안 된다! 참 순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귀의 희생물은 억울한 희생물이지, 거룩한 희생물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 살자! 되도록 오래 살아남자!

자살은 생각지도 말고 영원히 내 것으로 삼지 말자.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여기지 말자.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예호바(여호와)님의 행적을 선포하리!" (시 118:17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