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
교회음악 분야의 종합적 논단이어서 길므로 목차를 따라 전개한다.
독자들은 물론, 교회음악인들에게 도움되길 바라 마지 않는다.
들머리
미학과 감동
합창곡 사례
프레이징(악구법)과 발음법 이슈
리듬 표현 기법과 감동
셈여림과 과장
스타카토 주법의 독특한 감동
부록: 메이슨 작곡가들과 감동
결론: 무엇이 참 감동과 영감인가?
들머리
합창은 가사가 있으므로 단순 음악인 기악과 달리 시간예술과 언어예술의 조화이다. 또 기악과는 달라 여러 사람의 음성의 조화이므로 지나친 기계적 테크닠과 무리한 표현을 남용하는 운영은 피하는 게 좋다. 물론 곡과 레퍼토리의 분위기에 따라 가사 내용보다 테크닠적인 곡이 한 두 곡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집중 연습을 더 하면 된다.
찬양합창 음악은 성도들 가운데서 음악적/성악적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따로 선정되어 훈련을 받아 하나님께 대한 영광돌림, 경배/찬양의 기능과 함께 음악/가사를 통해 성도들의 찬양정서 함양 및 가르침의 역할을 하는 기독교음악의 백미다.
그러나 유의할 것: 합창음악은 일반회중을 소외시키면서 귀족화 되면 안 된다. 카톨맄 합창음악의 문제가 그것이었다. 오늘날 신교계 일각에서 카톨맄 미사곡을 연주하는 현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회중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고, 회중 없는 찬양대란 무용지물! 그래서 찬양합창곡은 지나치게(!) 음악적/예술적/미학적/기교적/인위적이거나 가사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나거나 가사전달이 모호하거나 해선 안 된다. 회중과의 아우름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회중과 한 마음이 되도록 힘쓰는 합창이 바람직하며 다 함께 하나님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찬양/성가곡 합창은 무엇보다 성경구절을 활용한 가사를 최대한 살려야 옳다. 그래서 지휘자는 무엇보다 선곡에 있어 하나님과 회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절대원칙을 고수해야 옳다.
곡이 아름답고 시가 문학적이라고 해서 다 좋은 음악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거듭난 작가들, 그중에서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작곡가/작시자가 영감 속에서 쓴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런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게 사실이다. 한도가 있다. 그래서 영감스런 곡이든, 덜 영감스런 곡이든 연주할 때마다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성령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찬양대란 존재가치가 없다!
미학과 감동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합창음악에서 예술과 미학을 빼 버린다면 문제는 크다.
예술 없이 합창음악 자체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 여러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뤄야 하는 합창음악엔 안팎의 규범이 필요하며 그 노옴(norm)의 일부가 기법과 예술이다. 예술은 창조성만 있어서도 안 된다. 질서와 통일성-아우름이 있어야 한다. 뒤죽박죽인 것은 '혼잡의 예술' 즉 잡예(雜藝)일 뿐이다.
합창예술은 지휘자와 수많은 대원들이 함께 한 맘 한 뜻-일심동체 내지 혼연일체-이 되어 예술적 차원에 이르는 성악이지만, 찬양합창은 그보다 더 높이, 한 맘 한 뜻으로 영적 차원을 이뤄 나아가는 단계까지 바라본다. 그러므로 찬양합창에서의 예술적 배려는 밑받침이고 기본적인 것이다.
오래 전..필자로선 퍽 존경하던 은사 중의 한 분인 설교학 교수와 교회음악 이슈를 놓고 가벼운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그분은 자신의 고집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다분해, 제자인 필자가 대강 양보했기에 간단히 어정쩡하게 마무리된(?) 사건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좀 아연했다. 구약시대 레비족 성전음악인들은 밤낮 성전 골방에 머물러 늘 공교로운(skillful) 연습을 했다. 오늘날 찬양에도 되도록 그런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 그러나 그 교수는 할머니의 흥얼거리는 듯한 찬송가로도 얼마든지 '은혜'를 받는다는 전제 아래 예술적 가치를 사뭇 폄하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공교로움'이란 낱말에 모종의 거부감을 갖는 것 같았다. 물론 이해는 한다. 그러나 이쯤 되면 찬양대와 교회음악인, 음악적 은사와 재능, 음악교육과 연습 등이 왜 필요한지 의아스러워진다. 하나님은 왜 예술인과 음악인을 내셨는지? 그리고 '은혜', '은혜로움'이란 게 뭔지도 바로 판단해야 한다. 신본주의적 은혜인가, 인본주의적 은혜인가? 은혜 받기 위해선 모두가 흥얼거리는 할머니여야 하는가?
합창예술은 특히 성악이므로 음악과 문학의 두 분야가 결합된 일종의 종합예술이다. 고도로 정제된 시적 표현과 역시 고도로 훈련되고 정제된 음악적 표현이 만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합창은 가사의 바른 투사(projection)와 음악의 예술적 표출이 조화돼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선 기본적으로 발성이나 울림소리와 어울림이 안 되면 합창 자체가 이뤄지지가 않는다!
더 나아가 찬양합창은 성경말씀 즉 복음을 내용으로 하기에 더더구나 가사 표현은 중요하다. 성도나 비신자가 진리 전달을 제대로 받아야 쉽게 한 맘을 이루기 때문이다. 물론 성령께서는 경우에 따라 가사를 이해 못하더라도 음악만으로 공동영감을 받을 수 있게 이끄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늘 상례는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며..방언도 통역이 필요하다.
합창은 독창과는 물론 다른 성격의 성악이다. 진동수가 서로 다른 소프라노/앨토/테너/베이스 등의 목청들이 한데 어울리기 때문에 그만큼 통제가 쉽지 않다. 어린이 합창의 경우는 대체로 평준화된 울림소리로 파트만 나눠 하게 된다.
더욱이 찬양합창은 단지 조화만도 어려운데 예술적/영적 차원까지 끌어 올리기란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을 절대로 필요로 하게 된다!
합창곡 사례
베토벤의 '하느님(신)의 영광'이란 곡이 있다. "저 하늘이 주의 영광을 선포하고.."란 시편을 가사로 원용했다. 장엄한 분위기이지만 대위법적 배려가 전혀 없이 화성 중심(homophonic)으로만 진행된다. 그런 곡일 경우 전체 4성부의 균형이 깨지지 않는 한도로 멜로디를 되도록 살려 줘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지 못한 연주를 자주 발견한다. [이와는 달리 푸가(fuga, fugue)처럼 고도로 대위법적인 폴리포닠한 성부별 활성 음악일 경우 각 성부가 멜로디 역할을 한다.]
합창음악에 있어 가락/멜로디와 그 아래 나머지 소리의 선명한 구분은 하나의 기본규칙이다. 멜로디는 두드러져야 한다.
미국 기독교계 라디오에서 흔히 듣는 남성중창곡들을 들어보면 정말 귀와 머리에 익은 곡이 아닐 경우 어느 파트가 멜로디인지 도대체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잦다. 멜로디를 맡는 파트가 중간에 바뀌더라도 그렇다. 비록 여성이 배제된 남성 중창/합창 음역의 실(實) 옼타브 폭이 제한된 점을 고려하더라도 멜로디 밖 성부가 음량이 유난히 두드러지면 그렇게 돼버린다. 베이스가 목청이 굵다고 해서 무조건 크게 내면 좋지 않다.
전술한 베토벤 곡의 경우 웅장한 앞 부분 후에 조용한 중간 부분에서, 마치 수면으로 내려 앉는 물새와 그 그림자가 서로 만나듯, 여성 성부는 음정이 낮아지고 남성은 반사적으로 높아진다. 이런 것을 화성학/작곡기법 상 '서로갈림'(반진행)이라고 한다. 이때 테너/베이스 등 남성 파트가 음량을 최소로 줄여주지 않으면 소프라노/앨토 등 여성이 상대적으로 확 "죽어" 버린다.
일반적으로 앨토/테너 등 두 내성부는 소프라노나 베이스-두 외성부보다 인원수가 적은 것이 통례지만(지휘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요즘은 소형교회 증가와 평균화에 따라 성부별 인원에 제한 받는 찬양대도 늘고 있는 만큼 전천후적 구성과 훈련도 필요하다. 물론 인원 확보를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지만.
그럴 경우 싱어 인원이 많은 성부들이 전체적 음량을 줄여 주는 것이 소수인 성부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보다 훨씬 낫고 안전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웹 동영상, 텔레비전 등에서 자주 접하는 한국 교회 찬양대를 보면 흔히 고도의 음량 효과를 노리곤 한다.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때는 왔다"는 양 소리를 내지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바람직한 이상적 발성이 아니다.
모든 성부는 무리 없이 부드럽게 불러야 한다. 높은 소리는 무조건 커야 한다는 발상이 잘못이다. 작곡가들도 생각 없이 고성에서 포르테 기호를 남용해 거의 '초인적'인 음량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포르테/포르티씨모는 무리 없이 올라갈 수 있는 음역에 제한하는 게 바람직하다. 만약 곡이 한계 음역 너머 최고성의 최다 음량을 요구할 경우 지휘자가 차라리 옥타브 아래 또는 화성 안의 딴 위치로 옮겨 임시 편곡하는 것도 괜찮다.
프레이징(악구법)과 발음법 이슈
곡 길이의 기본단위인 마디가 둘 이상 이어진 소악절, 소악구 등이 프레이즈 즉 프레이징(phrasing)의 단위가 된다. 그런 부분의 처리기법은 지휘자의 경험과 역량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악곡을 배울 때는 전 단원이 첼리스트 요요마처럼 한 마디씩 꼬박꼬박 외우며 해 나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정작 중요한 건 각 프레이즈의 끝마무리.
찬양대/합창단에 따라서는 소악절이 끝나는 숨자리, 쉼표로 끊는 자리에서 두부를 칼날로 깨끗이 썰기보다 손날로 짓눌러 자른 듯 말끔하지 못한 처리가 잦다. 오르간 건반에 비유한다면, 곡의 쉼표나 휴지부, 또는 찬송가의 호흡 자리에서 모든 손가락들을 한꺼번에 동시에 떼지 않고 일부 손가락을 남겨둬 흐트러진 소리가 나는 듯한 경우다.
진정한 음악의 맛은 음보다는 쉼에 있다는 말이 있다. 물 흐르듯 하던 노래가 쉼표로 잠시 끊는 부분은 그야말로 음악의 묘이고 무늬의 테두리 내지 이음매와도 같다. 노래를 진행해 나아가는 것은 어느 찬양대/합창단이나 대체로 무난히 해낸다. 관건은 중간에 어떤 모습으로 쉬느냐는 것. 흐트러진 '모습'인가, 말끔한 쉼인가?
느린 곡의 쉼표 없는 장음의 경우 어디서 쉬어야 하는가? 마디당 3박자 곡인 경우 |하나/두울/세엣|에서 세엣의 -엣을 최소로 잘게 쪼갠 끝 부붙에서 쉬어야 바람직하다.
끊지 말아야 할 곳에서 끊는 경우도 마찬가지. 물론 지휘자가 정확한 큐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 소리를 끊는 연습이 중요하다. 숨을 쉴 때는 정확한 위치에서 거의 표시 나지 않게 쉬는 방법이 바람직하다. 그러려면 물론 평소의 발성연습에 곁들여 호흡조절 연습도 요구된다.
곡에 따라서는 숨쉬기를 별로 배려하지 않고 장음을 계속 끌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해당 파트를 적당히 갈라서 교대로 숨을 쉬고 잇게 해야 한다. 물론 소리의 음량에 지나치게 변동이 생겨 표시가 나면 매무새는 안 좋다.
프레이징은 또한 곡의 악상/분위기/속도에 맞게 해야 한다. 그것이 정서에 호소하는 역할이 꽤 민감하다.
오래 전 필자의 모교에서 찬양합창대회를 개최했을 때다. 한 유명 교회의 찬양대는 모짜르트의 비교적 빠른 곡인 '영광스럽다 주님의 이름'을 프레이즈를 완벽히 한답시고 박자수대로 충실히 꼬박꼬박 끌다가 뛰어난 소리에도 불구, 아예 등수에서 제외된 적이 있다. 곡 해석 상의 실수다. 빠른 곡은 자연히 박자수가 짧아지게 마련이다. 길게 늘일수록 곡의 분위기가 죽는다.
그런가 하면 같은 모짜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의 경우 속도에 따라 박자대로 충실히 끌어 줘야 묘미가 나는 곡이다. (참고: 곡의 라틴어 가사는 카톨맄 성체성사 교리에 준했고 모짜르트는 헌신적인 프리메이슨이었음)
속도가 비교적 느리고 박자수를 충실히 테누토(tenuto)로 끌어줘야 하는 경우는 4박자 곡인 경우 각 박을 하나/두울/세엣/네엣으로 나눠 세면서 '에+ㅅ'까지 충실히 처리한다. 느린 곡은 프레이즈에서 숨을 쉬는 순간은 끝 박 'ㅅ' 부분의 1/2까지 미분화해 처리할 수도 있다.
자음과 모음의 정확한 발음은 가사로부터 받는 감동의 요건이다.
지금은 곳곳에서 역량 있는 한국인 지휘자들이 양산돼 많이 커버가 되지만 과거엔 자음인 받침 처리가 미흡한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아멘'일 것이다. 아멘은 아무리 짧은 박자이더라도 끝소리 '-ㄴ'(n)이 순간적이면서도 정확한 울림소리여야 한다. 이때 혀가 입천정에 붙고 입은 절반 정도 열린 모습이다.
물론 해당 박타가 길고 느린 곡일수록 이 모습으로 오래 머물게 된다. 그럴 경우 자연히 '-에'라는 앞 모음이 길고 끝 자음 'ㄴ'도 여유 있게 늘려주게 된다. 그런 곡은 어느 음에서 순간 혀를 입천장에 붙인 채 뒤로 울림소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지휘자가 정확하고도 미묘한 큐를 줘야 한다. 연습 부족인 멤버의 경우 큐를 잘못 소화해 'ㄴ'이 아닌 'ㅁ' 즉 허밍에 가까운 소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다른 자음의 받침도 이에 준한다. 단 일부 흑인영가나 캐럴처럼 특수 의음/의성 효과를 위해 받침소리를 스카토에 가깝게 순간 처리할 경우, 짧은 울림소리를 정확하게 내준다.
예를 들면 종소리 '딩'(ding), '동'(dong), '링'(ring) 같은 경우,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ㄷ'(d)라는 첫 자음 후 '-이-'(i)는 짧게 처리하며, 입은 벌리고 혀를 구강 한가운데 머물러 둔 채 'ㅇ'(ng)을 되도록 길게 해 종소리를 실감 나게 흉내 낸다. 이때 모음이 다르더라도 입속 발성의 초점은 언제나 같은 위치다.
동서를 막론하고 음악적 발성/발음은 평소의 말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한글 가사에 나타나는 '응'이나 '음', '은'의 경우, 모음 '으'도, 'ㅇ'도 절반 닫힌 소리이므로 '엉', '엄', '언'에 가깝게 발음한다. 영의 경우 'a'의 발음이 '애'가 될 경우 '아'에 더 가깝게 발음한다.
테크가 강조된 영어 합창곡에 흔히 나타나는 짧은 의성어 감탄사 '험'(hum), 오라는 뜻의 감탄사적 동사 '컴'(come)이나 북소리 같은 '펌'(pum, fum, dum)의 경우도 첫 파열음을 낸 즉시 입만 다물 뿐 마찬가지다. 단, 이때 입속은 되도록 벌려야 울림이 좋다. 이를 위해 허밍 및 그 이상의 연습을 자주 해 두는 것이 좋다. 그런가 하면 조용히 하란 뜻의 감탄사 '허쉬'(hush)는 모음 '-어-'(u)를 제외한 h, sh 등 자음들의 예리한 순간발성이 묘 살리기의 열쇠다.
요컨대 정확한 가사 발음은 감동을 늘려 준다.
리듬 표현기법과 감동
부드러운 서정적 리듬과, 그와는 대립각을 이루는 긴장되고 예리한 리듬은 서로 다른 미적/정서적 감동을 준다. 그 조화와 대립의 묘가 주는 느낌은 무시 못할 힘이다. 요즘은 컨템프러리 경배찬양의 발달에 따라 이음줄로 연결된 미묘한 불규칙적인 당김음 중심, 약박 중심의 곡들이 흔하다. 그런 음악들이 젊은이들의 심리와 정서에 호소하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만큼 전통적 교회음악을 싫어하거나 혐오하게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크리스토의 한 몸인 교회는 '세대차'란 게 있을 수 없다. 그런 게 있어선 안 된다. 기성세대가 선호하는 찬송가는 언제나 불리는 고전이며 더 무게가 있다. 교리적으로도 탄탄하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음악을,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음악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 관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찬양곡도 검증이 필요하다.
가사에 있어서 이상적인 것은 물론 성경적인 가사다. 그 점에서 1980년대 전후에 발달하기 시작한 컨템프러리 '경배찬양'이 부분적으로 공헌한 점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갈수록 관상영성, 떠오름영성에 호소하는 곡들이 급격히 늘고 있다. 가사의 'You'가 인간인지 주님인지 애매모호한 뉴에이지적인 곡들도 급증한다.
더구나 최근 문제영성으로 부각된 신사도운동에 의거한 찬양곡들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소위 '플로리다 부흥'의 기수로 반짝였다가 금세 시든 타드 벤틀리의 뒤를 이어 '부흥'의 바톤을 이어갈 것이라는 더취 쉬츠의 교회에서 발견되는 괴이한 가사들과 난잡한 분위기의 음악들이 그렇다. 과연 그것이 참 교회음악일까? 그런 교회에선 찌온주의(Zionism)의 상징이 돼버린 쇼파르(이스라엘의 양뿔나팔)의 집합 취주도 흔하다.
아무튼..리듬 처리는 일반 교인들은 물론 찬양대원들끼리도 비교적 통일하기 어려운 부분의 하나다. 특히 4/4 박자 곡에서 소위 '깡충리듬'으로 불리는 "따안따"형 [점8분음+16분음]의 경우 부드러운 음악과 행진곡 조의 힘찬 찬송가/성가곡 등에서의 해석이 다소 다르다. (박자표의 2분음표가 단위인 경우의 점2분음+8분음, 기타 박자의 곡에서도 마찬가지다.)
음악은 시간예술이니만큼 원칙 상으로는 앞 음표(점음표)대 뒤 음표의 비율이 3대1이어야 한다.
이것은 이론상의 이상이지만 실제로는 정확하게 맞추기가 극난하다. 비교적 빠르고 힘찬 곡일 경우는 다소 강조/과장해서 4대1, 5대1 정도로 하고 앞음과 뒤 음 사이의 공간을 사실상의 쉼표로 띄어주는 게 거의 상례다. 즉 4, 5는 [소리+쉼표]가 되는 셈이다.
이것 역시 어렵지만, 거꾸로 짧은 음인 뒤음을 먼저 불러 싱코페이션(당김음)으로 "따다ㄴ 따다ㄴ.." 으로 연습하면 쉬워진다. 이때 '따'는 짧게, '다ㄴ'은 길게 부른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따아ㄴ따"가 된다.
깡충리듬군의 정확한 처리는 말쑥하고 산뜻함, 가볍고 예리함, 씩씩하고 힘찬 감동을 모두 갖다 줄 수 있다. 반대로 정적이고 조용한 느낌, 부드러움과 은근함, 어르고 달래는 듯한 느낌 등을 주는 경우도 있다. 쉬운 예로 찬송가 468,469장은 둘 다 매우 비슷한 평화의 분위기다. 후렴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다.
똑 같은 리듬을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처리할 수 있음도 물론이다.
셈여림과 과장
연습할 때는 선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과장'이 필요하다.
나의 옛 은사는 이것을 무대 연기자의 분장술에 비유하곤 했다. 가까이서 보면 얼굴이 화장으로 떡칠한 듯 사뭇 우스꽝스럽거나 괴이하기까지 하지만 멀리서 보면 눈과 콧날 등 선이 또렷해 보인다. 즉 리허설 때 다소 과장한 것이 정작 무대에 나서면 절로 약화 내지 중화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장이 너무 억세어져 딱딱한 습관이 들면 곤란하다. 늘 부드러움과 조화돼야 옳다.
음악 표현 상의 셈여림(다이내믹스)은 대체로 정서/감동과 직결된다. 셈여림 연습 때 과장이 필요한 것도 위와 마찬가지 이치다. 평소 지휘자의 셈여림 싸인을 눈여겨 보아 훈련이 된 찬양대는 어떻게 따르는 것인가를 익히 눈치 채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과장훈련'이 필요해진다.
지휘자들의 셈여림 손짓을 악곡의 셈여림 기호와 비교해 보면 정확한 예가 흔치 않다. 좋게 보면 지휘자 나름의 해석 또는 원곡의 표현에 대한 초월이다. 유명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흔히 그렇게들 한다. 반면 나쁘게 보면 정확성/지휘기교의 부족, 적당주의 또는 원곡에 대한 무시일 수도 있다. 지나친 확대해석 문제도 있다. 토스카니니, 스토코프스키 등은 그런 것을 싫어 했지만 물론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경배용 교회음악에서 과연 악곡의 셈여림에 매번 충실한 것이 얼마나 의미성을 갖냐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특히 셈여림은 해당 가사의 분위기에 달린 때가 잦기에, 번역가사인 경우 원곡 가사에 셈여림된 부분이 번역가사에서도 셈여림 될 만한 부분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셈여림이 지나치게 꼼꼼하거나 곡 자체 또는 지휘자의 해석상 셈여림 표현이 너무 잦아 오히려 인위성이 넘쳐나 자연히 덜 영적이다. 오히려 대범한 해석이 무난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반면 가사에 따라 영감이 넘치는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셈여림이 강조될 수 있다.
스타카토 주법의 독특한 감동
리듬처리와도 직결되지만 가볍거나 씩씩한 표현에서 오는 감동도 있다.
스타카토 주법이 그렇다.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한 레가토 주법과는 반대개념인 스타카토는 반주나 기악에서도 중요하지만, 합창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교인들에게 절로 흥겨움(excitement)을 안겨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스타카토를 제대로 살려 주는 찬양대는 매우 드물다. 기악적인 데다 가사가 매순간 끊겨 흔하지도 별로 중시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핸델의 '메시아' 끝곡 '아멘'에서 스타카토는 자주/거의 무시되거나 뭉개져 버린다. 레가토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이 주법이 교회음악에서 왜 외면되기 쉬운가는 대체로 전통적인 성가나 찬송가의 분위기에서 쉽게 느껴진다.
대다수 고전 성가/찬송가의 무드가 레가토적인 반면 스타카토는 딱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진곡조의 씩씩한 찬송가는 반드시 반주만이라도 일부는 스타카토를 기용해야 옳다. 찬양 합창에서 이따금 드물게 스타카토를 사용하거나 레가토와 극적으로 조화/대비시키면 정서에 호소하는 효과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가 그렇다(이 찬송가는 뿌리와 내용상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추후 논하련다). 그밖에도 찬송가엔 없지만 미국의 옛 남북전쟁 시대에 작곡된 윌리엄 피츠의 '숲속 골짜기의 작은 교회당'의 짧은 '컴(come), 컴, 컴'으로 시작되는 유쾌한 후렴이 스타카토에 적합하다(이 곡의 가사는 이렇다 할 성경적 영감이 없는데 강한 친교성은 있다).
중간 변박 곡인 (기존) 찬송가 417장(큰 죄에 빠진 나를)은 레가토-스타카토의 극적 대비법에 적절한 곡. 3박자의 앞 부분은 물론 흐르듯 물결이 굽이치듯 레가토로 불러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4박자인 후렴 부분은 멜로디의 '깡충리듬'을 최대한 강조하면서 특히 앞 부분 네 마디에서 '반주' 역할을 해 주는 나머지 성부를 스타카토 처리로 최대한 살려 준다.
나의 은사의 해석을 빌면, 남성부의 "날로 더욱 귀하다"에서 프레이즈 끝부분의 장음(2분음)을 (끊지 않고 이어) 그 다음 마디의 첫 4분음과 연결시킨 순간 스타카토로 되돌아 간다. '귀하다'의 가사를 살린 그 효과는 특이하다.
스타카토야 말로 연습 때 각별히 선명한 '과장연습'이 필요한 케이스다. 음을 정말 짧게 내야 실연주 때 간신히 효과를 볼 정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울림소리여야 한다. 순간울림이 없는 스타카토는 메마르고 둔탁한 타악기 소리 같은 느낌이 든다. 일부러 그런 특수효과를 보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 순간울림이 살아 있는 스타카토이려면..
레가토도 그렇지만 특히 순간소리인 스타카토에서 모음과 자음의 발음이 모두 극명해야 한다. 여린소리(피아노)로 연주해도 그렇다. 스타카토용 가사는 순간적으로 당연히 단일박과 단음절 안에 고립된 한 글자일 수밖에 없다. 이때 모음은 최대한 음가를 살려주고 자음은 과장(큰소리가 아님!)에 가깝게 강조해서 내야 한다. ㄱ,ㄷ,ㅈ 등은 된소리에 가깝게 내고, ㅅ,ㅊ,ㅌ,ㅎ 등도 각별히 신경 써서 선명히 해 준다.
받침소리의 경우, 순간처리를 한 뒤 지극히 짧게 나마 울림 여운이 남게 해 주는 것이 비결이다. 예를 들어 가사 '찬양'의 경우 레가토 때의 "차아냐앙"과는 달리, '차.냥.'이 아니라 그야말로 '찬.양.'이어야 한다.
이때 '찬'은 그냥 짧은 '찬'보다는 '차안'을, '양'은 '야앙'을 최소로 축약한 형태로 생각하는 게 유리하다. 왜냐하면 대원들이 거의 다 받침 'ㄴ'을 사실상 거의 생략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곡 끝의 '아멘'이 흔히 멀리서는 '아메'로 들리는 이유가 그것. 이것은 'ㄴ'에서 혀끝을 입천장에 댄 뒤 울림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구강을 활짝 연 채 입술만 다문 'ㅁ'(허밍)은 물론, 'ㄴ', 'ㅇ'의 절반 열리고 닫힌 울림소리의 길고 짧은 훈련도 자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어의 (짧은) '컴', '덤', '험', '펌', '썸', '던', '곤', '캔', '넌', '온' 같은 단일음절 가사도 모음 '어'(uh)의 음가와 함께 끝발음(한글의 받침) 'm'이나 'n'의 울림을 순간최대화해야 한다.]
그러나 스타카토 역시 남용할 성격은 아니며 같은 곡 안에서도 어떤 음을 스타카토로, 어떤 음을 레가토로 늘려 줄 것인지의 기량은 순전히 지휘자의 미학적 해석에 달렸다.
부록: 메이슨 작곡가들과 음악적 감동
찬양곡 합창을 지휘하면서 성경적인 가사에 감동돼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여러 번 있다. 앞이 안 보여 지휘에 곤란을 겪을 정도로. (그러나 대원들의 음성이 흐트러지는 경우는 곤란하다) 이것은 음악이 대체로 청각을 통해 정서에 호소하는 예술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교회음악에서 성경 가사를 음미하는 머리감각 내지 혼적인 감각이 곁들여지고, 더 나아가 성령님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면 영적인 감각에도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런 감동은 지휘자나 대원들만의 것이어선 안되며 온 교우들이 나눠야 할 정서다.
그렇다면 가사 전달이 되도록 완벽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찬양대석 주변의 적절한 곳에다 음향학적으로 배려된 마이크로폰, 방음판 등을 배치하거나 주보에다 그 주일의 해당 악곡의 가사 전체를 간지 등으로 싣는 배려 등을 해야 옳다. [ 필자의 딴 글 참조 ]. 설교자는 한 명이 마이크로 또렷하게 발언하면 그만이어도 찬양대는 서로 다른 진동수로 발성하는 인원이 많기에 소리 울림이 섞여 자연히 그만큼 가사 전달이 어렵다는 사실을 지도자가 인지해야 옳다.
특히 벽이 대리석 등 돌로 된 전통적인 교회 건물은 소리가 땅 땅 튀기므로 가사발음을 제대로 알아듣기가 극난하다. 그 울림이 신비로울지는 몰라도 진리 전달엔 별 도움이 안 된다. 자연히 전문가의 최신 음향 분석과 새 장치가 필요하게 된다.
음악은 기교와 표현이 합일된 시간예술로써 음향/진동/음색/가사 등으로 한꺼번에 청각에 호소하는 만큼 정서에 직접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그래선지 싸탄이 가장 악용하는 예술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음악정서에도 검증이 필요하다.
우선, 음악적 감동과 성경적 영감을 혼동해선 안 된다. 아무리 전문 합창단이 성가를 잘 연습하여 고도의 기교와 표현으로 완주(完奏)해도 신자들에게 별 감동이 없는 때가 잦다. 기도와 기름부음이 결여된 탓이다. 그러나 음악적인 감동을 받을 순 있다.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들었을 때도 그렇다.
이 교향곡 도중 나오는, 쉴러(J.F.v. Sciller)의 시에다 곡을 붙인 합창곡은 전형적인 교향곡 양식을 떠나 기악에다 성악을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특이하기도 하고 웅장한 효과도 좋지만, 기독교음악은 아니다. 그래서 그냥 기본적인 음악적/정서적 감동으로 끝난다. 이 음악에서 '기독교적' 감동을 느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시인/극작가 쉴러는 이신교도인 프리메이슨이었고, 베토벤도 자신의 작품 전반에서 메이슨리의 이상을 그렸다는 설이 꾸준히 있어 왔다. 다만 베토벤이 메이슨이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 것도 발견된 바 없다. 베토벤은 성당에서 기도한 적은 있지만 거듭난 사람은 아니었다.
평소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던 대 시인/극작가 볼프강 괴테는 베토벤을 만나보곤 넌더리를 쳤다. "그의 음악은 훌륭하나 (특히 귀족들에 대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물"로 본 것. 그러나 괴테는 메이슨 명사였기에 이 점은 의문이다. 베토벤이 정말 메이슨이었다면 아무리 건방지기로서니 과연 '형제' 메이슨이 메이슨을 비난하냐는 것. 혹시 베토벤이 메이슨리 가입을 거절한 게 아닐까.
그런가 하면 멘델스존의 '(종교)개혁' 교향곡이나 카톨맄 미사곡을 듣는 기분은 또 다르다. '개혁'은 루터의 코랄 주제를 빌렸기에 찬송가가 생각나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유대계 신교 교인이었지만 그 가족은 볼프강 괴테와 매우 가까웠다. 멘델스존과 그 누나가 괴테에게 늘 영향을 받았던 사실은 흥미롭다.
오누이의 할아버지였던 철학자 모쉐 멘델스존은 당대의 비밀결사조직이자 메이슨리의 일파인 '일루미나티'(일명 광명단/광명파)를 창설했던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를 재정적으로 적극 지원한 사람이다. 멘델스존의 아버지가 신교로 개종했다지만 괴테와 친근했던 사실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다.
그렇더라도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들, 특히 핸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천지창조'(카톨맄적) '3대 기독교 오라토리오'의 하나로 꼽히는 '엘리야' 등은 나름대로 기본적인 감동을 준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독교성보다는 유대교적 이상이 더 강한 점은 가문의 영향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메시아', '천지창조', '엘리야' 등이 다같이 "기독교 오라토리오"라고 불리긴 하나, 알고 보면 사실상 '메시아'는 성공회 교도인 찰스 제넨스가 쓴 가사원본이 신약적 배경과 (정작 참 메시아인) 예수님의 이름 등을 최소로 줄인 데다 핸델 자신이 "교회용으로 작곡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까닭은 분명치가 않다.
'천지창조'는 본래부터 카톨맄 음악이고, 전술했듯 '엘리아'는 유대교적 이상이 강하다. '천지창조'의 작곡자 하이든은 열렬한 구교 신자인 데다 후배 모짜르트의 간언에 못 이겨 약 3년간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있다가 "나의 (카톨맄) 신앙상 더는 못 있겠다"고 탈퇴했다.
핸델이 두문불출하며 '메시아'를 작곡하던 중 '할렐루야'를 쓸 당시 눈물을 흘리면서 사환에게 "하늘나라와 천사들을 봤다고 생각한다"고 한 말이나 부활절에 죽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것 등은 기독교적 정서에 호소하는 데 다소나마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프리메이슨들은 지금도 꾸준히 핸델이 '메이슨 단원'이었다고 끈질기게 주장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핸델이 영국 왕실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핸델도 같은 루터교도였던 바흐(JSB)처럼 많은 작품에 '하나님께 영광'이란 라틴어 문구를 자신의 이름 이니셜과 함께 넣곤 했다. 핸델은 대체로 성경에 유능했다. 핸델이 에이레(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최초로 '메시아' 연주회를 가질 때 그를 쌍수로 반대했던 사람이 성공회 사제 겸 메이슨/작가였던 조너턴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하다.
핸델이 정말 메이슨이었다면 왜 '형제' 메이슨인 스위프트가 그를 반대했는지 의문이다. 핸델이 과연 메이슨이었는지, 조지 워싱턴처럼 메이슨과 이신교도(deist)로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필자는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뒤로 모짜르트의 미사곡에서 전혀 감동을 못 느낀다. 딱딱한 라틴어 경문으로 된 가사도 그렇지만, 볼프강은 아버지 레오폴트처럼 열정적인 카톨맄 신자에다 헌신적인 프리메이슨이었다. 그의 많은 음악이 실제로 메이슨들에게 헌정됐거나 메이슨적 이상을 그린 곡이었다. 모짜르트 음악을 무조건 즐길 성질이 못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메이슨 의식(rite)을 위한, 또 메이슨(독일어 '프라이어마워') 제목을 쓴 많은 곡을 썼는가하면 오페라 '마술피리'는 여기저기 다양한 메이슨 암시물과 상징물을 박아 넣었다. 그의 영세명 '아마데우스'는 '하느님의 사랑'이란 뜻이지만 메이슨으로서 일찌 죽은 그에겐 결국 '메이슨 신의 사랑'이 돼 버렸다.
필자가 이런 말을 하다 보면, 음악을 음악 자체로 순수하게 듣지 못하고 불순한 동기로 듣는 것처럼 비난도 받는데, 그런 주장은 세속적으로는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이슨 이상이 담긴 음악을 기독교음악으로 착각하고 듣는 것처럼 우습고 어리석은 일도 없다. 더 나아가 과연 세속음악적 감동이 늘 순수한 것인지도 의혹스럽다. 남녀의 불륜 스토리로 차고 넘치는 오페라에서 '순수감동'을 받는가?
그렇다고 메이슨이 아닌(?) 작곡가들은 다 괜찮았다는 말은 아니다. 드뷔시는 무신론자였지만 시편에다 곡을 붙였다. 바그너는 일부 카톨맄적 주제를 빌리긴 했지만 다양한 북구 신화들과 메이슨-카톨맄적 이상인 '성배'(聖杯)와 기사단, 특히 전설의 기사 파르지팔(영어 '퍼시벌')의 주제에 깊이 탐닉했다. 그는 또 일루미나티의 본거지인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와 절친했다. 지상에서 가장 우아한 성으로 꼽히는 루드비히의 '백조의 성' 안은 바그너 음악의 테마로 가득 차 있다.
[참고로 찬송가 85 147,196장의 작시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중세 십자군을 적극 지원한 사람이며 특히 문제집단인 '성전기사단'의 사실상 창설 후원자였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SB)처럼 작품에다 기독교 신앙을 구체적으로 표출한 사람들도 없는 거 같다. 물론 그 역시 수많은 세속곡을 썼고 당대만 해도 개혁 후 과도기여서 일부 미사곡도 쓰긴 썼다. 독실한 루터교도였던 바흐는 성경해석에 능통한 일종의 신학자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탐독했던 성경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CB)는 퍽 유명한 메이슨이었다!
모짜르트 외에도 역사 상의 수많은 교회음악인들이 실상 기독교 진리와 거리가 먼 메이슨들이었다.
이들 중 다수가 우리 찬송가 안에 찬송가 작가들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즐리의 조카이자 찬송가 작시자 찰즈 웨즐리의 아들인) 오르가니스트 새뮤얼 웨즐리가 그랬다.
러시아 정교회 작곡가 드미트리 보르티니안스키(찬송가 479장)가 그랬고, 옛 러시아 국가(기존 한국찬송가 77장)의 작곡가인 르포프가 그랬고, 십자군을 연상시키는 '전진하라, 크리스천 군인들'('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이 찬송가의 십자군적 배경에 대해 칼럼을 쓸 생각이다)을 작곡한 아터 S. 설리밴 경이 그랬다.
역시 유명 프리메이슨/계관시인인 데다 문제종교인사 스베덴보리의 정신적 추종자였던 앨프릳 테니슨(찬송가 297장 작사자)의 시에다 붙인 합창곡 '잃었던 화음'으로도 유명한 설리밴은 모짜르트처럼 특심한 프리메이슨이었다는 게 역사적 정평이다. 그와 짝을 이뤄 화려한 영국 세속 뮤지컬 전성시대를 이룬 극작가 길버트 경도 역시 메이슨이었다. 둘 다 영국 여왕으로부터 경(sir) 작위를 받았다.
결론: 무엇이 참 감동과 영감인가?
글이 무척 길어졌는데.. 자, 그렇다면 찬양음악의 최고이상인 참된 영적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부터다! 그 기름부음은 오직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과 기도로써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찬양곡을 연습/연주 하기 전 온 대원들이 일심동체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옳다.
그래야 찬양곡을 들으면서 청중의 삶이 변하거나 환자가 낫는 등의 이적이 일어난다.
필자가 미국인교회 음악위원으로 있을 당시 연습 때마다 찬양대원들과 기악팀 등 온 음악인들이 손을 맞잡고 기도로써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간구했다. 특히 다함께 방언으로 합심기도할 때나 영의 찬양을 할 때 기름부음이 뜨겁고 영감이 넘쳤다.
'그들은 방언을 말했다'의 저자는 서문에서 방언 노래로 발성과 성대가 좋아졌다는 간증을 했다. 사실이다. 방언노래는 때때로 최대 음역을 보장하며 담대함도 아울러 늘려 준다.
필자는 과거 오랫동안 성경에 나타난 '신령한 노래'(그리스 원어: 영의 노래)의 개념과 정체를 찾아 헤맸지만 첫 방언노래를 하면서 의문이 완전 해소됐다. 고대 히브리 성전음악인들인 레비 사제족의 '신령한 노래'도 방언은 아니지만 으레 성령의 영감으로 된 예언을 곁들인 노래였다. 그들 중 다수가 선견자/대언자들이었다.
참된 교회음악의 최고이상인 영적 감동과 기름부음은 가사에 녹아 든 성경 말씀과 성령님으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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