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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카톨맄(천주교)

천주교 미사 심층비평




김삼


카톨맄교 미사의 핵심적인 숨은 오류들을 이 글에서 성경적/논리적으로 지적해 놓았다. 독자는 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몰랐던 것에 대한 통찰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천주교인들이 마음을 열고 이 글을 읽으면, 천주교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길 바란다. 아울러 멋모르고 천주교로 넘어간 신교 출신 개종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겸허하게 시인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티엘티 애독자/편집위원 등풀님은 "천주교는 완벽한 종교"라고 말한 바 있다. 일리가 있다. 기독교가 아닌 종교로서 완벽하다는 뜻이다. 천주교는 일찍이 초중세로부터 예배 형태로서 미사를 프로그램화 해 왔다. 신도들은 사제들의 이끔에 절대호응하며 잘 따라주며, 호흡이 척척 맞는다. 많은 현대인들이 잘 짜여진 천주교 미사 구조에 찬탄하며 선뜻 마음을 준다. 일부 사람들의 생리에도 잘 맞는 듯 보인다. 한국인들 다수는 모종의 잘 짜여진 종교형식에 피동적으로 순응한다. 조직적인 구성의 전통 제례를 선호하는 것과도 통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 미사의 구조로부터 느끼는 점은 사제가 섬김이로서 신도를 섬기기보다, 제사의식과 그것을 집전하는 사제들이 섬김을 받는 자로서 신도들을 종속시키려 고도로 조직화되고 규격화된 종교의식이라는 것. 이를 위해 그들은 바티칸이 보장하는 사제의 권위, 성경과 기타 경문 및 '성문'(聖文)들, 미사음악 등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한다. 천주교의 이 철칙을 의식의 형식, 사제들의 이끎에 잘 길들여진 신도들이 추종해 주는 만큼 (사제아동성추행 등 딴 문제가 아니라면) 별 탈 없이 제도가 지속되고 영속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신약 아닌 구약 취향의 예배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제도는 참여 신도들에게 최소한의 적극성을 요구한다. 평생 독신인 "성스러운" 사제들에게 고분고분 잘 따르게 하고 성체성사, 고백성사 등 교회가 지정한 다양한 성사들에 참여하게 하며.. 난해한 라틴어 종교용어나 사제들의 절대권위, 효율적으로 창안된 전례의식, 그러면서도 사제들이 상상하고 구현하는 '신비'에 신도들이 순응하고 합의/공감해준다. 물론 '평신도'들도 부제들의 부수적 사목이나 독서, 사제 지원 캠페인, 쿠르실료/울트레야(신교의 '트레스디아스'에 해당) 활동 등 보다 적극적 차원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래서 사제들과 신도들의 합일이 이뤄지고, 천주교가 유지된다. 과연 이것은 진리의 질서일까?



이런 천주교의 숱한 면모와 요소들이 신교에서도 은연중 답습된다. 신교의 일각에서는 '전례/예배학 연구' 또는 '관상영성' 따위의 근접방식을 통해 더욱 더 천주교를 닮아간다는 것-부인하기 어렵다. 에큐메니즘의 일각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점증하는 종교 다원적/혼합적 성향의 일부이기도 하다. 도대체 과연 언제부터 기독교가 구약적 의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천주교의 딱딱해지기 쉬운 의식성에다 그나마 '생명'을 불어넣는 게 그네들 나름의 '신비'다. 이 신비주의는 중세로부터 줄기차게 흘러내려왔다. 중세의 모든 교황들/신학자/학자/수사들이 신비주의를 충실히 견지해왔다. 명상과 '십자 성호' 등의 암시적 제스처, 사제(!)가 이끄는 고대지향성 제사의식, 사제와 신도가 주고받는 정해진 대사, 일률적인 챈팅(경문 읊조리기)의 집단합일의식, 단순하고도 다양한 미사음악, 성모/고인들에 대한 동경과 의도적 근접, '성체'와 '성혈'의 나눔, 그밖에도 이른 바 성흔(스티그마타)/발현(어퍼리션) 등에 대한 초자연적 기대감.. 이런 것들을 '신심'으로써 체현하려고 든다. 


그런데 실상 이런 신비주의는 극히 위험하다. 성령의 사역을 거짓 카피하는 종교령, '친숙령'(familiar spirits) 등 악령들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천주교 사람들은 성흔이네 발현이네를 마구 수용/흡입하다시피 하면서, 마치 자진해서 이런 영들을 초청하는 듯 하다. 

사실 천주교에서 이런 데 대한 분별은 극히 드물다. 사제층이나 평신도들이나 그런 신비적 낭만주의를 즐기기 때문이다. 마리아를 지극히/열렬히 "흠숭"하면서 읊는 '아베 마리아'에서 마치 기사가 귀부녀/공주에게 바치는 세레나데 같은 막연한 연모적 감정이 흐르는 것도 이런 신비적 낭만주의에 기인한다. 


성령의 사람들에겐 결국 이것은 성경을 빌려다 쓴 구약적/이교적 종교이지 진리가 아님이 느껴진다. 그러나 종교의 영이 지핀 사람들에겐 그보다 편하고 좋은 것은 없다. 하물며 사제에게 순응하면 '영원'과 '구원'을 보장해 준다는 데야..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는 사제종교이다. 천주교에서는 사제와 제도가 사실상의 왕이지, 하나님이 왕이 아니다. 그리고 적어도 천주교 신도들은, 성경이 보장해 놓은 "왕 같은 사제들"(페트로A서=벧전 2'9)이 못 된다! 귀족 같은 사제들에게 종속된 노예 같다면 모를까. 과언인가 아니면 직언인가?


천주교에서 만들어진 미사에서 정격적인 형식성과 일률성이 느껴진다. 미사의 대부분은 늘 정해지고 짜인 틀과 격식을 따르게 되어 있고, 마치 영화/연극의 시나리오, 대사나 각본처럼 사제와 신도들이 서로 주고 받거나 함께 '합송'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만큼 경배의 자율성이나 임의성이 상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시나리오 각본에 따른다는 것-이것은 일종의 manipulation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톨맄 미사는 신본적이기보다 지극히 인본적이고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과 경문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그렇다.  


아무튼 미사를 위해 천주교는 바티칸에서 제정하고 각국어로 번역/승인된 '미살'이 만들어져 있다. 미사에 쓰이는 경문들은 과거로부터 성경이나 기타 성문 여기저기서 따서 취합 배열한, 정해진 형식들이다. 내용을 보면 성구를 인용하긴 했는데, 어떤 어젠다에 의하여 적당히 편집돼 있다는 인상이 든다. 예컨대 "의무적인 기념 미사 때 여러 기도문들은 기념일의 성격이나 기념되는 '성인'(교황에 의해 시성된 죽은 유명 신도)의 행적에 선택"된다. 또 모든 미사 가운데 포함된 독서와 복음은 전례력에 맞추어 선정한다. 


한국 천주교의 미사문을 보면 (예: http://ch.catholic.or.kr/sweden/submenu/KoreanLiturgy.html ), 일러두기에서 미사 중간에 사제만 할 수 있는 부분이 겹십자로 따로 표시돼 있는가 하면, '사제 및 주송자' 항도 있고, (쐐기모음형인) 두꺼운 라틴 십자 기호로 표시된 부분은 손으로 '십자 성호'를 긋는 부분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의식적/잠재적으로 늘 예수의 (열십 자 형) 십자가와 수난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의 십자가가 열십 자였다고 말하진 않고 당대의 사형대는 오히려 T자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그렇다면 예수님의 머리 위 팻말은 어디 달았을까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십자가가 그냥 기둥형 형틀이었다고도 주장한다. 아무튼 천주교는 다른 모든 상징들과 '성상'들을 중시하듯 이 열십 자 십자가를 모든 삶의 코너에서 애호한다. 그밖에도 미사의 일러두기에는 독서자, 응, 해설자, 합송 ,계, 선창자 등이 표기되어 있다. 

마치 무대를 위한 시나리오 속의 다양한 지시문처럼, 이 표시에 따라 사제를 비롯한 담당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한국어 미사 통상문을 보면, 미사엔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가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시키거나 상호 종속시킬 수 없고 하나의 예배를 이룬단다. 그리고 그 앞과 뒤엔 각각 '시작예식'과 '마침예식'이라는 게 있다. 미사 도중 인사 때는 회중이 반드시 (은총과 평화, 복 등이)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답한다. 사제를 매우 의식하게 만든 구조이다. 

미사는 또 여기저기서 다양한 성구들을 바티칸의 오리지널 어젠다와 산하 사제들, 그리고 신도들의 입맛에 맞게(?) 테크니컬하게 편집하여 활용하고 있다. 




"내 탓이오"-참회기도


한국어 미사문 '시작예식'의 '참회' 부분에서 사제는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니다." 하고 선언한다. 바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 보자. '구원의 신비'? 구원의 신비라는 것은 엄청난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님만이 비가시적으로 신자의 심령 속에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시적인 사제가 선언하고 구현할 수 있는 것인가? 사제가 말하는 이 '구원의 신비'라는 것은 알고 보면 성체성사를 통한 카타르시스와 같은 과정이다. 미사의 최대 핵심과 '신비'는 바로 사제가 베푸는 이 성체성사에 있다. 


그리고..회중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일종의 공개고백을 합송한다. '제 탓이오'라는 고백에 대해 천주교 안팎 사람들이 흔히 상찬하곤 한다.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말"이란다. 그런데 '제 탓이오'라고 대사처럼 뇐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늘 심령 속에서도 정말 내 탓으로 느껴질까, 아니면 입술의 시인으로 끝나고 말까? '제 탓'이라 시인한다고 해서, 그래서 가슴뭉클해진다 해도, 그것이 그 개인의 어떤 자랑이나 공로가 될 순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내 탓'을 모두 주님이 그분의 '탓'처럼 스스로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작 미사엔 그런 대목이 빠져 있는 대신, 놀랍게도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라는 탄원이 불거져 나온다. 그 언제 주님이나 사도들이 이런 이상한 참회 기도형식을 제정했댔는가?? 마리아와 천사, 성인과 형제(수사?)들이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사죄를 빌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는 말이 성경에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분명히 나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빌어주시는 중보(중재자)는 하늘 대사제(대제사장) 예수 크리스토님 그 분 뿐이시다(히 7'25 티모테 2'5 참고: 히 2'17-18; 14'14-16)! 그밖에 어떤 그 누구도 이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인간 사제들이 중보를 대리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난 구약 시대로 끝났다! 이 점에서 천주교는 가히 시대착오적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미 고인인 마리아나 성인들이 그런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죽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성구가 있지 않은가(욥서 7'10, 시편 88'10; 115'17, 전도서 9'5)? 그러나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 천주교는 교황권으로 마리아나 성인들에게 온갖 혜택을 지상에서 부여해 놓고 있다. 성경에 그 근거를 전혀 찾을 수 없는(!) 마리아의 '승천' 따위로. 그러나 성경을 모르는 신도들은 그냥 믿어주고 있다. 


그러니까 천주교 교황권은 영적 영역인 내세까지 지배하는 전능한(?) 권한이 있는 셈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는 진실을 신도들은 "어리버리"-잘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다. 


더 나아가 천주교 신학계 일각에선 마리아의 공동대속자(coredemptrix)와 공동중개자(comediatrix) 역할을 만들어 냈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죄인을 대속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중개하는 역할을 마리아가 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가능한가? 황당한 이단적 주장이다! 중개자는 예수 뿐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죄의 대가를 치르는 대속 사역을 직접 하지 않은 존재가 대속자가 될 수 있는가? 오, 천만에! 또, 성부님께 임명 받은 하늘 대사제가 아닌 존재가 중보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노! 대속자나 하늘 대사제는 오직 성자님이신 예수 크리스토님만이 유일하시다. '성모'님이 아니다! 상상은 자유인지 모르나 착각은 금물이다. 그러나 천주교 교황권은 예수님의 유일한 중재자직을 뺏어 딴 존재들에게 나눠준 지가 오래다. 


그리고 이런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하늘 대사제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탄원하게 만드는 것은 완전 편법이요, 성경과 주님에 대한 일종의 배신 행위이다! 마리아나 성인들은 지상 사람들을 위해 그 무엇도 해 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다만 모든 히브리계 신자들의 선조 아브라함이 하나의 도우미/이끄미가 되어 낙원에 오는 사람들을 품에 받아들여 이끌어준 예를 성경에서 발견할 뿐이다(루카복음서=눅 16'22,23). 그뿐이다. 페트로(베드로)가 천국 문지기라는 주장도 페트로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는 카톨맄교 나름의 비성경적인 상상일 뿐이다. 

 


"세상 죄를 없애시는 주님"


그런가 하면, '대영광송'에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부분이 있다. 요한복음서 1'29를 인용한 여기에서, 세상의 죄를 '없애신다'는 천주교의 번역이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전의 공동성서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라고 옮겼다. 


'없애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이로'(αἴρω)의 일차적(!) 어의는 '없애다' 보다는 '들어올리다' 또는 '끌어올리다'이다. 그밖에 올리다, 갖고 가다(carry), 지고(메고) 가다..그리고 부차적인 뜻으로 없애다, 파괴하다, 그치게 하다 등의 뜻도 있다. 따라서 어린양이 땅에서 위쪽으로 들어올려진(요한복음서 3'14; 12'32) 십자가 위에다 죄악을 들어올리고(tp raise up) 올려, 한 몸에 지고 가심(to take away, carry away)이 여기서 가장 걸맞은 어의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영어 버전은 'takes away'(지고 가다)로 옮겼다.


물론 주님이 죄와 마귀를 없애러 오신 것도 맞고, 십자가에서 죄를 없애신 것도 맞다. 그런 표현들이 성경에 더러 있다(예샤야후서=사 44'22, 로마서 11'27, 히브리서 9'26; 10'4,  참조: 히 2'14). 그런데 십자가에 달릴 당시 온 세상의 죄를 자동으로 다 없이 하셨는가?! 만약 그러셨다면, 현재 세상엔 죄와 악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이래서..이 구절은 대다수의 영역본(!)들과 전통적인 기존 한글 성경처럼 '지고 가시다'(takes away)로 해석돼야 더 걸맞다는 얘기가 된다. 대다수의 성경이 그렇게 번역돼 있는데 왜 유독 천주교 성경만은 '없애시는'으로 되어있는지 궁금하다. 

더 나아가 주님이 죄를 없애시는 것은 진리이지만, 카톨맄교의 성체성사나 고백성사 따위를 통해 죄가 없애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로는 주님이 없애신다고 하면서도 그분을 '대리'한다는 어떤 제도나 행위로 죄가 없애진다고 막연한 인상과 신심을 주는 것이 천주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이젠 더 사제나 사제제도에 묶일 필요가 없으며, 교권주의에도 종속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그런 것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미사 속 마리아 숭경


미사문에는 사도신경도 인용되고 있는데 주목을 끄는 주문이 들어있다. [ 사도신경을 경배의식 가운데 쓰는 교회들은 이것이 천주교에서 전래된 관행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딴 미사문의, 비슷한 더 긴 신경에도 역시 이렇게 표시되어 있다. 왜 사제들은 신도들에게 이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깊이 숙이라고 주문/강요하는 걸까? 다른 것보다 '동정 마리아' 때문일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들은 이 정도로 동정 마리아를 존숭한다. 

본 티엘티의 몇몇 비평 글에 달린 일부 천주교인들의 댓글에서 그네들의 동정 마리아 흠숭 사실을 부정하려 들지만, 마리아 흠숭이 신교인들에게 극히 좋지 않은 인상을 주기에, 포교/개종 유도 차원에서 몸조심 한다고 밖에 이해되질 않는다. 



성체성사


미사 중 성체성사(sacraments)를 살펴 보자. 한 (계절)미사의 해설문을 보면, 천주교 신학자는 크리스토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새로운 파스카(=유월절 만찬)를 세우시고 그것을 통해 교회 안에 십자가 제사를 현존하게 하셨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성체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잔치로 당신 교회에 남겨 주신 제사에 온전히 참여하게 한다."


(신교에서도 흔히 구교를 따라 그렇게 부르지만) '마지막/최후의 만찬'이기보다 주님이 지키시고 행하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주님은 부활 이후에도 40일을 하늘/땅을 오가시면서도 (여기 "하늘/땅을 오가셨다"란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필자의 다음 글을 참조하라: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예수-승천은-딱-한-번  ) 이제는 사람들과 만찬 등 식사를 도무지 더 안하셨겠는가? 실제로 부활 후에도 식사를 하신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것이다(참고: 뤀 24'30,41-43, 요 21'9-13). 다만 부활 이후로는 당신의 서원적 예언에 따라 유월절 만찬이나 포도 식품들을 안 드셨을 뿐이다(뤀 22'15-18). 


그런데 주님이 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통해 과연 교회 안에 십자가 제사를 현존케 하셨는가? 이것은 천주교가 성당 안 제대 쪽에 수난상을 달아놓은 것을 은연중 연상시킨다. 왜 천주교는 십자가 제사가 교회 안에 현존한다고 믿는 것일까? 그래야만 그들의 사제 제도와 '성체성사'의 절대성이 유지될 수 있겠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신학자는 또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는 주님 친히 행하시고 당신을 기념하여 반복하도록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을 수행한다"고.

사제가 예수 크리스토를 대리한다고 해 놓아야 죄의 대속을 위한 짐승 제사를 구약 사제들처럼 대리할 수 있고, 사제권/제사권이 보장(?)되겠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천주교의 몇 가지 핵심적인 오류들과 그에 따른 숨은 어젠다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천주교는 예수님이 이 천 년 전 단번에(!), 영원히(!) 완성하신 십자가 제사를 임의적/인위적으로 '현존'시켜 오늘날 미사 때 재현하고 있다. 즉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단번에 십자가 제사를 완성하신 것(로마서 6'10, 히 9'12; 10'10,12)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반복하게 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단 한 번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사역을 영원히 완성하시고도(히 10'14!), 천주교에서는 억울하게도 매번 다시 죽으셔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성경 진리와는 정반대인 괘씸한 소위이다. 천주교 미사의 '제사'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은 성당 안의 십자가상과 제대 앞에서 매번 돌아가셔야 하니, 실로 크리스토님의 십자가를 짓밟아 현저히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둘째로, 천주교의 성체성사는 단순한 기념만찬이 아닌 살과 피의 제사 행위이다! 그들은 성체성사 때 사제가 축성을 하고 나눠 주는 빵과 포도주가 곧 화육/화혈된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구약 제사 때처럼 살 냄새, 피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게 그나마 천만다행(?)인 셈이다. 


한 미사 해설문에 의하면, "예물 봉헌에서 빵과 포도주가 물과 함께 제대로 운반된다." 여기서 제대(祭臺)란 제사를 드리는 단을 뜻한다. 왜 빵과 포도주가 제대로 옮겨지는가? "감사기도 안에서 구원의 업적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 기도의 힘으로 봉헌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사제의 기도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 등 예물은 곧장 크리스토님의 십자가 제물인 몸과 피가 "된다"는 발상이다. 예물 준비기도에서도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 구원의 음료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구한다. 


사제는 기도한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십자를 그으며) 피가 되게 하소서." 

 

제대로 옮겨 온 빵과 포도주가 과연 이 축성기도로써 그 자리에서 생명의 양식과 생명수로 변해 줄까? 여기서 우리는 또, 천주교의 신비주의의 본질을 알게 된다. 크리스토님의 몸이 생명의 빵으로 오신 지 이미 오랜데도, 지금 인본적/작위적 방법으로, 강제로 땅의 빵과 포도주로 그 초자연적 체현 내지 재현을 반복해 보겠다는 발상이다. 당연히 불가능하고도 당치 않은 작위이다. 이래서 성체성사를 노래한 세자르 프랑크(카톨맄 작곡가!)의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을 신교 교회에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사람이 만든 땅의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살과 피가 '된다'니 신화나 전설보다 더 웃기는 얘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쯔라임 출국(출애급) 후 이스라엘의 광야여정 중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셨고, 그분의 초자연적 권능으로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과연 크리스토님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리신 생명의 빵과 물, 포도주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이것을 완전히 역으로 적용하고 있다. 땅의 소산물로 초자연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카톨맄교가 본디 그리스-로마 문화의 신화적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주님은 "내 살은 참 빵! 내 피는 참 음료수!"라고 선언하셨다(요 6'55). 따라서 땅의 빵과 포도주를 갖고 나누는 성찬은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그것이 곧 신자의 내장 속, 몸 속에서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지 않는다! 성체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찔렸고, 성혈은 이미 십자가 위에서 뿌려졌다. 우리는 이미 이뤄진 그것을 다만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묵상하고 기념하면 되는 것이다.  


크리스토님은 다시 십자가 희생을 치르실 이유도, 필요도 없다. 두 번 다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실 까닭이 없다. "다 이루셨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요 19'30). 그런데 다 이루신 것을 천주교 성당에서는 인위적으로 재생하고 있다. "아니, 다 이루지 않으셨다"고 선언하는 것에 진 배 없다. 이 발상을 가령 연극 대사로 옮긴달시면, "주님, 십자가 제사는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늘 반복되어야 합니다. 자, 십자가에 올라와 또 다시 달리세요. 또 다시 죽어주세요! 매일 그렇게 해 주세요! 안 그러면 우리는 못 살아요. 구원과 영생을 못 얻어요" 함과도 같다. 


이 명료한 논리적 귀결을 왜 똑똑한 구교 인사들이 지난 십 몇 세기를 거쳐오면서도 여태 깨닫지 못하는지 도시 모를 일이다. 일찍부터 그들이 성경에 대해 무식했다는 얘기다. 한심하다. 아니라면, 아마도 그들의 숨은 이익과 어젠다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 이미 앞에서 충분히 시사한 바대로, 천주교에서 크리스토님의 대속 사역은 미완성인 채로다. 그들에겐 주님의 구원과 대속이 "다 이루었다"가 아닌 "덜 이루었다"의 작업이다. 그래서 카톨맄 사제들이 '덜' 완성된 대속을 완성시켜 보려고 몸소 나선 형국이다. 

따라서 구원의 업적에 대한 그들 나름의 감사기도도 논리적으로는, 이미 완성된 구원에 대한 감사기도이기보다 외려 '덜' 완성됐음을 다행으로 보고 감사하는 형국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과연 사제나 신도의 '기도의 힘'으로 그 빵과 포도주가 크리스토의 몸과 피가 돼 줄까? 독자의 상상에 맡기지만 그런 변화는 성경이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요, 신심이요, 기도이기 때문이다.  



라틴 미사의 '감사기도'의 구성요소들 가운데 '에피클레시스'(그리스어 ἐπίκλησις, 라틴어의 '인보카티오'/invocatio에 해당)란 게 있다. '에피'(위에)라는 접두사와 '칼레오'(부르다)가 결합된 것이다. 본디 정교회에서 유래됐으며 "위로부터 성령을 불러 내리다"라는 뜻이 있다. 이것을 한국 천주교는 '축성기원'으로 옮겼다. (성체축성후 교우들의 일치를 기원하는 두번째 에클레시스는 '일치기원'이다.) 이때 회중은 무릎을 꿇으며 "봉헌된 예물이 크리스토님의 살과 피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느님의 능력을 청하며 기원한다.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가 되게 해 달라고..? 정말 이상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정교회에선 에클레시스가 주로 '아남네시스'("나를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지시문)의 뒤에 오지만 서구 카톨맄교회에선 앞에 온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 때 빵 나누기, 포도주 나누기 전에 각각 하신 두 번의 축사를 본뜬 것이다(마태복음서 26'26,27).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셨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축사의 직접적인 내용을 알지도 못했고, 기록하지도 않았다. 주님이 이 두 번의 축사 때, "지금 이 빵이 제 살이 되게 하소서", "지금 이 포도주가 제 피로 변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만약 천주교의 화체설에 의한 성체성사와 그 기도가 옳다면, 첫 성찬인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의 주님의 기도도 그랬어야 할 것이며, 그래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이 먹고 마셨어야 했으리라. 과연 그랬을까? 


우리는 성경을 바로 풀어야 한다! 왜 주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 이후 하늘나라에서 유월절 만찬이 최종적으로 성취되기까지 다시는 먹고 마시지 않으신다 하셨는가(뤀 22'16)? 십자가에서 그분의 살과 피가 생명의 양식과 생수가 이미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만 그것을 기념하라 하신 것이다. 

주님이 첫 새 성찬을 세우시고 이끄실 때, 빵과 포도주가 감사기도로써 살과 피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살과 피가 바로 영적 차원에서 이미 생명의 빵과 음료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영적인 비밀은 이미 오래 전 밝혀졌다(요 6'27-35,48-58). 사도 파울의 계시로도, 매번 기념하며 나누는 성찬에서 떡과 잔이 이미(!) 주님의 몸과 피이지(코린토A서=고전 10'15,16; 11'23-27), 아직 몸과 피가 아니기에 "몸/살이 되게 해 주소서", "피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화체/화혈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징이다. 만약 상징이 아니라면, 실제로 주님의 몸이 갈갈이 찢기고 모든 피가 최후의 한 방울까지 인육과 인혈로써 보존되어 훗날 모든 교회에 나눠졌어야 했고, 물론 교회는 식인/식혈의 장소가 됐을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발상의 한 편린이 바로, 마지막 만찬 때 주님이 사용한 소위 '성배'에다 십자가 처형 때의 '성혈'을 담아 보존했다는 황당한 전설이다. 왜 '성혈'을 보존할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나 성배에 실제 피를 담았다면 식혈을 연상시키며 '성배'설은 천주교의 화체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엄연히 식혈을 금하고 있다. 만약 성배설이 타당하다면, 마땅히 누군가 주님의 몸 조각도 일부 찢어서 보관했어야 했을 것이다. 왜 살덩이는 아니고 피만인가? 오늘날 소위 '나주 성모 발현' 사건 등을 통해 초자연적으로 성체/성혈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두 천주교의 잘못된 화체/화육 신앙에 대한 친숙령들의 장난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생명의 빵에 관한 해설을 하실 때, 주님이 나눠주실 빵(몸)이 이미 세상에 생명을 줄 그분의 살이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로 최종 완성된 것이다. 이미 과거형이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이 진리를 안 받아들이고, 매번 미사와 제사 때마다 살과 피로 변하게 해 달라고 울부짖는다. 그래서 성체성사 때마다 또다시 빵과 포도주가 '축성기도'로 육/혈이 되곤 한다. 성체성사가 끝나고 나면 또다시 예물은 보통 빵과 포도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천주교 미사 때마다 주님은 매번 다시 죽으시는 셈이다. 부활의 의미도 별로 없는 것이다. 천주교의 주님은 일년에 한번 부활절 새벽 때 부활하시는 모양이다. 그리고는 부활절 미사 때 또 다시 죽으신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는 이미 이뤄지고 성취된 생명의 과거와 영적인 현실은 믿지 않고, 다시 축성기도로 살과 피로 변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불신과 불안의 미래-과거 반복형 제사만 믿고 있어, 실제로는 믿음과 생명이 없는 종교다. 사실상 불신의 유대인들과 다름 없다. 주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나?"라고 불신했다(요 6'52).    


왜 이럴까? 이유를 캐면, 자명해진다. 매일 미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성체를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생명과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불안으로써 천주교도들을 유형적/가시적인 제도교회와 그 사제/교리/신학에 묶어두기 위한 것이다. 구속(救贖)을 내세운 구속(拘束)이다! 이것은 제도적/율법적 종교이지, 결코 생명의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부활의 의미가 없다! 그들이야 뭐라고 주장하든. 


참 부활을 믿는다면,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피와 살을 상.징.한.다.는 것, 그래서 주님의 수난을 기.념.한.다.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미 영적으로 살과 피인 것을 믿는 대신, 매번 살과 피로 변해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죽은 믿음이지 생명의 믿음이 아니다. 천주교의 예수님은 매번 죽어서 매번 몸과 피의 제사를 바쳐야만 한다! 이미 온 세상 죄를 위해 희생된 몸이 천주교에서 또 다시 매일 매번 희생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성경의 예수님이 아니다! 이 비진리의 현실을 지금이라도 깨닫는 천주교인은 복되다! 반면 이 진상을 깨닫고도 돌아오지 않는 개종인(전 신교인)은 불행하다.      


말하자면, 지금 천주교 사제/신도들은 이미 주님의 예언과 선언 속에서 생명 주는 살과 피가 되었기에 다만 믿음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생각은 않고, 계속 매번 펑! 펑! 하고 실물로 변해 주길 바라는 일종의 '신비 구현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천주교의 신비주의 성향은 '성흔', '발현' 등 다양한 초자연 현상의 발생 및 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빵과 포도주가 크리스토님의 살과 피로 변해 달라는 믿음은 바른 믿음, 참 믿음이 아니라, 잘못되고 뒤틀린 믿음이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왜곡이요 궁극적인 불신이다. 

 

현제설?


앞에서도 비쳤지만 성찬 제정과 축성문이라는 해설을 보면, 크리스토님 자신이 마지막 만찬에서 세우신 '제사'가 "크리스토님의 말씀과 동작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바쳐진다"는, 이를 테면 현제설(現祭設)을 주장하고 있다. 옳은 발상일까? 천주교 나름의 발상과 신학과 교리일 뿐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주님 당신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사'라고 표현하시거나 풀이하신 적이 없고 제자들도 신약 성경 전반에서 그런 언질을 준 적이 없다. 주님은 단지 기념하라고 하셨을 뿐이다. 


물론 우리가 늘 드리는 예배가 제사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 우리의 삶과 헌신은 곧 하나님께 영적으로 드려지는 예물이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영원히 바쳐진 주님의 살과 피는 두 번 다시 제사화 될 수 없다.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온 신심으로 합심하여 기도하고 간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미 완성된 제사가 반복될 수 없다. 

천주교의 화체설은, 살과 피가 아니면 제사가 아니라는 주장과도 같다. 하지만 주님 자신은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로 기념하라고 하실 뿐이다. 그런데도 카톨맄 신학자는 말한다. "제자들에게 이 (화체/화혈과 제사의) 신비를 영속적으로 계속하라"고 명하셨다고. 그들이 말하는 '신앙의 신비'란 다름 아닌, 화체/화혈/현제의 신비주의를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의 진리를 밝혀야 할 카톨맄교 신학자들은 히브리서 등 성경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해석해왔다고 믿기 어렵다.


천주교는 영성체 의식에서 성찬 참여를 준비시키는 과정에서 '주기도(주님의 기도)'를 한다. 이 주기도가 복음주의 교회를 제외한 신교 교회에서도 예배의식화되어 있다. 그러나 주기도의 의식적 사용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성경과 초기교회의 어느 부분에서도 그런 용례를 볼 수 없다. 사도신경처럼 주기도의 의식적 사용도 천주교에서 온 것이다. 


이제 영성체 전의 기도를 보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저를 구하소서. 그리고 언제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이 기도를 보면, 부활은 강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미 생명을 주셨다고 과거형으로 표현해 놓고는, 정작 성체성사에서는 매번 기도와 신심으로 그 생명이 다시 나타나고 재현하길 바라고 있으니, 모순이다. 또한 미사 때의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구해 달라"고 주기도를 빌려 기구하고 있지만, 성체성사가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신도를 구해 줄 수 없다! 오직 주님이 이미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또한 주기도는 비록 신약성경에 기록됐으나 아직 신약시대/복음시대/은총시대/성령시대/교회시대가 오기 전의 구약적인 기도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것은 천주교에서 붙인 명칭의 인상과는 달리, 주님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 성령강림 전까지 제자들이 따라야 할 그들을 위한 제자들의 기도의 샘플이었다. 그 기도가  예배의식 때 할 만큼 중요한 기도라면 초기교회가 안했을 리가 없고 언급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그러나 성경엔 그런 흔적이 없다. 

주님의 기도는 오히려 지상사역 중의 몇몇 기도, 한적한 새벽 미명의 기도, 겥세마네의 기도, 요한복음 17장의 기도, 십자가 상의 기도..등이었다. 이처럼 천주교는 수많은 잘못된 교회용어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주님의 몸인가, 성령인가?


예의 미사 해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신자들은 그 미사에서 축성된 빵으로 주님의 몸을 모시기를 열렬히 갈망한다. 어떤 때에는 성혈로 영성체한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 십자가 신비의 나눔이라는 통공이 더 잘 드러난다." 

 

위의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천주교에 과연 성령신앙 내지 성령관이 있는지 의혹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신자라면, 속에 "주님의 몸"을 모시길 갈망하는 게 아니라, 속에 주님의 영인 성령님을 이미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라 구원을 받기 원하는 비신자들은 예수님 곧 그분의 영이자 성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기를 갈망하는 것이고. 


그런데 이 확신이 없는 건지 성령에 대한 이해가 없는 건지, 성령 모셔들이기를 원치를 않는지, 천주교도들은 성령을 속에 모시기보다 오로지 "크리스토님의 몸"만 모시길 열망하니, 이상한 노릇이다. 아무튼 얼마나 열렬히 하든 상관 없이 성경은 그런 '갈망'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 이 진실을 알면, 그들의 수고가 얼마나 헛된가도 알 것이다. 



다음을 보자.


사제: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합송: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사제: 그리스도의 몸은 저를 지켜 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그리스도의 피는 저를 지켜 주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위의 합송 뒷 부분은 엉뚱하게 신유에 관한 성구(루카 7'7)를 인용/삽입한 것으로, 그 적용이 비성경적이다. 무조건 성구를 적당히 배열한다 해서 그것이 곧 신적 권위를 갖는 건 아니다. 그리고 크리스토의 피가 우리를 지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독생자 예수를 믿는 믿음이지, 이런 기구와 같은 행위가 아니다. 



천주교의 구상화(비주얼라이제이션) 신학  


천주교가 추구하는 빵의 육화, 포도주의 혈화는 뉴에이지의 총아인 구상화(visualization)와 사뭇 닮아 있다. 그들은 '신심'으로 한다지만, 성경이 뒷받침하지 않는 것을 추구한다는 데 그들의 영적이 아닌 혼적 노력의 한계가 보인다. 구상화 작업처럼 천주교인과 사제들 다수도 이 육화/혈화를 마음으로 열렬히 상상할 것이다. 비록 구상화와 다르다고 주장해도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구상화에 대해서는 긴 얘기를 않을 테니, 보다 자세한 것은 다음 블로그에서 검색해 보기 바란다. http://blog.naver.com/yoochinw/


영성체 후 사제는 기도한다.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왜 성령님을 받아 모시는 대신 굳이 성체를 모시고 받들겠다고 하는가? 성경은 그런 모심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천주교 미사음악 비평


천주교의 미사음악은 대체로 고도로 기능적인 '목적음악'이다. 특히 읊조리는(chanting) 형태의 경문송들이 그렇다. 기독교성을 띤 다수의 음악들이 기능적/목적적이지만, 순수한 신앙으로 그 기능성이 상쇄될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이 신앙보다는 문자적/의례적 형식에 치중하는 것이라면, 그만큼 찬양으로서의 순수성이 떨어진다.그런 의미에서 천주교의 다양한 미사음악은 찬양곡으로서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성경대로의 신앙보다 제도 교회의 미사를 위한 목적과 어젠다에 부합한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일부 미사곡들 특히 합창곡들의 예술성이 뛰어났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중세 천주교의 예술지원 정책과 관련, 교회와 서로가 서로를 적당히 이용하는 관계였던 세속 작곡가들이 천재적이었더라도 그 예술성이 곧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능을 주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재능을 발휘했다고 볼지 몰라도, 결국 제도교회의 목적과 어젠다에다 재능과 예술성을 퍼부었을 뿐이다.  


신교가 미사곡을 연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다만 예술적 목적을 위해 연주하는 사례가 가끔 있는데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찬미하는 내용인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도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에 신구교를 막론하고 자주 불리지만, 신교 버전은 가사가 미화/번안된 것이고, 카톨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본디 가사는 비성경적이다. 


요즘은 미사가 아닌(?) 천주교 모임에서 신교 노래들을 활용해 사뭇 당혹스럽다. 지상에서 카톨맄교회만 유일한 참 교회로 믿는 그들에게 신교 찬송가 가사들이 도무지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지..? 아니면 천주교에 호기심을 갖는 신교 교도들을 호리려는(?) 술책의 일환인지는 몰라도.. 이 말은 실제로 신교계에 다양한 천주교 인사들 및 친카톨맄 성향 사람들이 비밀리에 교활하게 천주교 영성으로 신교들을 유혹하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분명 천주교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와 천주교가 좋다면, 그는 적어도 진리를 찾는 사람은 아니다. 성경 진리는 그런 인위적이고 율법적인 의식 중심의 미사를 지지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적인 사제/의식의 시대는 구약시대로 끝났다. 사실 카톨맄 교리는 일부 성경을 빌린 내용들과 함께 다양한 비진리들이 동시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이제 사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성도 곧 위로부터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각각 왕 같은 사제라고 밝혀준다. 바로 이 진리를 구교는 십여 세기전부터 버리고 묵살하고 외면해 왔다.

자기네 '사제' 제도의 영속화를 위해서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책임을 지기 바란다면, 천주교의 온갖 비진리로부터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