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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좋은 발성을 위한 몇 귀띔 <2>

좋은 발성을 위한 몇 귀띔 <2>


좋은 몸 자세는 발성의 기본

김삼

좋은 발성은 좋은 몸 자세와 좋은 호흡을 전제로 한다. 발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선 자세의 문제도 이내 발견된다. 쉬운 예로,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사람에게서는 바람직하고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사항은 합창연습 때 전반적인 몸 자세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 있는 대로 편한 자세를 취하고선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다! 연습 때는 실연주 때보다 기분만 약간 느슨하고 여유로울 뿐, 몸 자세는 연주 때에 준하든지 대등해야 한다.

서서 노래하는 자세로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어깨너비 정도로 양발을 벌린 위치에서 팔을 위로 쳐 들어 자연스럽게 내린 채 한쪽 발을 약간 앞으로 내민 상태. 이때 등은 똑바로 벽에 기댄 형국이며, [몸을 지탱할 정도의 발힘과, 복식호흡을 위해 숨을 들이 마실 때 팽팽하게 버티는 배와 엉덩이를 제외한] 모든 몸 부위에서 힘을 빼야 한다. 특히 턱과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유의해야 한다.

연전에 어느 중창단 연주회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여유롭고 순탄한 매너와 발성이 무난했지만, 한 가지 매우 실망스런 점이 있었다. 모든 단원들이 앞에다 스탠드를 놓고 악보를 보며 노래하는 것이었다. 단원들의 용모가 더 중요했는지 스탠드는 상당량 아래 쪽으로 내린 채였다. 처음엔 현대적인 중창 '스테이지쉽'을 위한 하나의 패션(?)이려니 생각했는데 끝까지 그러고 있었다.

이럴 경우 스탠드 위 악보를 내려다 보려면 눈이 내려가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내려가게 돼 발성에 무리가 온다. 정기연주회라면, 최소한 그 날 부를 (대곡을 제외한) 일반 성가곡들만큼은 모두 암기하고 전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연주해야 옳다. 아마추어 중창단인 데다 이민생활에 바쁘다 보니 악보 외울 겨를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년에 한 두 번 하는 정기연주회를 위해서조차 악보를 외우지 못한다면 정성이 부족한 것이다.

대곡을 위해 악보를 볼 경우라도 좋은 발성을 위해서는 스탠드를 쓰지 않는 것이 이상적이다. 스탠드를 꼭 써야겠다면, 얼굴이 보일 정도로 눈 바로 부근에까지 최대한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합창단이나 찬양대의 연주 때 악보를 보려면, 악보를 쥔 손을 가급적 위로 올려 악보 꼭대기 선이 지휘자의 웃몸 동작을 간신히 볼 정도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접힌 팔꿈치를 옆구리에 근접시키는 것이 좋다. 단 몸통에 갖다 대면 역시 발성에 방해가 된다. 그것이 지휘자와의 교감과 자연스런 발성에 유리하다.

노래를 할 때는 고개를 쳐 들기보다 사진 찍을 때처럼 눈이 정면을 본 상태에서 고개를 약간 숙이는 것이 발성에 유리하다. 그 이유는 첫째, 소리의 초점을 모아 인중 바깥 방향으로 '투사'해주기 위함이며 둘째, 약간 고개를 숙여 입을 벌린 상태에서 성대의 방향이 정면을 향하기 때문에 소리의 전방발사에 유리하기 때문. 이 자세는 특히 음량을 요하는 포르테/포르티시모 발성에 필수적인 자세다.

일부 발성 전문가들은 (발음이나 조음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아래 턱을 길게 내려야 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데 거의 동의하는데, 같은 맥락의 얘기다. 그러나 굵은 목소리를 내려고 목을 마구 눌러 발성에 영향을 주면 오히려 해롭다. 그렇게 해서 잘못된 발성 버릇과 소리를 기른 앨토나 베이스를 흔히 본다. 인위적 요소가 많을수록 음악적인 소리가 안 난다.

앉아서 노래를 부를 때는 반드시 허리를 펴고 의자 등판에서 등을 떼야 한다. 특히 연습실의 합창대원들에게 주는 충고다. 이것은 엎라잇/스피넽 등의 피아노를 설치할 때 뒷면을 벽에서 떼어 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소리통 즉 공명강이 제대로 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등을 의자에 대고 있는 대로 편한 자세를 취하면, 몸통의 공명이 되지도 않거니와 금방 목소리에 무리가 간다. 장시간 정식 연주를 할 때보다 연습 때 쉽게 목이 쉬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되풀이하는 잔소리 같지만, 좋은 발성은 우선 좋은 자세에서 온다! 이 중요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 일이다.

평시 훈련과 컨디션

사람마다 기본적인 바탕소리는 갖고 있지만, 때와 환경, 몸 상태에 따라 소리가 변할 수 있다. 오래 전, 지금은 한국 음악계에서 활약하는 유명 소프라노에게 이른 아침 전화를 걸었다가 적지 아니 놀란 적이 있다. 꾀꼬리 같은 목청, 옥접시 위를 굴러가는 은방울 소리를 기대했는데, 그지없이 탁하고 메마른 저음으로 응답하는 것이었다.

성악을 부전공한 필자도 경우에 따라 음역과 음질이 달라져 이를 노래에 활용하는 때가 있다. 평소에 못 내던 낮은 저음으로 충분히 내려가 베이스바리톤 같은 소리를 내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 '하이C'의 테너 음이 괜찮게 날 때도 있다.

이것은 훈련에 따라 개인의 음역이나 음폭, 음량을 최대한 활용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간접적인 얘기가 된다. 그만큼 훈련이 중요하다. 친구 목회자 한 사람은 과거 성악공부를 하던 시절, 파바로티의 '하이C' 보다 4도 높은 음까지 자유자재로 냈다. 그의 '비결' 중 한 가지는 역기를 든 채 구부린 자세로 발성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성악가 P 모 씨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좀 위험한 방법이다.

아무튼 좋은 발성엔 끈기 있고 센스 있는 훈련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교훈이다. 약간 허스키인 듯한 매력이 일품인 20세기의 대표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도 한국 리사이틀 때 하루 여러 시간을 연습했다지 않은가. 물론 나이에 비해 무리였지만.
요즘 교회에서는 발성연습 광경을 보기가 어렵다. 최소한 20분씩이라도 하면 별 손해 볼 게 없는데도 말이다. 이래저래 바쁜 교회 일정의 틀 속에서 쫓기는 성가 연습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합창발성 얘기

영국 킹스칼리지 대학 합창단 같은 정련된 목청을 들어 보면, 통일돼 있으면서도 개성을 존중하는 소리임을 느끼게 된다. 강압적인 훈련으로 사람의 기를 죽여 통일된 소리를 내는 방법도 있고, 개인의 개성을 되도록 살려 주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소리도 있다. 아무튼 연습과 훈련이 중요하다.

그런데 합창과는 영 조화가 되지 않는, 너무도 독특한 소리가 발견되곤 한다. 이를 테면 바이브레이션(비브라토) 빈도가 너무 다르다든가 조금만 소리 내도 표가 나는 희한한 음질 등이다. 필자는 바이브레이션의 경우 1초에 4회 진동이 바람직하다고 교수에게 배웠다.

그런 독특한 소리는 전체에 조화되는 소리로 용해되고 독특한 소리는 절감 내지 희생돼야 한다. 그럴 의사가 없다면 합창단을 떠나야 한다. 차라리 독창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도 있다. 대학 시절 필자는 합창 지도교수인 은사의 권고로 성부를 테너에서 베이스로 바꿨다. 테너로서는 너무 튀어나 고음 합창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부지휘자로 연주회 전 파트 합창지도를 시킬 때도 베이스 파트를 맡아 했다. 테너를 선호했던 필자는 한 때나마 은사를 원망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바른 결정이었다고 판단돼 고마웠다.

가장 이상적인 발성은 방언에서

좀 빗나가는 얘기지만, 인간의 목청의 한계는 초자연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방언으로 하는 '영적 찬양'이 그것이다. 저자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방언으로 말했다'란 책의 서문엔 방언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목청으로 찬양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사실이다.

필자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적 찬양'을 하곤 하는데, 뱃속 밑 바닥에서 우러나는 듯한 신비로운 소리가 머리 끝까지 올라 가면서 상상도 못할 저음과 고음을 오 가는 초자연적 발성이 나곤 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신령한 노래'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비주의적'이라고 볼 지 몰라도 기독교와 성경 자체가 신비다. 교회 자체가 신비다. 그러니 그 지체들이야 오죽하랴.

그런데 방언 노래의 발성은 비 클래싴보다 클래싴 발성에 더 가깝다. 그것이 필자가 얻은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