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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찬송가 404장 '하나님의 사랑'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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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작시자 레만 목사, 편곡자인 그의 딸 클로디아 여사
   
      하나님의 사랑 (The Love of God)
                   
 (김삼 역)

  1.
   하나님의 그 큰 사랑- 말로 표현 다 못하네
   가장 높은 별들 너머 가장 낮은 땅끝까지
   죄인들을 구하시러- 외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어- 죄 용서 하-셨네

   주 하나님 큰 사랑은- 헤아릴 수 없고
   영원토록 변함 없어- 성도들 노래하네

  2.  
   모든 시대 다 지나고- 땅의 왕국 멸망할 때
   믿지 않던 뭇 영혼들- 슬피 울며 다 숨어도
   예수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 돌-보사
   모든 죄를 사하셨네- 천국에 이-끌리

   주 하나님 큰 사랑은- 헤아릴 수 없고
   영원토록 변함 없어- 성도들 노래하네
 
   3.
   저 하늘을 두루마리- 저 대양을 먹물 삼고
   모든 나무 붓 삼아도- 주님 사랑 다 못 쓰리
   바닷물을 다 말려도 다 기록 못하며
   온 하늘에 펼쳐 써도- 이루 다 못-쓰리

   오 하나님 큰 사랑은 헤아릴 수 없고
   영원토록 변함 없어- 천사들 노래하네
   
구 찬송가 404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노래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대단한 감동을 받곤 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길이/높이/깊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찬송가로 느껴집니다(에페소 3:18,19).

한글 번역은 1960년대에 '새찬송가'에 먼저 실렸다가 '(통일) 찬송가'에 그대로 옮겨졌는데 첫 번역이 잘못돼 있었습니다. 즉 예컨대 '사랑하는 주님 앞에'(278장) 경우처럼 영어 원문과 음률에 맞춰 음절 4.4.4.4. / 4.4.4.4. 중심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주강박에 어두(어간)가 오는 식으로 하여 9.8.9.8 중심으로 잘못 번역을 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이지요.
이럴 경우 원 작자가 의도했던 호흡 중심 리듬과는 영 맞지 않습니다. 위 번역문은 필자 나름대로 영어 원문 및 가락과의 결속을 감안하여 다시 해 본 것입니다(2절은 상당 부분 의역함).

이 찬송가는 부르는 감동과는 달리, 배경 스토리가 다소 과장돼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찬송가는 프레드맄 레만(Frederick Martin Lehman 1868~1953) 목사 작품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 창작이라긴 어렵고, 기존 시(3절)를 바탕으로 추가했다고 봐야지요.
3절은 11세기 독일 보름스(Worms) 시의 유대 랍비 메이르 바르 이짜크(별명 '샤츠', 일명: 마이어 벤 이차크 네호라이)의 아람어(Aramaic/Syriac) 종교 시 '하다무트'(히브리어: 아크다무트)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그대로 딴 것입니다. 이 원시는 1050년 작으로 추정됩니다.

랍비 요셒 허먼 헐츠가 편집한 책 '유대사상모음'(옥스퍼드출판사, 1922년 증보판) 213 쪽에 실린 시 '아크다무트'(영문)를 보면, 후렴이 없다는 것과 Though를 'Tho'로 줄인 것 외에는 레만이 쓴 3절과 정확하게 똑 같습니다. 따라서 그 전 1910년대에 발행된 시를 그대로 빌렸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만 목사는 이 번역시를 그대로 따고 나머지인 1, 2절과 후렴을 추가한 셈이지요.

작시 내력과 생애
 
이 시가 입수된 경위는 몇 가지 설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제1설: 아내가 이 시를 책에서 발견, 레만의 점심 도시락 통에 넣어 보내줬다
제2설: 정신병동(일설 감옥) 벽에 어느 환자가 낙서해 놓은 시구였다
제3설: 나자렡 캠프 모임에서 듣고 받아 적었다

레만이 1948년에 쓴 팸플맅 '하나님의 사랑-노래의 역사'에 실려 있는 내용에 따르면..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역 초기였던 약50년전 중서부에서 열린 캠프 모임에서 한 전도자가 메시지의 절정에서 이 시구를 인용했다. 그 시구의 심오한 깊이는 우리에게 미래 세대를 위하여 글로서 보존해야겠다는 감동을 주었다..어느 날 일을 잠시 쉬는 틈을 타서 종이조각 하나를 집어, 벽에다 기대 놓은 빈 레몬 상자 위에 걸터 앉아 몽당연필로 기존 시에다 첫 두 연과 후렴을 써서 보탰다." 

1917년 일이었습니다. 당시 레만 목사 부부는 교회에서 지출받는 사역비가 턱 없이 모자라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감귤류 포장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하루 30톤 분량의 레몬/오렌지를 옮겨 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찬송시는 노동현장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레만은 1868년 8월 7일 독일 슈베린 메클렌부르크에서 태어나 네 살 적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 아이오와 주에 정착했지요. 일화에 따르면, 그는 열 한 살 때 돌능금나무 과수원 길을 걷다가 크리스토께 헌신했습니다.
일리노이 주 내퍼빌의 노스웨스턴 칼리지에서 공부하면서 사역 준비를 했고, 아이오와 주 킹즐리/오더본 인디애나 주 뉴런던 등지에서 나자렡 교단 교회를 사역합니다.
1911년엔 가족이 미주리 주 캔저스시티로 옮겨 가 목회를 하면서 나자렡출판사의 탄생을 돕습니다. 후에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했지요. 
시와 복음성가에 많은 관심을 가져 수 백 곡을 썼고 '뭔가 다른 노래들' 5권을 펴 냈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제2집(1919년)에 실렸습니다. 첫 노래를 쓴 것은 서른 살 때인 1898년.
그는 1953년 2월 20일 패서디나에서 세상을 떠나 글렌데일 포레스트론 묘원에 묻혔습니다.

레만 시의 약점

레만 목사의 이 찬송시는 흔히 주는 감동과는 달리 약간의 약점들이 발견됩니다.

우선, 제1절 둘째 줄에서..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위 부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지옥 밑바닥에도 미쳤다는 얘기인데..예수님이 '지옥'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학설에 근거했기에, 마치 이미 지옥에 가 있는 영혼들에게도 두 번째 구원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쉽습니다. 아마도 일부 사도신경에 있는 문장을 참고하지 않았나 싶군요.

그리고..

    The guilty pair, bowed down with care, God gave His Son to win;
    His erring child He reconciled, And pardoned from his sin.

위 문장에서 주인공이 누군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담으로 보입니다.
즉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담/하와 부부 중) 한 명이 에덴에서 죄를 지은 후 두려워 몸을 숙이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 아드님을 주셔서 되찾으시고 그 잘못된 자식과 화해하시어 그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 같습니다.

레만 목사가 무리하게 완벽한 압운(rhyme)을 맞춘 데다..인류의 대표로서 아담도 예수를 통해 완전히 용서하신 듯 묘사하면서, 자칫 인류 전체의 구원이 보장됐다는 인상을 주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짐승의 가죽 옷을 아담/하와 부부에게 입히신 것은 사실이나, 온 인류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무조건 거저 용서된다는 뜻은 아닐 터입니다. '여인의 후손'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조건으로 오가는 시대에 전제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엔 그 점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2절은 종말론적인 부분인데..위에서 셋째 줄에서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바위, 언덕, 산위에서 부르짖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하고 여전히 지속되어 아담의 인류에게 구속의 은총을 베푼다고 돼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 사랑만 강조되고 아무런 구원의 조건이 시사돼 있지 않습니다.  

이 찬송가는 레만이 가락을 쓰고 딸인 클로디아 레만 메이즈 여사(1892~1973)가 합창으로 편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딸도 역시 나자렡 출판사에 관여했었지요.

현재 한국 찬송가에 실린 곡은 Eb 장조로 돼 있는데, 곡중 최고음 Eb 음이 무려 22번 반복되기에 일반 대중이 부르기엔 좀 높고 벅찬 편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배찬양 등 대중 교회음악의 평균 음높이가 낮아진 현실에는 영 안 맞습니다. 따라서 D 장조가 가장 적당하며 사실 D/Db 장조로 된 곡이 여기저기 외국 찬송가에 보입니다.

유대교 배경의 원시(3절)

1, 2절의 바탕시인 3절은 상당히 문학적인 부분인데.. 은유가 되풀이되죠. 뉴욕의 유대계 언론 주이쉬타임즈(NYJT)의 조 밥커 논평에 따르면, 원 시인인 메이르 바르 이짜크(?~1096?)는 유대교 신비가(mystic)였고, 단순한 칸토르('쉘리아 지뿌르'/회당음악인) 차원을 넘어선 카잔이었습니다. 카잔은 탈무드 학자를 겸한 사람이지요.

그의 아들은 십자군에 의해 죽었고 자신 역시 당대의 카톨맄 성직자들과의 "강요된" 논쟁 끝에 죽습니다. 예수 크리스토가 메시아임을 철저히 부정하다가 당대의 카톨맄에 희생 당한 사람의 시가 오늘날 신교 찬송가의 끝 절에 쓰이고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요!

이 시의 원본인 '아크다무트 밀린'(일명 아크다무스)은 당대의 적대적인 카톨맄 성직자들에게 "대응"하려고 준비한 유대교 변증으로서의 성시('피유트', 복수: 피유팀)로 유대교의 진리를 담느라고 했고..카톨맄측 박해를 피하려고 일부러 아람어로 썼습니다.

아크다무트는 45줄의 2행연구(couplets) 총90줄로 된 시로 처음 22줄은 아람어 알파벹을 2회 두문자어로 쓰다가 마지막에 시인의 이름을 두문자어로 쓰고 축도로 맺는 형태였습니다. 현재는 유대 3대 명절의 하나인 '칠칠절'(샤부옽. 일명: 맥추절/맥추초실절 출34:22, 신 16:10 참조) 때, 아슈케나짐(중세 이후 스페인 출신 '세파르딤'을 제외한 중/동부 유럽 출신 유대인) 계열의 회당예배 때 타르굼(아람어 구약) 출애굽기 19~20장을 낭송하기 앞서 읊조려지는 노래입니다.   

아크다무트의 내용은 신비주의 관점에서 본 하나님의 세계 창조, 이스라엘에 토라를 주신 율법수여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꾀어 내려고 애쓰지만 모든 환난을 통과함으로써 이스라엘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내용, 종말론적인 맺음 즉 '레비아탄의 연회'로 (예수 크리스토와는) 다른 메시아 시대가 올 것이란 서정적인 말미로 맺습니다. 
 
그런데..
"바다를 먹물 삼고 모든 갈대를 펜 삼아"라는 멋진 표현은 유대 외전 미드라쉬 또는 다른 외전에서 빌린 것이지 본래부터 벤 이짜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은유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1세기 예루살렘 함락 당시에 생존해 있던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자기 스승인 유대교 대학자 힐렐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답니다.

    "설령 모든 하늘은 양피지, 모든 나무들은 펜, 모든 바다는 먹물이라 해도, 나의 스승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들의 일부라도 기록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건 지나친 과장입니다. 인간이 한 인간에게 배운 것이 정말 그렇게 될까요?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끝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고도 예수님이 하신 다른 일들이 많지만, 만약 낱낱이 다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담아 두지 못할 터입니다!"(요복 21:25. 사역)

아무튼 요하난 벤 자카이의 이 과장법은 이상하게 왜곡되어 후대에 하나님께 적용되기에 이르릅니다. 결국 인간의 유한이 하나님의 무한 앞에 항복하는 모습이랄까요.

17세기 영어권 어린이들을 위한 음독용 동요동시집 '너서리 라임'에도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유대 시를 서구 기독교권에서 따다 빌린 것이지요.

   만일 온 세상이 종이이고
   모든 바다가 잉크이고
   모든 나무들은 빵과 치즈라면
   마실 것은 어떻게 해야지?   

회교권에도 빌려 가, 쿠란에 비슷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여담인데..이 찬송가가 구 한국찬송가의 404장이란 점이 생각 하나를 떠 올려줍니다. 흔히 웹에서 정보를 찾다 보면 해당 페이지가 없을 때 'HTTP 404' 코드 또는 'Not Found'(없음)이란 에러 메시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 담을 자리가 모자란다는 뜻 같아 웃음이 솟구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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